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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히니 Nov 13. 2020

내가 언제 이지경이 된 걸까?

퇴사자의 변명

 살면서 누군가를 미친 듯이 미워했던 기억이 있는가? 아니면 미친 듯이 화나거나 속상했던 기억들은?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도 분명히 학교 다닐 때부터 싫어하던 친구가 있고, 친구 때문에 화났던 적도 있다. 학교에서 만난 현수아 같은 애, 손민수 같은 애, 오영곤 같은 애 등등...? 공부를 하다 힘들고 지쳤던 적도 있고, 결과가 좋지 않아 속상했던 적도 있다.


 이렇게 초, 중, 고, 대학교까지 다니면서 나름의 위기들을 만났지만, 그래도 그런 일 때문에 나라는 인간 자체가 변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회사를 다니다 보니, 그전까지 내가 겪어보지 못했던 그 이상의 분노와 부정적인 에너지가 나를 휘감았다. 그리고 결국엔 그것들이 나라는 인간 자체를 변하게 만들었고, 점점 회사에서 살아남기에 적합한 인간으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내가 회사에서 어떻게 변했는지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하려고 한다.



1. (사수가 아닌) 누군가가 자신이 (꼭) 해야 하는 일을 나에게 떠밀 때

<과거의 현수>

누군가: 현수씨~ 바빠?

나: (겁나 바쁘지만..) 아닙니다! 무슨 일 있으세요?

누군가: 그럼, 이 일 좀 부탁할게. 어떻게 하면 되냐면, (어쩌고저쩌고) 이렇게 하면 되거든?

나: 아, 넵! 감사합니다.

누군가: 내가 시키는 건데 감사할게 또 뭐야?

나: 아...만약에 저한테 부탁하지 않으시면 제가 이 일을 해볼 기회가 없을텐데...덕분에 다른 일도 배울 수 있어서 감사드립니다!

누군가: 아~ 김현수씨는 업무 태도가 참 좋아!


 나는 저 말을 비꼬듯이 한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말했다. 정말로, 회사에서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저런 식으로 일했다. 하지만 저런 선배들 중에, 내가 정말 발전하길 원하는 마음으로 일을 던진 사람은 거의 없다. 내가 저런 식으로 일을 받아주니까 '얼씨구나! 호구가 입사했구나!'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저 다들 일을 떠밀었을 뿐인데도 감사하다며 스스로 호구의 길을 택했다.


<N년 후의 현수 ver1. >

누군가: 현수씨~ 바빠?

나: 네. 왜요?


 저런 호구 상태로 몇 년을 보내고 나면, 어느 순간부터는 회사 구성원들에 대한 반감이 생긴다. 내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나한테 일을 시킬 것 같고, 안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다. 그래서, 누가 나를 찾기만 해도 반사적으로 마음속에 있는 뾰족한 칼이 튀어나온다.


<N년 후의 현수 ver2. >

누군가: 현수씨, 혹시 이것 좀 해줄 수 있어? 부탁할게.

나: 네? 저요?

누군가: 어. 이것 좀 부탁한다고.

나: 네?? 저요?? 이걸요?? 저한테 말씀하신 거세요??

누군가: ...많이 바빠?

나: 네.


 정확이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네? 저요? 제가요? 이걸요?'와 같은 말을 많이 내뱉게 되었다. 저 대답을 통해, '이 일은 내 일이 아닌데 지금 나한테 이걸 시키겠다는 거냐.'는 반감을 표출한다.



2. 누군가가 나를 성희롱할 때

<과거의 현수>

 누군가가 성희롱하면 부들거리며 울다가 용기 내서 신고한다. 신고한 것이 회사 전체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고, 오히려 피해자인 내가 곤란해진다. 그럼 또 그게 힘들어서 슬피 울며 억울해한다.


<N년 후의 현수>

-회식자리-

누군가:  현수, 팀장님이랑 러브샷  . 러브샷 러브샷! 3단계 3단계!

나: 네? 저요?

누군가: 아 현수, 지금 분위기 띄워야지. 한 번만. 응?

나: 선임님. 저 성희롱하면 신고당하는 거 모르세요? 소문 못 들으셨어요? 저 아직 젊고 이직할 곳도 많아서 무서울 게 없어요.


-누군가가 성희롱당하는 것을 목격할 때-

 성희롱 피해자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면, 바로 핸드폰을 든다. 그리고 녹화를 시작한다. 참고로, 이렇게 핸드폰을 꺼내 들면 성희롱하던 사람들 100% 행동을 중단한다.


