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 졸업식장은 울음바다였다. 좌절과 서러움, 알 수 없는 아쉬움이 뒤범벅된 회한이었다. 나의 여고 시절은 그렇게 유별난 이별 의식을 치르고서야 끝이 났다.
1977년 5월 어느 날, 대학교 학과 사무실로 한 통의 편지가 왔다.
‘朴錦仙 孃에게. 諸君! 君에게 글을 쓰려니 옛일이 그리워지려 합니다. 良心의 텃밭에서 기른 그 意志로 하나하나 塔을 쌓아가길 빕니다. 學問을 닦아 앞날에 榮光 있기를 빕니다. 客地에서 부디 健康에 留念하시오.’
모교의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온 편지였다. 그 무렵 나는 서울의 한 여자대학에 갓 입학한 신입생이었다. 난생처음 시작한 서울살이에 주눅이 들어 있던 촌뜨기에게 그 편지는 큰 격려가 되었다. 특히, 내 본명의 마지막 자(字) ‘선’은, 신선 ‘仙’ 대신 착할 ‘善’으로 쓰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교장 선생님이 졸업생의 이름을 한자로 정확하게 기억해 주신다는 것만으로도 자긍심이 느껴졌다.
고교 입시경쟁이 치열했던 때다. 당시 진주에는 인문계 여자고등학교가 두 개 있었다. 진주여고와 나의 모교 삼현여고가 있었지만,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여고’는 진주여고 하나뿐이었다. 나는 ‘여고’ 입시에 실패하고, 개교한 지 삼 년째이던 삼현여고에 입학했다.
시내에서 뚝 떨어진 외곽 모래벌판에 덩다랗게 있던 콘크리트 건물은 유배지 같았다. 그해 삼월, 도동벌의 꽃샘바람은 왜 그리도 심란하던지……. 학교 울타리를 따라 서 있던 어린 소나무들이 바람에 휘둘리는 모습이나, 어디서 왔는지 모를 새끼염소들이 운동장 가장자리 모래 더미에 코를 박고 마른풀을 뜯는 정경은 꼭 우리들 같아서 슬퍼지곤 했다.
가만히 있어도 서럽던 시절이었다. 어디를 가나 ‘삼류’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전교생 중 많은 아이가 나와 같은 처지로 고향인 인근 소도시나 소읍을 떠나와 자취나 하숙을 하고 있었다. 첫 좌절의 경험은 한창 키워야 할 꿈을 한없이 작게 만들었다. 선생님들의 열정은 차고 넘쳤으나 그런 만큼 아이들은 반항아가 되기도 했다. 여고 2학년, 그날의 일은 잊을 수 없다.
우리 반은 시험 때마다 학년 꼴찌를 도맡았다. 담임선생님 과목인 수학마저 매번 꼴찌여서 시험이 끝나면 교실에는 냉기류가 흘렀다. 2학기 중간고사가 끝난 주간이었다. 한 아이가 대학생 오빠에게 부탁하여 어려운 수학 문제를 가져와 질문했다. 전날 학년 꼴찌를 하여 야단을 맞은 일 때문에 선생님을 골탕 먹일 생각이었던 것 같다. 선생님은 대뜸, 쉬운 것도 못 푸는 녀석이 어떻게 이런 어려운 문제를 묻느냐며 화를 냈다. 그리고는 칠판에 수학 문제를 여러 개 써놓고 풀라고 했다.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고, 꾸지람은 그치지 않았다. 교실은 술렁거렸다. 반장으로서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울면서 항의했다. 선생님은 교무실로 불러 반성문을 쓸 때까지 무릎을 꿇고 손을 들고 있으라고 했다. 나는 반성문 따위는 쓰지 않겠다며 입술을 깨물었다. 종례가 끝나고서야 교무실을 나온 나는 교실 문을 연 순간, 놀라고 말았다. 아이들이 어두컴컴한 교실에서 불도 켜지 않은 채 꼼짝 않고 있는 게 아닌가. 칠판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등교 거부. 내일 솔밭으로! 찬성 100%.’
등교 거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겁이 났지만, 기다려 준 급우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것도 비겁한 일 같았다. 나는 불끈 주먹을 쥐어 보였다. 다음날, 59명 모두가 솔밭에 모였다. 학교에서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었는데 흘깃흘깃 쳐다보며 지나가는 사람들 때문에 겁이 났다. 그즈음 나는 학교와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집에서 하숙하고 있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하숙집으로 가 하숙방과 다락방에 나누어 숨게 하고, 나는 옥상에 올라가서 학교 운동장을 살폈다.
