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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로즈 Dec 19. 2023

기산을 만나다

라자스탄 자이푸르

기산 2010


  평소  다니지 않는 새로운 길로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새로운 곳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즐거움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날도 늘 다니던 길이 아닌 새로운 길을 통해 숙소로 향했다. 어차피 이곳에서는 모든 길이 내가 처음 가보는, 새로운 길이니까. 길을 따라가니 공터가 하나 나왔고 공터를 중심으로 상점이 몇 개 있었다.


 그중 한 상점은 가전제품을 파는 곳이었고, 한 상점은 동네 구멍가게였다. 마침 목이 말라 음료수라도 사 먹으려고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보니 500루피짜리 돈밖에 없었다. 혹시나 하고 가게 할아버지한테 500루피짜리 돈을 보여주니 안 된다는 제스처를 취한다.


 그때 기산이 왔다. 기산은 내 행동 하나하나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고, 내게 도움을 주고 싶어 했다. 기산의 도움으로 가전제품을 파는 상점에서 100루피짜리로  바꾼 후 내가 먹고 싶은 음료수를 사 먹을 수 있었다. 고마운 마음에 기산에게 상점의 여러 과자 중에 어떤 과자가 맛있냐고 물으니 토마토맛의 감자스낵을 가리켰다.


 그래서 5루피짜리 과자인데 두 개를 사서 하나는 내가 먹고 하나는 기산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선물하려고 했는데, 기산은 끝내 받질 않았다.


 기산에게서 풍겨지는 기품은 처음부터 느낄  있었지만, 14살짜리 인도 소년에게서는   없는 성숙함이 있었다. '이런 기품은 누구에게서 물려받은 것일까?'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때 기산은 나에게 자신의 자전거에 타라고 했다. 그것이 숙소까지 태워주려고 하는 것인지, 단지 같이 타고 놀자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도움을 받았다고 해서 순진하게 믿고 따라가서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라고 묻고 말았다. 하지만 기산은 별다른 대답을 못하고 자전거를 타면서  주위를 빙빙 맴돌았다. 그런 기산의 모습이 귀엽고 좋아 보여 사진에 담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숙소로 발길을 돌리며 기산에게 손을 흔들어 작별인사를 했다. 그때 기산이 다가와 또다시 자신의 자전거에 타라고 했다. 이땐 거부할  없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자전거에 올라탔다. 그랬더니 기산은 “우리 집으로 간다”라고 외쳤다.


 10여분을 달려 어떤 시장을 지나 골목길로 들어갔다. 그리고 도착한 곳이 작은 구멍가게 앞이었는데, 바로 기산의 아버지가 계신 구멍가게였던 것이다.


 제일 먼저 기산의 아버지를 소개받았다. 보자마자 기산에게서 풍기는 그 기품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향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마을 초입에서 작은 구멍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주인치고는 참 멋진 기품을 발산하는 분이었다. 그리고 기산의 할머니, 어머니, 삼촌, 동생, 사촌동생, 형 순으로 소개를 받았다.


 어쩌면 기산은 자신의 가족을 내게 소개해주고, 사진으로 담아주길 원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담은 사진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고, 그 모습을 지켜본 주변의 사람들에게까지 사진촬영이 계속되자 기산의 아버지는 그만 담으라고 말리셨다. 미안한 마음을 느끼고 있으시다는 것을 나는 그의 얼굴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내가 한국에 돌아가면 가족사진을 우편으로 보낼 주소를 가르쳐달라고 하자 괜찮다며 손사래를 치신다. 그리고 미안한 마음을 '오렌지맛 사탕 5개'를 신문에 싸서 주시는 걸로 표현하셨다. 사실 먹기조차 아까웠던 사탕이지만, 그들이 모두 지켜보는 앞에서 한 개를 입 안에 넣었다. 그 모습을 보더니 다들 환하게 웃는다. 순간 내 마음이 아주 밝아졌다.


 시간이 너무 늦어져서 이젠 작별인사를 하고 돌아와야 했다. 돌아오는 길이 너무 아쉬워 오던 길의 풍경을 하나도 빠짐없이 카메라에 담았다. 기산을 만난 건 이번 여행에 가장 큰 행운 중 하나인 것 같았다.


 나머지 사탕은 한국에 돌아올 때까지 내 가방에 있었다. 빛바랜 신문지에 싸인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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