<N+N년후의 현수>

 성희롱당하면 신고할 것 같은 사람으로 소문나서 아무도 성희롱하지 않음



3. 지각할 것 같을 때

<과거의 현수>

 일단, 기본적으로 긴장하고 있어서 지각할 일이 거의 없다. 하지만 지하철 연착 등의 문제로 조금이라도 지각할 것 같은 상황이 되면 초조해서 미칠 것 같다. 어떻게든 지각을 피하기 위해 미친 듯이 달리고, 겨우 시간에 맞춰 세이프하고, '헉...헉...'. 숨을 몰아 쉰다. 내 사전에 지각은 없다.


<N년 후의 현수>

 긴장이 많이 풀어졌다. 그래서인지 어느 날 눈을 떴는데, 왜인지 너무 상쾌하고 피곤이 풀린 듯하다. 핸드폰을 확인하니, 8:30이다. '아 이래서 이렇게 개운했구나!'

 아무리 노력해도 지각할 것 같다. 깔끔하게 포기하고 핸드폰으로 팀장님 연락처를 찾는다.


'팀장님..김현수입니다. 아침부터 연락드려 죄송합니다. 오늘 몸이 좋지 않아.... 블라블라 블라...'


출근을 포기한다. 휴가를 낸다.



4. 누가 (별 것도 아닌 걸로 ex. 인사할 때 구부정하다) 내 욕하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과거의 현수>

 '내가 뭘 잘 못했을까? 내가 어떻게 해야 그분이 나를 좋게 생각할까?'를 계속 고민한다. 의연한 척 하지만, 왜 욕을 먹었을지 분석하고 더 나은 직원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 한다. 한편으로 엄청 속상하고 위축된다.


<N년 후의 현수>

 어차피 회사에선, 아무리 착하고 일 열심히 해도 욕먹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금까지 살면서 회사에서 욕 안 먹은 사람을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이 글을 읽으면서 '어? 나는 욕 안 먹었는데?'라고 하면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무슨 짓을 해도 누군가에겐 무조건 욕먹는다.

 욕을 안 먹는 사람은 없고, 욕을 특히 더 많이 먹는 사람은 있다. 이걸 깨닫고 나서 욕먹는 것이 괜찮아진다. 욕먹어도 인생에 큰 지장이 없다는 진리를 깨닫는다.


"더 욕 해!!!!!!!!!!!! SHOW ME WHAT YOU GOT!!!!!!!!!!!!!!!"



5. 술 강요당할 때

 참고로, 나는 신체적인 결함(?) 때문에 술을 거의 마시지 못한다.


<과거의 현수>

누군가: 아~ 이런 자리에서 술 빼는 건 진짜 아니지. 이건 회에 대한 모독이야~ 현수씨 술 한 잔만 해 딱 한 잔만!

나: 아...죄송합니다. 몸이 안 좋아서... 술이 잘 안 받아서..

누군가: 아~그런 거는 술 마시면 싹 나아~!

나: (곤란 곤란)...


 건강 문제가 아니면 차라리 술을 마셔버리고 싶다. 술 강요 때문에 괴롭고 곤란해한다.


<N년 후의 현수>

누군가: 아~ 이런 자리에서 술 안 마시면 진짜 아니지~~이건 고기에 대한 모독이야~현수씨 술 한 잔만 해~

나: 팀장님, 전 나쁜 년입니다!!! 고기를 모독하는 나쁜 년이라고요!!!!

누군가: ??? 아니 현수씨..그게 아니고..

나: 전 쓰레기예요! 나란 나쁜 년...! 고기를 모독하는 나쁜 년! 술도 못하는 나쁜 년!

누군가: 현수씨..그게 아니고 진정해..

나: 아닙니다! 진정할 수 없어요! 전 나쁘다고요! 머리라도 박을까요?? 네??


 저렇게 반응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술을 권하다 기세를 꺾고 괜찮다고, 그만하라고 다독인다.



 회사를 다니는 몇 년 동안, 난 이렇게 변해버렸다. 부당한 대우에 대해서 반기를 들거나, 회사와 회사에서 만나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여유가 생긴 것은 어쩌면 좋은 일인 것 같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원래 저렇게 강하게 의사표현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저런 반응을 하기 위해서 마음속에 늘 칼을 품고 살아야 했다. 회사에서만 저 칼을 품고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회사 밖에서도 그 칼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가족에게도, 연인에게도, 친구에게도 무심결에 저 칼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저 칼을 품고 있던 내 마음도 상처 입었다. 난 언제 이지경이 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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