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표, 봉다리, 버스 환승 X
그렇게 도착한 안면 터미널.
안면 터미널은 신기한 감정에 휩싸이게 했다. 분명 지금까지 봤던 터미널과는 많이 달라서 낯설면서도 이미 익숙한 이 느낌. 낯설지만 정겨운 이 느낌은 뭘까?
평소 바나나 우유를 좋아하지 않는데도, 왠지 이 터미널에서 바나나 우유를 사 먹고 싶다는 느낌이 드는 신기한 감정을 느꼈다. 오랜만에 뭔가 껌 같은 것을 사 먹어야 할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감상에 젖는 것도 잠시. 내가 진짜 해야 할 일은 안면터미널에서 스테이가경주에 갈 수 있는 버스를 찾는 것이었다.
택시를 탈지 잠시 고민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백수에게 더 이상 택시는 사치다. 무조건 버스로 간다.
평소에 배차 간격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표를 보고 버스를 알아내는 일이 무슨 수수께끼를 푸는 일 같았다. 요즘 어린 학생들이 아날로그시계로는 시간을 못 읽는다고 해서 놀랐었는데, 그 어린 학생들이랑 내가 다를 바가 없는 것 같기도 했다. 그냥 네이버로 몇 분 뒤에 버스가 오는지 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사실 20대 중반까지는 서울 밖으로 나간 경험이 정말 없어서 배차 간격이라는 개념 자체를 잘 몰랐다. 버스 정류장에 가면 버스는 그냥 오는 것이므로, 배차라는 것 자체를 딱히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1시간에 한 번 오는 버스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에 배차 간격을 아는 것이 상당히 중요한 일임을 알게 되었다.)
네이버 지도 어플에서 보는 정보보다 태안군 농어촌 버스시간표가 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는 건 내게 시사하는 바가 컸다. AI가 개인의 비서 노릇을 하고 있는 세상 아닌가. 생각해 보면 결국 AI도 인간이 만들어낸 정보를 학습한 존재인데, 결국 AI도 처음에는 이런 표를 보면서 학습 능력을 키워나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스쳐갔다.
나는 한참 동안 버스 시간표를 보고 있었다. 그러자 어떤 아저씨가 옆에서 내게 물었다.
아저씨 : "어디 가는데 그래요?"
나 : "가경주요. 이 표대로 버스 오는 거 맞아요?"
아저씨 : "그럼 맞지. 2시 25분에 508번 타면 되겠네."
나 : "아 감사합니다."
아저씨 : "이런 거 잘 못 봤죠? 옛날 사람들은 다 이런 거 보고 시간 맞춰서 버스 타고 그랬어"
2시 25분까지는 한 2~30분이 남아 있었다. 그동안 뭐라도 먹어야겠다 생각했을 때 내 눈에 들어온 건 바로 맘스터치.
처음에는 뭔가 안면터미널 근방에서만 먹을 수 있는 뭔가를 찾아보고 싶었는데 시간 여유도 없을뿐더러, 맘스터치라는 간판을 처음 본 순간 알 수 없는 이끌림에 그곳을 갈 수밖에 없었다.
낯선 곳에서 아는 브랜드를 봤을 때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꼈다. 심지어 맘스터치 사장님에게는 알 수 없는 내적인 친밀감도 살짝 들었다. (이런 게 브랜딩의 힘일까?)
사장님은 내게 얼마나 멀리서 여기까지 온 건지, 몇 시간이나 걸렸는지, 얼마나 힘든지를 물었다. 맘스터치에서 이런 질문을 받은 적도 없지만 평소에 이런 질문을 좋아하는 편도 아닌 내가 굉장히 신나서 대답하는 게 나답지 않게 느껴졌다.
생각보다 2~30분은 빠르게 흘렀고, 난 508번에 탑승했다. 나와 같이 508번에 탑승한 승객들은 대부분 70대 이상 어르신들처럼 보였다. 신기하게도 서로 아는 사이인 분들도 꽤 있었고, 출발 전부터 꽤나 활발한 대화가 오고 갔다. 마치 나도 그분들에게 최소한 목례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실제로 그분들과 눈이 마주치면 목례를 했다.)
교통 체증이 없는 길이어서 그런지 70분 넘게 걸린다는 네이버지도의 안내와 다르게 버스 여행은 40분 만에 끝나버렸다. (나중에 들어보니까 원래 40분 정도 걸린다고 한다.) 속도가 있어서 그런지 승객들이 장을 봐온 것으로 추정되는 각종 비닐봉지들은 버스 바닥을 굴러다녔다.
신기한 건 아무도 그 짐들을 줍거나 고정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그 봉다리를 주워보려고 꿈틀거리면, 뭔가 다들 눈짓으로 '그럴 필요 없어.'라고 했다. 저렇게 버스 중간에 짐이 있어도 그냥 본인이 내릴 때까지 기다린다는 게, 힘 없이 뒹굴거리는 봉다리가 웃겨서 몇 번 혼자 웃음을 터트렸다. 검은 봉다리는 버스 앞쪽과 뒤쪽 중앙을 종횡무진하다 가끔은 본래의 주인의 자리 근처까지 스스로 되돌아가기도 했다.
현란한 운전 솜씨와 낮은 차량 밀도 덕에 생각보다 가경주에 빨리 도착! 난 자연스럽게 하차하며 버스 카드를 찍었다.
기사님 : "아까 찍지 않았어요?"
나 : "네?"
기사님 : "아니 아까 버스 탈 때 카드 찍지 않았냐고요."
나 : "네. 근데 지금 내릴 때 찍는 거 찍었어요."
기사님 : "여기는 내릴 때 안 찍어요. 방금 돈 두 번 냈어요!"
여기는 환승이라는 게 없단다. 그래서 버스 탈 때만 카드를 찍으면 된단다. 내릴 때 버스 카드를 찍는 건 일종의 습관이자 당연한 진리 같은 거 아니었나!
돈 날렸다 생각한 그 순간. 기사님은 기계를 몇 번 탕탕 누르시더니 "돈 가져가요." 했다. 난 연신 감사 인사를 날리며 1400원을 수거해 왔다.
덤으로 기계에 묻어있던 먼지까지 손에 잔뜩 달라붙었다. 아마 나처럼 이런 실수를 하는 사람이 최근에는 없었나 보다. 이렇게 오래 동안 먼지가 쌓일 때까지 동전통을 만진 사람이 없는 것을 보면 말이다.
드디어 가경주 도착. 이렇게 가경주에 오는 길에 난 또 이 로컬만의 룰(?)을 몇 가지 습득했다.
1. 여기에선 네이버지도보다 농어촌버스시간표가 정확하다. 네이버지도보다 버스가 더 빠르다.
2. 버스에서 검은 봉다리가 굴러다녀도 굳이 줍지 않아도 된다.
3. 내릴 때는 버스 카드를 찍지 않고 내려야 한다.
여기에선 이제 15분쯤 걸어가면 도착이다.
아침 9시 30분에 시작한 여정은 6시간이나 흘러 버렸다. 그래도 다 좋았다. (다만 태안이 근교라고 생각해서 신청한 거였는데 예상보다는 제법 긴 여정이었다.)
바다가 보이는 길도, 귀여운 고래와 문어가 그려진 벽화도 좋다.
나보다 일찍 도착한 나머지 참가자들이 모여있는 어떤 세미나실에 도착했을 때, 도착이 주는 그 안도감도 잠시.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이상한데? 원래 이거 청년들만 오는 거 아니었나?
내가 알기로 참여자는 약 20명. 근데 그들 중 청년으로 보이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뭔가 이상한데...?
투비컨티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