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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금아 Nov 13. 2023

어느 고해소에서

  

                       

  늦은 밤, 문학 모임을 끝내고 집이 같은 방향인 일행과 택시를 탔다. 도중에 그가 내리자 기사는 시인들이냐며, 시 낭송을 부탁해도 되겠느냐고 했다. 어쩌나! 외울 수 있는 시라고는 달랑, 소월의 시 하나였다. 한겨울에 <진달래꽃>을 낭송하고 나니 궁색했다. <사평역에서>를 버벅대다가 스마트폰으로 검색하여 겨우 마무리했다.

  기사는 금세 시에 대한 느낌을 곁들였다. 시를 두 편이나 받았으니 택시비를 안 받아야 하는데 먼저 내린 손님이 결제를 걸어 놨으니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더니 시인들은 한 달에 얼마나 버는지 물었다. 그는 진짜 궁금했던 모양이다. 시 한 편에 얼마인지, 한 달에 몇 편이나 쓰는지, 월급은 누가 주는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못 들은 척하면서 대답을 하지 않고 있자니 더 옹색했다. "시요? 돈으로 매길 수 없지요. 시인들에게는 시가 밥이지요." 하고 얼버무렸지만 시가, 정확히 말하면 수필이 나에게 정말 밥이 되는지 가책이 되었다. 

  자정을 지나면서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어두운 눈길에서도 차들은 무서운 속력으로 달려갔다. 야간에 운전하면 힘들겠다고 했더니 뜻밖이다. 밤낮이 바뀌어 가족에게 미안해서 그렇지, 길이 막히지 않아 덜 피곤하고 무엇보다 고요히 생각할 수 있어서 좋단다. 그런데 이제는 심야 운전을 접어야 할지 고민이라고 했다. 차도로 뛰어드는 개와 고양이 때문에 하룻밤에도 몇 번씩 간이 철렁 내려앉는다며 며칠 전 일을 들려주었다. 

  부평까지 손님을 태워다 주고 서울로 돌아오던 깊은 밤이었다. 바퀴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 길가에 차를 세우고 살피는데 큰 개 한 마리가 다가왔다. 하야말끔한 털이 버려진 개처럼 보이지 않았다. 잠시 집을 나온 것 같더란다. "인마! 들어가! 시간이 몇 시라고? 어서 집으로 가!" 쫓아도 비켜설 뿐, 떠나지 않았다. 타이어를 갈아 끼우고 운전석에 앉아서 보니 이번엔 범퍼에 앞다리를 올리고서 애절하게 짖더란다. 차에서 내려 호통을 쳐도 물러서지 않고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눈을 보니 내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 쉬었다 가자 싶어 편의점에서 커피를 사 들고 나왔어요.” 개는 빙빙 돌며 기사를 올려다보았다가 신발을 핥았다 하더란다. 길을 잃었나 싶어 목줄을 살폈지만 주인 연락처가 없었다. 차 안에서는 호출 신호가 연신 반짝였다. 더는 시간을 끌 수 없어 남은 커피를 바닥에 버리고 차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다 보니 개는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조수석 차창을 내려 손을 흔들자 그제야 체념했는지 어슬렁어슬렁 비켜서더란다. 

  시동을 걸고 다음 목적지를 검색할 때였다. 강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밤공기를 뒤흔들었고, 앞유리로 차 한 대가 쏜살같이 길을 돌아나가는 것이 보였다. 전조등이 길 한복판에 나동그라진 흰 물체를 비추었다. 반사적으로 차 문을 열고 달려나갔을 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피투성이가 되어 널브러진, 방금까지 자신과 눈빛을 나누던 그 개였다. 바로 곁에 있던 목숨이 주검이 되었을 때의 아찔함은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며, 기사는 그때까지도 죄책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호출 신호 무시하고 조금만 더 같이 있어 줬더라면 죽지 않았을 겁니다. 커피라도 다 마셨더라면……. 꼭 할 이야기가 있었지 싶어요. 눈빛이 그랬어요. 생각하니까 새끼를 떠나보낸 것 같기도 해요. 주인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니까 그 야밤에 돌아다녔겠죠. 이야기를 들어줄 상대를 찾느라 말이에요.”

  내일은 서점에 가서 시집이나 한 권 사 와야겠다고 했다. 책방에 갔던 때가 이십 년도 넘은 것 같다며 시 한 줄이라도 읽고 살았더라면 개를 그렇게 매정하게 쫓아버리지는 않았을 거라고 한탄했다.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한참을 달렸다. 

  차가 신호등 앞에 섰을 때 가방 속 시집이 생각났다. 시집을 꺼내어 기사에게 건넸다. 매우 기뻐하며 값을 묻기에 선물이라고 했다. 그는 몇 번이나 고마워하며 혼잣말인 양 되뇌었다. 시집을 공짜로 받아서는 안 되는데 미안하다고. 시인 선생님이라면 눈빛만 보고도 개가 하는 말을 다 알아들었을 거라고. 그리고는 꾹꾹 눌러두었던 내 속의 말을 기어이 끄집어내는 것이었다. 

  “어디 개한테만 그랬겠어요? 이야기 좀 들어줬으면 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말입니다. 어쩌다 만난 친척이나 친구가 아픈 소리라도 할 눈치다 싶으면 나중에 밥이나 한번 먹자며 도망쳐버렸어요. 허구한 날 바쁘다는 핑계 대면서요. 그 밤에 개를 치고 내빼 버린 그 운전자는 바로 나예요.” 

  눈은 폭설이 되어 있었다. 택시 안이 고해소(告解所) 같았다. 그가 나의 사제가 된 듯했다.          

                                                                   (『에세이21』2022.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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