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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히니 Nov 09. 2020

아침을 닫고 싶어 졌다.

퇴사자의 변명

 열심히 돈 벌고 살다가 갑자기 퇴사를 한다는 나에게, 사람들은 저마다 질문과 조언을 건네 왔다.


 "그 좋은 직장을 왜?"

 "너, 거기도 못 버티면 다른 데에서도 못 버텨"

 "요즘 취업이 얼마나 힘든데 대책도 없이 회사를 그만둬?”

 “부모님은 뭐라셔? 하지 말라지?”


 그들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난 지금까지 취준생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꿔볼 만한 그런 직장에서만 일해왔기 때문이다. 그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최소 몇 백 대 일에서 몇 천 대 일의 경쟁률을 뚫어 내기도 했다. 가끔은 이런 직장에 다닌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 자존감을 채운 적도 있었다.


 조직의 일원이 되기 위해 내가 해왔던 노력을 생각하면, 퇴사를 한다는 게 억울하기도 했다. 서류 전형에 필기시험에 PT 면접, 토론 면접, 과제 면접... 뭐 안 해본 것이 없었다.


 그렇게 기를 쓰고 입사했던 최고의 회사들. 나도 입사하기 위해 쏟았던 노력이 아까워서 절대 퇴사하고 싶지 않았다. 퇴사하면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내 발로 그 좋은 직장을 나오고 싶었겠는가? 그런데 나도 정말 어쩔 수 없었다. 나에게는 꼭 퇴사를 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세상에는 '퇴사를 해야 하는 이유'를 가진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내 주변만 해도 한 트럭이 넘는다. 그래서 난, 나와 그들의 그 이유를, 그 어쩔 수 없는 이야기들을 '나의 이야기'로 털어놓으려고 한다.


 지금부터 세상 어딘가에 묵묵히 존재해온 그 이야기들을 시작한다.

(=여러 인물들이 겪은 이야기를 1인칭으로 각색하여 전해드립니다.)


욕구 단계 이론

 난 경영학을 한 5일 정도 공부했던 적이 있다. 공부했다고 하기에는 좀 뭐한 기간이지만, 그 5일 정도의 기간 동안 나름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5일을 공부한 경영학을 통해 깨달은 바이기 때문에 논리적 비약이 있을 수 있지만 지금 내 깨달음을 함께 나눠보려 한다.


 위의 이미지는, (굳이 경영학을 공부하지 않더라도 잘 알고 있을 것 같은) 매슬로우 욕구 단계 이론이다. 다른 학문에서도 이 이론을 많이 다루기는 하지만, 경영학을 배우기 시작할 때도, 매우 초창기에 이 이론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들었다.


 생리적 욕구, 안전의 욕구, 애정과 소속 욕구, 존경, 자아실현 등등의 욕구 모두 인간으로서 쉽게 이해되는 욕구들이므로 이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점이 생겼다.


 경영학에서 이 이론을 배우는 거라면, 회사에서 어떤 식으로든 이 이론을 활용하고 있을 텐데...

 도대체 사람의 욕구와 회사의 경영은 어떤 식으로 연결될 수 있을까?

 회사에서는 사람의 욕구를 어떻게 활용하고 있을까?


 이 질문들에 대해서는 쉽게 답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그냥, 이 문제는 나 같은 말단 사원이 이해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려던 찰나에, 수년 전 봤던 드라마가 떠올랐다.


 분명 주인공은 이런 어처구니없는 멘트를 날렸다.

 '저 회사 아무데서나 잠만 재워 주시면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잠만 재워주면 열심히 일한다고?'


 아니, 왜? 누가 회사 아무데서나 자게 해 준다고 열심히 일한단 말인가! (왜 회사에서 자냔 말이야! 집으로 퇴근하라고!) 내 입장에서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최대한 주인공의 입장을 이해해보기 위해 잠만 재워주면 열심히 일하려는 이유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봤다.


 어렴풋한 기억 속에 주인공은, 마땅히 잠 잘 곳이 없었던 것 같다. 끼니를 해결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설정상 추운 겨울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생각을 하다 보니, 내가 주인공이라도 잠만 재워주면 일단 일을 시작해볼 것 같았다. 나한테 가장 필요한 것이 잠잘 곳이라면, 잠잘 곳을 제공하는 회사가 최고의 회사가 되는 것 아닌가!


 그 드라마 속 주인공이 살던 시기를 좀 더 파헤쳐 보자면, 가령 우리가 보릿고개를 넘으며 힘들게 살던 시절엔 인간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인 생리적 욕구, 안전 욕구 등을 편하게 채울 수가 없었다. 기본적인 의식주도 해결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본적인 의식주 해결에 대한 욕망이 컸다. 그 시절 회사는 숙식, 단체복 같은 것들을 제공했고, 그것들은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켜줬을 것이다. 그 당시 근로자들은 의식주 해결 자체가 힘들었기 때문에 교육, 복지 포인트 같은 것들보다는 숙식제공에 더 매력을 느끼고 만족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사람들은 회사가 아니더라도 의식주를 해결하고 그에 대한 욕구를 채울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회사에서는 그다음 욕구 단계, '애정과 소속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을 생각했을 것이다. 이를 위해 회사는 다양한 놀거리를 제공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서부터 소름이 쫙 돋을 수 있으니 주의하시길!


