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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딸기체리수박 Oct 25. 2021

나는 너를 슬럼피라고 부르기로 했다

슬럼프보다 귀여운 슬럼피

 세상에는 잘 나가는 사람이 많다. 하루아침에 인스타 팔로워가 1000만 명이 넘었다는 사람, 무일푼으로 시작한 회사를 키워서 돈방석에 앉은 사람, 태어날 때부터 돈 걱정을 안 해도 되는 사람 등등...


 지금보다 어렸을 때는 그런 사람을 봐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렇게 잘 나가는 사람들 대부분 나보다 어른이었고, 막연히 나도 어른이 되면 저런 사람 중 한 명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어린 나이 하나 희망처럼 붙잡고 있었는데, 나이가 들어보니 상황은 조금 달랐다. 나이가 든다고 모두가 다 잘난 사람이 될 수 있는 건 아니었고, 열심히 산다고 잘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열심히 살아도 운이 안 좋으면 영영 제자리걸음을 하게 되기도 하고, 심하면 넘어지기도 한다. 반면에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시기와 운을 잘 타고나서 별안간 성공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세상을 살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노력하고 열심히 사는 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한 번 그런 생각이 드니까 모든 게 버겁고 힘들어졌다. 별안간 글을 쓰는 것도 무의미한 행위로 느껴졌다. 내가 아무리 글을 써봤자 세상에는 날마다 어마어마한 양의 글이 쏟아지고 있다. 그 사이에서 내가 글을 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활자의 홍수에서 살아남을 자신도 없고, 가끔 그 홍수에서 살아남은 글들을 볼라치면 허무할 때도 있다.


 아무래도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니 나한테 슬럼프가 들이닥친 모양이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이 슬럼프는 백신 1차 접종 이후 심신이 미약한 상태일 때 나를 찾은 것 같다. 그리고 백신 접종 2차를 맞을 때까지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슬럼프와 함께 하는 세상은 살아가기 많이 버겁다. 회사 가는 것도 힘들고, 몸도 아프고, 열심히 하던 운동도 하기 싫다. 내 삶의 루틴이라고 생각했던 블로그 관리도 쳐다보기 싫을 만큼 귀찮은 일이 된다. 해야 하는 일 혹은 하려고 계획한 일이 있어도 누워서 핸드폰으로 유튜브를 보는 게 거의 일상이다.


 남들이 보면 속 편하게 누워서 유튜브 보고 있다고 하겠지만, 내 속은 전혀 편하지 않다. 유튜브를 보면서 기분이 좋으면 그건 슬럼프가 아니다. 누워 있는 것도 힘들고 유튜브를 보면서도 찝찝하고 마음이 무거운 것이 진짜 슬럼프다. 보고 있던 영상 속에 웃긴 장면이 나오면 웃기도 하지만, 마음 한 구석은 무거운 돌덩이가 짓누르고 있다.


 뭔가 해야 하는 일이 있는데도 그 일을 피하면서 침대에 누워있는 나 자신이 한심했다. 그래도 꼭 해야 하는 회사 출근은 거르지 않고 하고 있으니까 그 자체로 위안을 삼아야 하는 걸까?


 슬럼프. 도대체 언제  떠나 줄까?


 우리 집 내 옆방에는 나랑 똑같은 자세로 침대에 누워서 유튜브를 보고 있는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바로 내 동생. 걔 방을 들여다볼 때마다 동생은 누워서 영상을 보며 키득거리고 있다. 난 키득거리는 동생에게서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 녀석... 웃고 있지만 분명 엄청난 슬럼프에 빠져 괴로워하고 있구나.


 난 누나로서 동생을 챙겨주고 싶었다. 그것도 나처럼 슬럼프에 빠져서 할 일을 하지 못한 채 영상을 보며 웃고 있는 내 동생. 난 그에게 다가갔다.


나 -  야, 요즘 힘들어?
동생 - 뭐가? 내 방에 왜 왔어?
나 - 아니, 너 요즘 힘들거나 그런 거 없어? 슬럼프야?
동생 - 뭐가? 잘 쉬고 있는데 방해하지 말고 나가.
나 - ?


 잘 쉬고 있다니? 분명 웃고 있는 동생의 눈에는 미세한 슬픔 같은 것이 엿보였는데... 나의 착각인 건가?


나 - 너 지금 힘들어서 누워서 유튜브 보고 있던 거 아니었어?
동생 - 그냥 퇴근하고 쉬고 있었는데?
나 - 아... 그래?
동생 - 뭐야?
나 - 나는 너가 나처럼 슬럼프인 줄 알았지. 계속 누워서 영상만 보길래.


 내가 '슬럼프'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자 동생의 의아한 눈치였다.


동생 - 난 누나가 슬럼프인 줄 전혀 몰랐는데.
나 - 나 요즘 슬럼프야. 블로그도 열심히 안 하고, 글도 못 쓰고, 책도 안 읽어. 꼭 해야 하는 일만 해.


 이 말을 듣고 동생이 이런 말을 했다.

누나, 다 그러고 살아. 그거 슬럼프 아니야.


 응? 이게 슬럼프가 아니라고? 그럼 뭐가 슬럼프지?


동생 - 사람들 다 그러고 사는데. 그게 무슨 슬럼프야. 쉬는 거지. 누나 너무 하는 일이 많아. 잠깐 쉬는 건데 거기다가 슬럼프라는 이름을 붙이면 너무 과하지 않아? 이름을 바꿔. 적당한 이름 없나?


 동생은 내가 슬럼프라고 부르는 기간에 '슬럼프' 대신 다른 이름을 붙이라고 했다. 그게 슬럼프도 아닐뿐더러, 슬럼프가 맞더라도 이름을 바꾸란다. 슬럼프라는 이름 때문에 오히려 더 위축이 될 것 같다고. 난 고민하다 '슬럼피'라는 이름을 생각했다.


 슬럼프 비슷한 느낌이긴 하지만 뭔가 더 귀여워서 반려견 이름 같은 느낌도 나고, 스누피 같은 느낌도 나고. 훨씬 더 가벼웠다.


동생 - 슬럼피 괜찮네. 그래. 슬럼프는 너무 오바였어. 슬럼피로 해. 귀엽네.


 난 그 자리에서 동생과 몇 마디를 더 나눴다. 근데 정말 신기하게도 갑자기 지금 다시 이 자리에 앉아서 글을 쓰게 됐다. 난 슬럼프를 슬럼피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리고 그게 대단한 게 아닌 그냥 쉬는 시간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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