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묵호항과 북평장이 있었다.
어릴 적 놀이터에서는 친구들과 어울려 놀아도 재밌고, 혼자서도 얼마든지 재미나게 놀 수 있었다. 딱히 놀이터라는 장소로 국한되지 않더라도 집 앞마당이든지, 집 뒷동산이든지 내가 맘 편히 놀 수 있는 곳이 있어서 좋았다.
사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굳이 시간을 투자해서 이동하지 않더라도 짧은 시간에 얼마든지 내 마음 편히 놀며 쉴 수 있는 장소와 공간이 주는 의미는 너무나 크다.
어른이 되어서 머리가 복잡할 때마다 찾아가는 나만의 아지트가 있다면, 그곳 역시 사진 놀이터가 될 수 있다. 정리될 것 같지 않던 머릿속 고민들을 그 특별한 장소에서 훌훌 털어버리고 올 수 있는 것처럼, 오늘도 내 일기장 속에 들어갈 사진을 담아 올 수 있는 곳이 아지트가 된다.
칡덩굴 속에 아늑하게 만들어진 자연의 요새는 내가 어릴 적 너무나 좋아했던 아지트였는데, 정말 친한 친구에게만 가르쳐줘서 공유하곤 했다. 사진도 그렇지 않나? 내가 좋아하는 장소를 나와 결을 맞는 사진친구에게 알려주고 같은 다녀올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고향 묵호에 돌아왔을 때,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심취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에 빠져만 있기에는 묵호 사람들의 인생이 너무나 애처로웠다. 더군다나 사라지는 옛 모습처럼 옛사람의 모습들도 사라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을 담기 시작했다.
묵호항 어판장 사람들을 시작으로 전국 3대 전통시장 중 하나인 북평장 사람들까지. 그들의 인생을 엿보기 시작하면서 인생의 희로애락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른 새벽부터 시작되는 고단한 삶의 모습을 통해서 시리도록 아름다운 삶이란 것에 탐구하기 시작했다.
새벽바다에서 돌아와 잡아온 생선을 어판장에서 경매로 팔고 쉴 새 없이 어선과 어구들을 정리하여 다시 바다로 나갈 준비를 하는 어부의 모습을 관찰하면서 ‘나는 죽어도 흉내를 못 내겠구나!’ 싶었다.
장이 열리는 3일과 8일이 오면 새벽부터 장으로 나와 오늘 판매할 물건을 보기 좋게 진열하고 하루 종일 손님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면서 ‘노동의 값진 땀방울’을 보게 되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어디로 갈지 고민도 하지 않고 찾아다녔던 내 “사진 놀이터”에서 인생을 알고 덩달아 사진을 배웠다. 계절이 변하는 것을 자연을 통해서 알듯이, 묵호항에 나가면 어부들이 잡아오는 생선을 보면 계절을 알게 되었고, 북평장에 가지런히 진열된 상품들을 보면서 계절에 따라 생산되는 것들을 알게 되었다.
사진은 자연을 그대로 흉내 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이 묻어나야 한다는 것이 내 사진의 기조이다. 변하는 계절을 사진에 담는다고 해서 그 사진 자체가 덩달아 변하면 안 된다. 늘 변하지 않는 한결같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대가 바뀌고 내 놀이터에 찾아오는 피사체들도 바뀌게 되었지만, 난 그 안에서 늘 변하지 않는 인생의 숭고함을 담았다고 생각한다. 카메라 바뀌고 포토샵도 바뀌는데 바뀌지 않는 것은 내 사진의 태도였다. 좀 더 편하고 화려한 것들을 찾아가고 추구할 때 조금은 불편하고 번거롭지만 사진 그 자체의 깊이를 알게 해주는 흑백필름 작업에 몰두했다. 어쩌면 시대의 역행이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무한 복제 가능한 시대에 접어든 사진에 있어서 “리얼리티”와 “오리지널”에 대한 가치와 불변의 법칙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