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지연과 학연이 만나는 순간_(2)

[41~44개월] 갑이 친구가 되는 순간

by 하이히니

“와...우리 대학교도 선후배네.”


저 순간, 내 흥분은 최고조로 향한다. 그날은 금요일이라서 안 그래도 약간 격양되었고, 나를 긍정적으로 봐주는 최사무관과 식사 자리가 꽤 재미있었고, 심지어 그는 같은 동네 사람이었고, 나와 같은 초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했다.


“진짜요? 미쳤다! 무슨 과였어요?”

“저는 경영.”

“와...연정대 경영...사무관님 공부 잘하셨네.”

“아, 선임님은 무슨 과였어요?”

“저는 영어.”

“근데, 선임님도 공부 잘하셨네요.”


우리는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상태였지만 거의 취한 사람처럼 서로를 칭찬하고 띄워줘서 아마, 그때 근처에 앉아있었던 사람들은 우리를 엄청나게 욕했을지도 모른다. 학연, 지연으로 사람 사귀는 걸 싫어하긴 하지만, 같은 학교 나온 같은 동네 사람이 반가운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엄청 반갑고 재미있긴 한데, 아까부터 자꾸 최사무관이랑 있으면서 마음 한구석이 씁쓸했다. 영문과보다 경영학과가 훨씬 공부를 잘하는 건 맞지만, 같은 학교 졸업했는데 나이도 비슷한 그는 나보다 더 노력한 결과로 사무관이고, 나는 제대로 시도도 해보기 전에 포기하고 지금의 삶을 사는 것이니까.


물론, 공공기관에 다니고 있는 것이 나쁜 것은 절대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굉장히 안정적인 직장이고 심지어 입사하는 것이 생각보다 엄청 힘들었기 때문에 입사했을 때는 정말 진심으로 기뻤다.


하지만, 회사생활은 내 기대와 전혀 달랐다. 내가 이러려고 취업했나 싶을 정도로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일들이 끊임없이 벌어졌다.


“선임님, 근데 뭐 기분 안 좋은 일 있어요?”

“네?”

“그냥...아까 식당 왔을 때보다 좀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 회사에 무슨 일 있어요?”


생각보다 최사무관은 섬세한 인간이었다. 그와 대화하면서 순간적으로 생각에 빠져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 찰나를 참 잘도 알아차렸다.


“사무관님, 혹시 누나 있어요?”

“아니요? 외동인데. 왜요?”

“이런 거 잘 알아보시는 것 같아서. 저 사실, 기분 좀...그냥 좀 이상해요.”


*TMI

TMI를 하자면, 정말 TMI긴 한데, 나는 생리의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았다. 실제 생리를 할 때는 몸이 아팠고, 하기 전에 PMS라는 기간에는 감정적으로 굉장히 우울했다. 정말 신기한 것이, PMS 기간이 끝나면 마법처럼 감정이 회복되었다. 이걸 알게 된 다음부터, 나는 PMS 기간을 미리 확인했고, 그 기간에는 감정적으로 오락가락하는 것을 붙잡기 위해 마음을 많이 다잡는 편이었다.

최준모 사무관과 식사를 한 저 날은, 내 PMS 기간 중 하루였다. 그래서 업무 할 때는 짜증이 나도, ‘아, 이거 PMS 때문에 더 힘든 거니까. 한 번만 더 참자.’ 했었는데...밥을 먹으면서 마음이 편해져서 그런가...자꾸 내 속마음을 얘기하고 싶고 위로받고 싶었다. 문제는 나랑 최준모 사무관은 그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기분이 왜요? 행시 때문에요?”

“헐...”

“행시 얘기할 때부터 안 좋아 보이던데.”

“아...아...”


진짜...나도 쓰면서 내가 싫은데, 저 때 난 눈물을...하...흘려버렸다. (저 같은 여자 때문에 회사에서 여자분들이 불필요한 프레임 속에서 평가받는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그래도 엉엉 운 건 아니고, 눈에 눈물이 고여서 한 두 방울 떨어지는 그 정도였다. 손으로 눈에 부채질하면서 식당 천장을 바라보면서 “아...진짜 왜 이러냐...”라고 하는 정도?


