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44개월] 갑이 친구가 되는 순간
"제가 선임님보다 더 나이 많으니까 사도 되죠. 뭐.”
그렇게 우리는 그날 행사가 끝나고 같이 밥을 먹기로 했다. 사무관이 나에게 밥을 사준다고 말한 것, 그것도 본인의 개인카드로 사준다고 하는 건 굉장히 신기한 일이었다.
모든 경우가 그렇진 않겠지만, 그 전까지의 경험으로 미뤄 봤을 때, 사무관이 밥 먹자고 말하는 것은, 정말 편하게 밥을 먹자는 의미는 아니었다. 업무 관련 회의를 하고(혹은 업무 관련 회의를 한다는 명목으로) 우리 회사의 법인카드를 사용해서 밥을 먹자는 의미에 더 가까웠다. 그래서, 최준모 사무관이 밥 먹자는 얘기를 꺼내자마자 나도 “법인카드 없는데요.”라는 말을 꺼낸 것이었다.
사무관이 내게 개인카드로 밥 사준다는 말을 한 건 정말 처음이었다. 어떻게 보면 나에게 특별한 호감이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울 법했지만, 그의 제안이 굉장히 담백해서인지, 아니면 오다가다 얼굴을 몇 번 봤던 사이라서 그런지, 혹은 그가 내 개그를 좋아해서인지, 그의 제안이 기분 나쁘진 않았다. 식사자리가 어색하면 어떡하지, 이런 걱정도 되지 않았다.
오히려...
‘담당 기관도 변경된 것 같은데 물어보면 그냥 성희롱 한 사람 누군지 말해줄까?’
이런 생각을 하며, 무슨 얘기를 얼마만큼 해줄지 기대가 되었다. 그렇게 신나 하다가, 내가 하수처럼 또다시 사람을 너무 믿고 온갖 얘기를 해주려고 하고 있다는 생각에 자중하자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행사가 마무리될 때쯤, 허주임이 왔다.
“선임님, 오늘 바로 내려가세요? 아니죠?”
“아, 네! 금요일이라 어차피 서울 오는 날이거든요.”
“아, 팀장님이 괜찮으시면 저녁 식사하자고 하시는데, 괜찮으세요? 사무관님, 사무관님도 괜찮으세요?”
읍? 행사 끝나니까 회식하자는 건가? 최준모 사무관이랑 따로 밥 먹기로 했는데, 어떡하지? 고민하고 있는 찰나에 최준모 사무관이 말했다.
“주임님, 죄송해요! 저 선약이 있어가지고... 오늘 정말 고생 많으셨고, 주말엔 푹 쉬시고요!”
“아, 사무관님 식사하고 가시면 좋을 텐데... 알겠습니다! 사무관님도 고생 많으셨어요!”
최준모 사무관은 선약이 있다고 말하며, (아마 그 선약이 나랑 한 그 선약인 거지?) 나한테도 선약이 있다고 말하라는 듯한 눈짓을 보냈다. 그 눈짓을 보면서, 회사에서 CC를 하면 이런 느낌이려나 싶었다.
“주임님, 저도 죄송해요. 친구들이랑 저도 약속 잡아가지고... 진짜 고생 많으셨어요.”
허주임은 괜찮다는 말과 함께 다른 사람들에게도 저녁 식사 일정이 괜찮은지 물어보러 자리를 피했다.
“선임님, 여기에서 우리 둘이 식사하다 사람들이 보면 좀 그럴 거 같은데...저희는 밥 다른 데서 먹을까요?”
“네. 여기서 먹다가 마주치면 오해할 거 같아서...지하철 타고 다른 데로 가요.”
“오키오키”
오키오키?
행사 뒷정리까지 하고 나오면서, 식사하기로 한 그룹은 그 사이에 예약해둔 곳이 있다며 우리와 다른 길로 향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나랑 최준모 사무관 빼고 모두가 식사를 하러 갔기 때문에 우리는 비교적 마음 편하게 지하철을 타러 갈 수 있었다.