 이때 새롭게 등장한 것들은 회사 주말 워크숍, 등산, 체육대회, 회식 등등이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점점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회사 주말 워크숍, 등산, 체육대회, 회식??!!


 그 순간, 회사에서 만났던 어떤 어르신들이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라떼는 말이야~다 같이 단합되고 그러는 맛이 있었는데, 요즘은 왜 다들 그런 걸 싫어하나 몰라. 그때는 참 재미있었는데 말이야."

 “요즘 젊은 직원들은 정말 이기주의란 말이야. 예전처럼 서로 뭉치는 맛이 있어야지. 안 그래 다들? 이렇게 다 친해져야 일하는 재미도 있는 거야.”


 추측하건대, 회사는 그 당시에 직원들에게 소속과 애정 욕구 등등을 나름대로 잘 채워준 것 같다. 놀거리가 풍부하지 않았던 그 시절 그렇게 행복하게 회사에서 워크숍, 단합대회를 하고 다녔던 사람들은 지금 회사에서 팀장, 본부장, 이사 등 결정권자가 되었다. 그들은 본인들이 행복하게 회사를 다녔던 그 기억을 우리들에게도 물려주고 싶어서 계속 '회사 주말 워크숍, 등산, 체육대회, 회식'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이었다!


 '요즘 어떤 회사가 주말에 워크숍을 하고, 등산, 체육대회를 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생각보다 그런 회사들이 꽤 있다. 나도 꽤 주기적으로 주말을 포함한 워크숍을 떠났고, 그 때마다 회사 사람들과 주말을 함께 해야 했다. 어떠한 경우에도 예외는 허용되지 않았다.

 

 소문으로만 듣던 장기자랑 준비나 온갖 체육 행사들이 우리의 소중한 주말을 앗아가는 일은 점점 더 많아졌고, 이에 대한 피로감은 극에 달했다.


 근데 이게 정말 좋은 방법일까? 적어도 내가 원하는 건 이런 게 아니었다. 난 워낙 놀거리가 풍부한 시기를 살아가고 있는 중이고, 학교를 다니며 마음 맞는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다. 대학을 다닐 때도 각종 봉사활동에 대외활동에 새로운 경험을 많이 했다. 부모님에게도 충분히 사랑받으며 자랐고, 솔직히 회사에서 직원들과 주말까지 뭉쳐있고 싶진 않다.


 내가 회사에서 채우고 싶은 것은 애정과 소속 욕구가 아니란 말이다. 오히려 난, 회사에서 자아실현을 하고 싶었다. 업무에 대해서 전문성을 쌓고, 가능하면 그 분야에 대해 학문적으로 공부할 기회도 얻고 싶었다. 직장에서도 최소 몇 년에 한 번쯤은,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갖길 원했고 회사가 성장하면서 나도 성장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내가 기를 쓰고 입사한 회사들 중에 이런 내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회사는 없었다. 그래서 그냥 이런 내 욕구는 회사 밖에서 알아서 채우려고 했다. 회사를 다니면서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래야 최소한의 나를 지키면서 회사 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회사는 나를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회사에는 본인들이 행복했던 기억을 더듬으며 업무와 무관한 각종 행사를 기획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난 야근 수당 없는 초과 근무를 한 달에 100시간 이상하면서도 그런 행사에 꽤 열심히 참여하며 살아야 했다. 이 상황에서 안 지치고 버티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그러던 어느 날, 회사에서 젊은 직원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여러 제도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은 차갑게 식은 마음을 요동치게 했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게 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 회사에는 '함께! 아침 열기 운동'이 생겼다. 말 그대로 함께 아침을 열면서 더 가까워지자는 취지로 생긴 행사였는데, 8시까지 출근해서 함께 회사 근처를 산책하고, 산책 후에는 함께 아침으로 샐러드를 먹으며 건강하게 아침을 여는, 그런 운동이었다. 그 와중에, 한 달에 한 번은 조조영화를 함께 봐야했다. (조조영화를 본 날은 2시간 정도 늦게 출근할 수 있었는데, 이 지점 때문에 회사에서는 아침 열기 운동이 복지의 일환이라고 생각한 듯 싶다.)


 아침 열기 운동이 생겼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아침을 닫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안 그래도 회사 가기 싫은데 심지어 한 시간 더 일찍 출근하라고? 같이 산책하고 아침을 먹으라고?  


 회사는 본부별로 아침 열기 운동에 참여해야 하는 인원을 할당해주었고, 결국 우리는 돌아가면서 아침을 열어야만 했다.


 이게 맞아? 이런다고 아침이 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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