이 나이쯤 되면 이제 회사에서 안 울 줄 알았는데, 회사도 아니고 부처 사무관 앞에서 이런 식으로 눈물을 보이게 되어 정말 유감이었다.


이게 울 상황이 전혀 아닌데…내 마음이랑 행동은 전혀 달랐다.


“아...진짜 죄송합니다.”


나도 당황스러웠지만, 최준모 사무관은 나보다 더 당황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아...제가…아...괜찮아요?”


괜찮냐는 말에 나는 더 눈물이 났고, 조금 있으면 콧물도 삼켜야 하는 상황이 도달할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저 화장실 좀...”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 난 화장실로 향했고, 막상 화장실에 오니까 눈물도 멈추고, 뭐 때문에 눈물을 흘렸는지도 정확히 잘 모르겠고, 미쳤나 싶었다.


아...너무 뻘쭘한데...


뻘쭘해서 나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여기 있는 시간이 오래될수록 오히려 더 이상할 테니... 테이블로 돌아가자, 이미 수제버거와 밀크쉐이크가 세팅되어 있었다.


“아...죄송합니다.”

“선임님, 괜찮아요?”

“예... 먼저 드시고 계시지...뻘쭘하네요.”

“같이 온 사람이 울면서 뛰쳐나갔는데 어떻게 혼자 먹어요.”

“뛰어나간 정돈 아니잖아요...”


뛰쳐나갔다는 말을 기점으로 우린 다시 웃기 시작했고, 내 감정도 정상궤도를 되찾았다. 솔직히 정상궤도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눈물이 나진 않았다. 그리고 그 수제버거 집이 밀크쉐이크가 정말 맛있어서 그런지, 진짜 순간적으로 기분이 확 업되는 부분도 있었다.


“선임님, 이제 괜찮죠?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돼요?”

“사무관님...얘기할 수는 있는데, 그냥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요?”

“어차피 얘기할 생각 없었어요. 할 사람도 없고.”

“네...저 사실 회사 생활 진짜 힘든가 봐요. 회의감도 너무 많이 들고...여기도 막장이거든요...”

“뭐 어떻게 막장인데요?”


어떻게 막장이냐고? 여러분도 글을 다 읽었겠지만, 정말 막장이었다. 그 방대한 이야기를 그 자리에서 다 할 순 없었다. 그저, 최근에 권팀장과 있었던 일들을 좀 얘기했다. 그 이야기들을 듣고 최준모 사무관은 진짜 경악했다.


“다들 사무관이라고 하면 좀 다를 거라고 생각하는데 일하다 보면 정말 똑같거든요. 힘든 것도 많고…근데 얘기 들으니까 제 상황에 감사하게 되네요. 진짜 많이 힘들었겠다.”

“회사 다니는 것 자체도 회의감 많이 들고, 나이가 좀 드니까 친구들 중에 로스쿨 졸업하고 변호사 되거나 행시 되거나 그런 애들도 있거든요. 회사 생활이 괜찮으면, 그냥 그러려니 할 텐데...”


참 신기한 것이, 이 얘기를 부모님한테도, 친구들한테도, 회사 동기들한테도 한 적이 없는데 기승전 최준모 사무관한테...?


“선임님은 지금 행시를 보고 싶어요? 아니면 로스쿨에 가거나?”

“그건 아니에요. 공부할 자신이 없거든요. 떨어지는 것도 무섭고, 그럼 저한테 실망할 것 같고...”

“선임님, 근데 붙는다고 생각하면 하고 싶기는 해요?”

“네... 일하다 보니까 사무관 되고 싶다는 생각 자주 들어요.”


정말, 사무관이 되는 상상은 수없이 많이 했다. 대단한 목표가 있다기 보다, 이런 마음이었다.