“사무관님, 근데 저희는 뭐 먹을까요? 우리 어디로 가요?”
“(핸드폰 화면 보여주면서) 여기 어때요? 지하철로 가면 한 10분쯤 가면 되는데?”
“그래요. 집도 더 가까워져요.”
“진짜요? 사실 나도 이쪽으로 가야 집 더 가까워지는데.”
“아 그래요? 어디 사는데요? 전 성구에 사는데.”
내가 성구에 산다는 말에, 그는 화색이 되었다.
“성구? 원래 성구 살았어요?”
“네. 저 어릴 때부터 쭉. 설마 사무관님 성구 살아요?”
“와...어느 학교 나왔어요? 초중고?”
정말 신기하게도, 우린 같은 구에 살고 있었다. 내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성구에 사는 사람들은 본인이 살고 있는 구에 대한 애착이 좀 있는 편이었다. 그래서 나도 성구에 사는 사람을 보면 엄청 반갑고, 함께 성구의 맛집과 추억에 대해서 얘기했다. 지하철역으로 가면서 서로 초중고 이름을 공개했는데, 우린 심지어 같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선후배 사이였다.
“잠깐...근데 우리 같은 초등학교 다닌 거면, 같은 시기에 다녔나? 사무관님 몇 살이에요?”
“몇 살 같아요?”
“아...제 나이는 알잖아요. 지금 궁금해서 현기증 나니까 빨리요.”
“저 30살.”
“서른? 세 살 차이네? 와 그럼 저랑 같이 학교 다녔네. 선배님! 오늘 맛있는 거 사주십니까?!! 아예 우리 동네에서 밥 먹으면 안 돼요?”
“좋아요.”
동네로 향하면서, 우린 어느 식당에 갈 것인지에 대해 심층적인 토론을 진행했다.
“아무래도 제일 유명한 곳은 즉떡 파는 데 아니에요?”
“사무관님. 아 뭘 모르시네. 거기 요즘 조미료 많이 들어가서 예전 맛 아니에요.”
“그럼 어디가 맛집인데요?”
“요즘은 그 수제버거집이 최고죠.”
“아...거긴 생긴 지 얼마 안 된 곳이잖아요. 전통이 없다고요.”
이미 성구에 산다는 것, 같은 초등학교를 졸업했다는 것만으로 친밀감은 폭발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말을 해보면서도 느꼈지만 기본적으로 성격이 좀 잘 맞는 구석이 있었다. 은근히 티키타카도 잘 되고?
식당에 대한 열띤 토론을 펼친 끝에 결국 우린 수제버거를 먹으러 오게 되었다.
“선임님, 어차피 뭐 같은 초등학교도 나왔는데 그냥 편하게 물어볼게요. 그 회사에서 성희롱당했다고 했잖아요. 그거 누구예요?”
“아...그거. 사무관님이 아는 사람이에요. 나는 사실 그때 대화하면서 대충 눈치챘을 것 같기도 했는데 모르셨구나.”
“내가 그거 듣고 어떻게 알아요. 설마 권성배 선임이었어요?”
“예. 우리 사이도 안 좋은데 사무관님 때문에 셋이 죽음의 식사 한 거라니까요? 아마 권성배 주임 뛰어내리고 싶었을걸요?”
뭐 이렇게 된 거, 권성배가 구체적으로 나한테 어떤 행동을 했는지도 그냥 말해줬다.
“와...그렇게 안 봤는데. 왜 그러냐 도대체. 나는 절대 그럴 줄 몰랐는데.”
“내가 그때도 말했잖아요. 사무관님은 사무관님이라고.”
“사람들이 사무관이면 많이 다르게 대할까요?”
“아무래도 그렇죠. 물론 같은 사무관이어도 어린 여자 사무관한테 좀 더 막 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최소한 내가 사무관이면 권성배가 그렇겐 안 했겠죠.”
