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아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은 며칠 째 꽤 많은 눈이 내리고 있다. 어제도 동네 곳곳에 눈이 소복이 쌓였다. 그 누구의 발자국도 남아있지 않은 그런 눈길을 볼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아... 눈을 밟고 싶다.
눈을 피해 갈 수도 있지만, 그래도 눈을 밟고 싶다.
내 발자국을 남기고 싶다...
눈을 밟은 후에는 운동화가 젖어버릴 가능성이 한 65% 정도는 된다. 고민하다 결국 눈 위에 나의 발자국을 남기겠다고 다짐했다. 뽀드득 거리는 소리가 듣기 참 좋지만, 이내 양말이 축축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젖은 양말을 빨래통에 넣어 놓고 지금은 컴퓨터 앞에 앉았다. 경주에서 있었던 일들을 글로 쓰기 위해 그때 찍었던 사진들을 몇 개 고르고, 당시 남겨뒀던 메모를 몇 개 살펴봤다. 분명 지금의 내가 보내고 있는 세상은 겨울인데, 글을 준비하며 잠시 늦여름으로 이동하는 느낌이 들었다.
타실라 타실래요?
내가 경주에 있을 때 날씨가 참 완벽했다. 초반에는 살짝 더운 감이 있었지만, 늦여름에서 가을이 되면서 점점 완성형 날씨로 변해갔다. 미세먼지가 있는 날도 거의 없었고 (내 기억에 따르면), 건물이 낮아서 그런지 맑은 하늘과 노을을 볼 수 있는 곳이 많았다.
그 완벽한 계절을 더 풍요롭게 해 준 것 중 하나는 바로, 경주시 공영자전거 타실라였다. (이렇게 말하니까 내가 꼭 무슨 타실라 홍보대사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경주에 있는 동안 타실라 한 달 이용권을 구매해 놓았었다. 말 그대로 자전거를 실컷 탔다. 왜 굳이 타실라를 타고 돌아다녔는지를 얘기해야 할 것 같다.
처음 경주 생활을 시작했을 때, 몇 가지 걱정되는 부분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대중교통이었다. 아무래도 서울보다는 배차 간격이 큰 편이라 버스를 통한 이동에 제한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경주에서 내주에서 주로 왔다 갔다 하는 곳들은 버스로 이동하기도 좀 애매했다.
난 주로 금리단길, 황리단길, 대릉원, 경주시외터미널 근처, 기타 골목 구석구석, (가끔) 복군동에 갔다. 복군동은 나머지 장소들과 거리가 좀 있기 때문에 버스나 택시를 타게 되기도 했지만, 다른 장소는 그러기엔 좀 애매했다. 보통은 걸어 다닐 수 있었지만 가끔 피곤할 때도 있어서, 걷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래서 선택하게 된 이동수단이 바로 타실라였다.
타실라, 어떻게 사용하는데요?
앱 검색할 때 타실라라고 검색하면 누가 봐도 경주 & 신라 느낌이 살짝 나는 앱이 하나 나온다. 그 앱에서 타실라 이용권 구매, 정류소 위치 확인, 반납 등등을 할 수 있다. 보시다시피 타실라 앱 평가 자체는 그렇게 좋지 않다.
아마 너무 잦은 인증을 해야 하는 것, 아주 사용자 친화적이지는 않은 UI, 반응이 좀 느린 점 등등 여러 이유로 앱 평점은 낮은 것 같다.
하지만!
타실라 하루 이용은 단 돈 1000원, 한 달 이용권도 5000원이다. 게다가 내가 이동할만한 동선에는 근방에 보통 타실라 정류장(?)이 있었기 때문에 더 마음에 들었다.
나 같은 길치들은 타실라 앱만 보고는 자전거 대여소를 찾기가 좀 어려울 때가 있다. 네이버 지도에서 '타실라'라고 검색하면 위치를 좀 더 쉽게 파악하고 길 찾기를 하며 대여소까지 갈 수 있다. (다만, 공사 등으로 인해 운영 일시 중단 된 대여소가 네이버에 그대로 뜨기도 하기 때문에, 그런 디테일만 좀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
타실라, 뭐가 좋았을까
경주에 걸어서만 돌아다녔다면 체력의 한계 때문에 중간에 일정을 포기하는 날도 있었을 것이다. 버스만 타고 다녔다면 놓치는 공간이 있었을 것 같다. 그런데 타실라 덕분에 곳곳을 참 저렴한 가격에 돌아다닐 수 있었다.
