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군 고남면 어케이션하러 입장
지난 5월 난 갑작스럽게 '퇴사'라는 녀석과 만나게 되었다. 나 스스로 선택한 일이기 때문에 '갑작스럽게'라는 표현을 쓰기가 좀 애매하지만, 그만큼 나조차도 내가 퇴사할 줄은 잘 몰랐다는 뜻이다. 난 이직할 곳도 구하지 않았고, 특별한 재무계획을 세우지도 않은 상태로 퇴사했다.
이 선택에 대한 결과와 내 욕망이 뒤섞여 나는 번뇌했다. 선택의 결과에 따라 딱히 돈이 풍족하지 않은 상태로 당분간을 버텨야 했지만(선택에 대한 결과), 오랜만에 찾아온 휴식 시간을 좀 재미있게 보내고 싶었기 때문에(욕망)...
뭐 하나 포기할 수 없었던 난 좀 저렴하게 이색적인 경험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불을 켜고 있던 내 눈에 들어온 게 바로 태안군 고남면 어케이션이었다. (태안군 고남면 어케이션 말고도 진짜 재미있어 보이는 프로그램들이 많았다. 내 생각보다 큰돈 없이도 할 수 있는 재미있는 것들이 세상에 참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출처 : https://www.instagram.com/gonammyeon/)
고남이라는 어촌 마을에서 5박 6일 동안 도심이 아닌 어촌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그 안에서 특별한 나만의 가치를 발견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정부지원사업이라 저렴하게 5박 6일 동안 어촌 마을을 경험할 수 있었다.
참여를 위해 10만 원 정도가 필요하긴 했지만, 5박 6일 동안 숙식이 해결되는데 10만 원이라면 말 그대로 혜자다. 게다가 평소의 나라면 전혀 해보지 못했을 어구제작, 어선체험, 맨손어업해보기까지 할 수 있다면? 더 혜자다.
이때가 아니면 내가 이런 체험을 도대체 언제 해보겠는가? 그냥 내가 가고 싶은 곳에 훌쩍 여행을 떠난다면 그것도 그대로 매력이겠지만, 아마 내가 평소에 좋아하던 것들만 먹고 보고 올 가능성이 무척 크다.
어쨌든, 내 기준 농촌 체험보다 어촌 체험이 129배 정도 더 신선하게 느껴지기도 했기에, 무조건 참여하고 싶었다. 그래서 신청서를 무척 열심히 적었다.
지금은 어촌에 대해 크게 생각하는 것이 없지만, 일단 한 번 경험해 본다면 은퇴 후 내가 '아 30년 전에 했던 어촌체험 정말 좋았는데, 어촌으로 가볼까?' 생각할지 누가 알겠는가.
어케이션 신청서에 나 스스로를 '경주마' 같다고 표현했던 것 같다. 뭔가 잘하고 1등만 하는 그런 경주마가 아니라, 그냥 어쩔 수 없어서 달리기는 하지만 1등은 잘 못하는 그런 경주마. 이제 경주는 그만하고 새로운 대안의 삶을 찾아보고 싶다고 썼다. 별생각 없이 경주마라는 표현을 쓰기는 했는데, 생각하면 할수록 나 스스로가 경주마처럼 느껴졌다.
경주에서 이탈할 수도 없고, 일단 달려야 하는 경주마. 1등이라는 스포트라이트도 받으면 좋으련만 그러지도 못하고 힘들게 달리기만 하는 그런 경주마. 살짝 시적이긴 하지만 신청서를 열심히 쓴 건 참 잘한 일이었다. 나중에 기사를 찾아보니 경쟁률이 거의 5:1 수준이었던 것을 보면 말이다.
그렇게 난 5박 6일 어촌체험을 가게 되었다. 꽤 많은 경쟁자들을 제치고 프로그램 참여자로 선정되었을 때는 퇴사 후 실로 오랜만에 성취감을 맛보는 듯했다. '합격', '선정' 같은 단어를 오랜만에 봐서 심장이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막상 고남면 어케이션을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알 수 없는 불안함이 밀려왔다.
어촌에 살고 계신 분들에게는 너무 죄송하지만, 예전부터 어촌, 특히 섬이라는 지역이 쉽게 고립될 수 있다는 특수성 때문인지 뉴스에서도 좋지 않은 소식들이 종종 들려오곤 하지 않았는가. 게다가 난 국내 여행에 대한 경험도 많지 않았고, 운전도 할 줄 몰랐다. 갑작스럽게 고남이라는 곳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그때부터 나는 태안군 고남면 어케이션이라는 프로그램이 진짜 실존하는 프로그램인지에 대해 구글링 했고, 블로그에서 작년 참여자들의 후기를 읽기도 했다. '이렇게 후기까지 있는 것을 보니까 안전한 프로그램이 맞나 봐.' 안심하며, 역설적으로 카카오톡에서 온갖 단체 채팅방을 열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
'얘들아 나 다음 주 화요일부터 5박 6일 동안 어촌 체험 간다. 숙소 이름은 <스테이가경주>래. 혹시 나 연락 안 되면 신고 좀.'
지금 생각하면 바보 같은데, 그때는 정말 뭔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있었다. 총합, 한 20명에게 내 소식을 알렸다.
스테이가경주. 처음 이름을 들었을 때 참 의아했다. 왜 굳이 '경주'라는 이름을 썼을까? 다른 지역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보다 '스테이가고남' 같은 이름을 쓰는 게 낫지 않나? 이건 내 착각이었는데, 스테이가 경주가 아니라 스테이 가경주가 맞다. 근방에 가경주항이 있어서 이름이 스테이 가경주인 이 숙소에게 미안하게도, 난 내가 갈 지역의 이름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이다. (가경주항에서 보는 노을은 정말 아름답다. 이름도 모르던 곳의 노을이 그렇게 아름다울 줄이야.)
프로그램이 시작하는 6월. 난 시외버스를 통해 안면터미널로 향했다. 버스를 타고 목적지로 향하는 길은 생각보다 고된 일이었다. 일단 할머님들이 뒷자리에서 커피를 모두 쏟아버리는 바람에 버스 온 바닥이 찝찝함과 냄새로 뒤덮였으며,
뜬금없이 TV에 뜬 < 위성신호가 도달하지 않는 지역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는 문구는 또다시 나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혹시 이러다가 이상한 곳으로 가는 건 아니야? 핸드폰도 안 되는 거 아니야?
다행스럽게도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끝까지 잡히지 않는 위성신호와 다르게 핸드폰은 잘 동작했다. 위성신호가 끊어진 이후에는 종종 기사님이 'OOO! OOO 있어요?'라고 하면 승객 중 몇 명이 버스에서 하차했다. OOO의 발음은 살짝 부정확했고, 지금도 도대체 그 승객들이 어디서 내렸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한국에서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 있을 거라 예상하지 못했던 탓에, 그때부터는 괜히 긴장하게 되었다. 세포 하나하나를 하차할 곳을 찾는 데 집중했다. 겨우 안면터미널에 내렸을 때 내 얼굴은 녹아내릴 듯이 찌들어있었다.
이젠 마지막 관문이 하나 더 남아있다. 안면터미널에서 스테이가경주로 이동해야 한다. 순간 그런 생각도 들었다. '내가 진짜 경주마라면 여기에서 그냥 뛰어갈 수도 있으려나?'
투비컨티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