내가 사무관이면 이 정도로 괴롭힘 당하진 않았을텐데, 지금 사무관이 되면 이런 대우는 안 받을텐데, 나를 괴롭혔던 사람들에게 최고의 복수가 될텐데…


“그런 마음이면 몇 년 지나도 비슷한 후회 할 것 같아요. 더 시간 지나기 전에 그냥 한 번 해보고 싶은 거 해보시는 것도 좋아요. 제가 행시 붙었던 적이 있으니까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건 도와드릴게요.”

“아 웃겨...행시 붙었던 적 있다는 말 왜 웃기지?”


진짜 웃겼다. 예전에 시험 봤던 적 있었으니까, 라고 표현하지 누가 붙었던 적이 있었다고 말한단 말인가?


“진짜 진심이에요. 선임님 나이 많은 거 절대 아니에요. 회사 다니면서 돈도 모았을 거잖아요. 혼자 힘으로 몇 년 공부할 수 있어요.”

“지금 진로 상담 받는 것 같아요.”

“바로 퇴사하기 그러면 내년 1차 시험 한 번 봐봐요. 이번에도 붙으면 그냥 퇴사하고 시험 준비해요.”


“회사 다니면서 하면 붙겠어요? 그래도 그때는 막 인강도 듣고 그랬어요.”

“안 되면 그냥 깔끔하게 포기하면 되고요. 지금 선임님은, 회사는 힘들고 친구들 보니까 마음은 복잡하고, 예전에 1차 붙은 적도 있은까 자꾸 생각나는 것 같아요. 차라리 시도하고 깔끔하게 포기하거나, 올인하거나…그게 나아요. 시험 보는 걸로 마음 잡으면 제가 도와줄게요.”


“뭘 어떻게 도와주실 건데요?”

“PSAT(행시 1차 중 일부) 옆에서 같이 풀어드릴까요?”


뭐지? PSAT을 같이 옆에서 풀어준다고? 이건 뭘까? 한 번 잘 생각해보자. 물론 비교하기가 애매하긴 하지만, 내가 얼마 전까지 고3이어서 수능 준비를 했는데, 이제 난 좋은 대학에 잘 다니고 있다고 치자. 근데 어떤 애가 재수 준비 고민하고 있다며 나한테 상담을 받는다면, 굳이 걜 도와주겠다, 수능 모의고사 같이 옆에서 풀어주겠다는 말을 하게 될까?


예전에 본 거라 기억도 잘 안 나고, 무엇보다 하루 종일 쓸데없이 수능 모의고사 풀어야 되는 건데? 난 그게 쓸데도 없는데...?


후...최준모 사무관과의 식사는 생각할 거리들을 많이 남겼다.


도대체 최준모 사무관은 나한테 왜 잘해주는 걸까? 나한테 뭐 캐내려고 하는 건가? 아니면 PSAT 같이 풀어준다는 건 그린라이트인가? (이랬는데 여자친구 있거나 결혼한 거면 그냥 PSAT 전도사? PSAT 매니아? 근데 지금 별 사이도 아닌데 여친있냐고 물어 보는 거 이상하지 않나? 자연스럽게 물어볼 방법이 있나? 물어보는 거 자체가 이상한데...)


그리고, 행정고시라... 회사 다니면서 짜증 나는 일이 있어도 사무관이 되는 상상만 했지 행정고시를 보겠다는 구체적인 생각을 해본 적은 거의 없었는데, 최준모 사무관과 얘기하다 보니 갑자기 행시에 대한 마음이 너무 커졌다. 그렇다고 다니는 회사를 포기할 자신도 없고, 돈 벌어서 돈 쓰는 재미에 익숙해진 상태에서 수험 생활을 시작할 자신도 없었다.


그래… 뭐...이제와서 어쩌겠는가. 하려면 취업하기 전에 했어야지…


그렇게 행정고시에 대한 마음은 그냥 잠깐 해프닝 같았다. 근데, 이걸 해프닝으로 도저히 넘길 수 없게 만드는 일이 생기고 마는데...


퀴즈. 최준모 사무관은 여친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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