전교생 조회가 있는 날이었다. 우리 반의 위치는 마침 교장 선생님이 서 있는 연단 바로 앞줄이었는데 도로 공사 중인 길처럼 하얗게 비어 있었다. 그 자리에 내리쬐던 빛줄기와 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던 금빛 모래알은 지금도 생생하다. 곧이어 들려오던 어지러운 호루라기 소리……. 우리는 주인을 따라가는 순한 염소처럼 선생님을 따라 학교로 돌아갔다.
나를 포함해서 서너 명이 근신을 받았다. 주동자에게는 퇴학 처분이 내려질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일주일 정도가 지난 뒤에 교장실로 불려 가면서 ‘이제 끝이구나.’ 생각했다.
“와 그랬노? 내한테는 솔직하게 말해 보거라이.”
눈물만 났다.
“허허! 우리 딸들이 마이 컸대이. 담임선생님 마음이 쫌 급했던갑다. 그런데 느그들도 급했지 싶다. 느그들을 믿는 것맨치로 내는 선생님도 믿는다. 찬차히 다시 시작해 보자. ”
교장 선생님은 우리를 데리고 학교 근처 분식집으로 갔다. 고개를 파묻고 흐느끼느라 칼국수를 씹지도 않고 삼켰던 기억밖에 없다. 눈물 · 콧물 반, 칼국수 반이었다.
"선생님도 사람 아이가. 다 느그들 잘 되라꼬 하신 기다. 다시 해보자. 내가 사과하꾸마."
단 한 번의 입시 실패로 삼류로 낙인찍힌 줄로 알았는데, 그래서 억울했는데, 아니었다. 교장 선생님은 우리들을 믿고 인정해 주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날부터 우리는 더는 반항아가 아니었다. 그 뒤에도 우리를 불러 이야기를 들어주시곤 했다. 대학 입시는 꼭 성공해서 교장 선생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다.
눈물의 졸업식이었다. 행사가 끝난 후 어머니와 함께 교장실로 갔다. 어머니는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 했다. 교장 선생님은 교정에 심을 오동나무 묘목 세 그루를 부탁했다.
많은 나무 중에 왜 오동나무였을까? 딸을 낳으면 심었다가 시집갈 때가 되면 가구로 만들어 주었다던 나무 아닌가. 교장 선생님은 우리를 당신의 딸로 삼고 오동나무처럼 쑥쑥 자라기를 바랐던 거다. 그루마다 학교 교훈처럼 ‘현민賢民, 현처賢妻, 현모賢母 나무’라고 명패를 붙이고 천년이 지나도 제 가락을 잃지 않는다는 오동나무처럼 우리도 가르침 받은 대로 ‘어질게’ 살아가기를 원하셨던 게다.
그때의 일로 나는 교장 선생님에게 사고뭉치로 인식되었던 듯하다.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거치면서 대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반정부 구호를 외칠 때마다 걱정이 담긴 안부 편지를 보내주셨으니.
선생님은 내가 대학을 졸업하면 모교로 돌아오기를 바랐다. 후배를 가르치며 인근의 대학원에 진학하여 학업을 이어가기를 권했지만, 나는 낙향하기 싫다는 이유로 따르지 않았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몇 번 더 편지를 보내왔지만, 번번이 거절하여 안타깝게 해 드렸으니 지금에야 그 깊은 은혜를 조금 헤아릴 뿐이다.
이웃 아파트 마당에 오동꽃이 피었다. 어찌나 높이 자랐는지 하늘가가 연보랏빛으로 물들었다. 교정의 오동나무는 얼마나 컸을까. 오월이면 훈화 말씀인 듯 교장 선생님의 마지막 편지를 꺼내 읽는다.
'저는 諸君이 자랑스럽습니다. …… 母校를 걱정해 주는 卒業生이 얼마나 많을지요. 三賢의 發展은 卒業生들의 發展에 매인 것인즉, 참되고 슬기로운 女性들을 많이 輩出함으로써 榮光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디 精進하여 社會와 國家의 人物이 되어 주실 줄 믿습니다.’
검정 두루마기를 입고 검정 안경테 너머로 인자한 미소를 지으시던 최재호(崔載浩)* 교장 선생님. 오동꽃 너머로 40여 년 전, 선생님의 헛기침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오늘도 도동벌엔 그때처럼 모래바람 불까?
* 경남 고성 출생(1917.5.6~1988.3.25). 호는 아천(我川). 동국대 국문학과 졸업. 시조시인. 진주 삼현여중고를 설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