이런 얘기를 하고 보니, 좀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뭐, 공공기관도 나쁜 직장은 아니었지만, 일을 하다 보면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더 노력해서 더 나은 자리에 가면 그만큼 더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물론 최준모 사무관도 본인의 회사 안에서는 그 안에 있는 과장, 선배 사무관 등등에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겠지만, 나 같은 경우는 사무관에게도 치이고 주무관에게도 치이고 회사 안에서도 치이고...어쨌든 더 많이 치이면서 살아야 했으니까.
“선임님, 근데 행시 볼 생각은 안 해봤어요? 좀 일찍 취업했다고 들었는데.”
“어디서 들었어요?”
“어떤 사무관님 그러던데…선임님 엄청 어릴 때 취업해서 그 회사에서 거의 제일 어리다면서요.”
“어린 게 언제 적 얘긴데...사실 저도 행시 같은 거 생각해본 적도 있긴 했어요.”
행시...그래 행시...공부 잘한다는 소리 몇 번이라도 들으며 자란 사람들이 한 번쯤은 생각해본다는 그 행시...비밀이었지만, 나도 그 행시를 제대로 준비할 생각을 했던 적이 잠깐 있었다.
“원래 한 번쯤 생각해보잖아요. 행정고시 보는 거. 저도 대학 다닐 때 시험 본 적도 있어요. 사실, 1차 시험 붙어서 장학금 받은 적도 있었는데...그 이상은 그냥 못하겠던데요?”
“와, 선임님 1차 붙었었다고요? 대박인데요?”
"뭐가 대박이예요. 사무관님은 끝까지 다 붙어서 사무관인 거잖아요."
1차 붙었다는 나에게 대단하다고 말하는 최준모 사무관의 표정은 정말 진심이었다. 마치 본인은 행정고시를 본 적이 없었던 것처럼…
"뭐 나도 보긴 봤지만...아무튼 근데 2차에서 떨어진 거예요?"
“아뇨...2차는 안 봤어요. 어찌저찌 1차는 붙었는데...솔직히 제가 끈기 있게 공부하고 이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더라고요. 1차 붙은 것도 진짜 행운이죠 뭐. 전 장기적으로 뭐 제대로 하고 그런 걸 못해요. 그래서 차라리 취업이 나은 것 같아서...그냥 그건 당장 영어나 이런 거 준비하면 그냥 그냥 바로바로 결과가 나오니까. 기회도 많고.”
“1차 붙는 데 오래 걸렸어요?”
“그건 아니에요. 학교 다니면서 봤는데 붙었어요.”
“너무 아까운데...”
“아니에요...전 솔직히 2차 해도 못 붙었을 거예요. 지금까지도 공부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솔직하게 말하면, 난 어릴 때부터 내가 머리가 좋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그러다가 1차 시험이 붙으니까 정말 주변에서 똑똑하다는 말을 많이 해줬는데, 그게 좋으면서도 부담스러웠다. 왜냐면 나 스스로 2차부터는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1차는 할만했는데, 2차부터는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아무리 해도 될 것 같지가 않았다.(그렇다고 뭘 그렇게 많이 하지도 않았지만)
차라리 시험을 보기 전에 포기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집중하기도 어려울 것 같고, 괜히 시간을 버리는 것 같기도 하고, 열심히 하다가 2차에서 떨어지면 나 스스로도 나에게 기대하던 것들을 더 이상 기대하고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어리석은 생각이 들었다. (이런 쓸데없는 생각할 시간에 열심히 하면 더 나은 결과가 있겠지만, 쉽사리 그렇게 되지가 않았다.)
그래서 공공기관 취업하는 것으로 목표를 변경했는데, 막상 이것도 생각보다 힘든 일이어서, 행정고시 포기했다는 것이 위안이 되기도 했다. 나에겐 나름 힘든 기억이어서 그런지, 이 대화를 기점으로 분위기는 급작스럽게 어두워졌다. 어두운 분위기를 깬 것은 사무관님의 질문이었다.
“선임님 근데 학교는 어디였어요?”
“대학? 저 연정대.”
“와...우리 대학교도 선후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