타실라를 타고 다니면서 좋았던 것 몇 가지가 있다.
첫 번째, 그냥 이동 자체가 편했다.
한 달 이용권 사용 기간 중에는 근처 가게 이동, 일하러 갈 때 등등 타실라를 타고 간편하게 이동할 수 있어서 좋았다. 걷는 것도 좋아하는 편이지만 자전거를 타는 것도 또 다른 재미를 준다. 특히 날씨가 좋은 날에는 바람이 솔솔 부는 게 참 좋다.
그래서 지금 이 글을 쓰는 시점이 늦여름과 가을 그즈음이었다면, 이 글을 보는 다른 분들도 타실라 이용권을 좀 더 기꺼이 구매하셨을 텐데, 지금이 겨울인 것이 조금 아쉽다. 지금 같은 때에 자전거를 타면 아무래도 장갑 없이는 버티기 힘들 테니까.
두 번째, 경주에 의외로 자전거길 예쁜 곳이 많다.
그리고 자전거길이 시내랑 무척 가깝다. 황남빵 몇 개 사서 자전거길 실컷 돌아다니다가 중간에 앉아서 황남빵 하나 까서 먹는 게 진짜 맛도리 그 자체이다.
몇 가지 코스를 추천하면,
시내에서 <보문교밑자전거도로자전거대여소>까지 가는 길. 이 길이 시내랑 바로 이어지기도 하고, 가는 길이 평평하고 괜찮다. 찾기 애매하면 <북천자전거길>로 검색해 봐도 좋다. 경주에 있는 시간 동안 이 길을 몇 번 왔다 갔다 했는데 그때마다 기분이 좋고 상쾌했다.
아마 서울에 이런 느낌의 자전거길이 있다면 진짜 사람이 북적북적할 텐데,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도 좋았다. (근데 길을 잘 모를 때는 조금 불안하기도 했다. 아, 이 길 맞아? 사람이 너무 없는데... 맞나?)
세 번째, 타실라로 인해 스릴 있는 게임을 할 수도 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의아할 텐데... 좀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타실라 대여소 중에서도 좀 인기가 많은 대여소가 있다. 그중에 하나가 월정교2자전거대여소 라고 생각한다. 그 대여소가 인기가 많은 이유는, 근방에 첨성대, 대릉원, 월정교 등등이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근방에서 야경을 감상하다가 숙소에 돌아갈 때쯤 되면 지치는 모양이다.
근데 교통편이 좀 애매하다 보니, 자전거 대여를 알아보기 시작한다. 그들의 후보에 오르는 자전거대여소 중 하나가 월정교2자전거대여소인 듯했다. 내가 이 대여소에 자전거 몇 개 남아있는지 확인을 해볼 때마다 0~2대 정도인 경우가 많았다.
언젠가 경주에서 아르바이트했던 경험을 글로 쓰게 되겠지만, 여기서 미리 조금 이야기를 해보자면, 난 월정교 근처에서 알바를 한 적이 있다. 마감시간이 가까워 오면 같이 아르바이트하던 동료(?)들 사이에 이상한 눈치게임 같은 것이 시작되었다.
"아, 월정교에는 자전거 지금 한 대 남았다던데...여기서 자전거 타고 집에 가야 되는 사람 누구죠?"
이야기를 나눠보면 월정교에서 자전거를 빌려야 하는 사람이 한 3명쯤은 나왔다. 남은 자전거는 한 대. 그 자전거가 필요한 사람은 세 명.
각자 그 자전거가 본인에게 얼마나 필요한지 주장하기 시작한다.
"아 근데 저는 경주 사람이 아니잖아요. 길도 잘 모르는데 자전거 제발 양보 좀 해 주세요..."
"아뇨. 제가 경주 사람이어서 아는데 OO님은 다른 쪽에서 자전거 빌려도 괜찮아요. 제가 타는 게 나아요."
등등...
그리고 알바가 끝나면 모두 그 자전거를 향한 레이스를 시작했다.
나도 당시에 남자 동료 1명 + 여자 동료 1명 + 나까지 해서 그 자전거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를 견제하며 정류소로 뛰어갔다. 하지만 웃긴 것은, 대여소가 코 앞에서 보이는 건널목에서 다른 사람이 그 자전거를 대여하는 장면을 모두 함께 지켜봐야 했던 것이다.
우린 결국 그 누구도 자전거를 차지하지 못했고, 힘겹게 월성동 행정복지센터로 이동해서 사이좋게 자전거를 함께 대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