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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히니 Nov 16. 2020

아, 재미없네

퇴사자의 변명

 2014년에 방영한 '미생'이라는 드라마는, 종합상사에서 근무하는 직장인들의 삶을 현실적으로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으며 방영 당시에 꽤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재미있다고 손꼽는 드라마 중에 하나다.) 만약 내가 회사를 다니기 전에 이 드라마를 봤다면, 주로 주인공 '장그래'의 입장에 이입해서 드라마를 봤을 수도 있겠지만 이 드라마를 처음 봤을 때 이미 직장인이었던 나는, 드라마의 수많은 등장인물들에게 이입하고 공감했다.


 그중에서도 내가 깊게 공감했던 인물 중 하나는, 미생에서 빌런 중의 빌런으로 나왔던 '박과장'이다.


출처: 유튜브 tvn 드라마 캡처

 김희원 배우가 맡은 박과장은, 드라마 안에서는 주로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인물이다. 회사를 다니면서 업무에는 태만하고, 백마진과 페이퍼 컴퍼니를 통해 비리를 저지르며 엄청난 커미션을 챙겨간다. 다른 직원들을 무시하거나 성희롱 발언을 내뱉기도 한다. 이런 설명만 보면 그냥 절대'악'의 존재로 보일 수 있겠지만, 그가 이런 빌런이 된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다 있다.


 그는 단일팀으로는 최대 수준의 수출계약을 따내며 성과를 냈던 능력 있는 직원으로 묘사된다. 업무의 결실을 맺었을 때, 그는 눈물을 글썽였을 정도로 열성적인 직원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일한 그에게 회사는 어떤 선물을 줬을까? 드라마 상에서, 전무님은 법인카드를 하사했고, 그날 그 법인카드로 토할 때까지 회식을 했다. (물론, 현실에서는 인센티브도 받고 다른 방식으로 노고를 치하받았을지도 모르지만)


 정말, 저 정도 능력을 갖고 눈물을 글썽일 정도로 노력한 직원에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이것밖에 없단 말인가?


 박과장은 스스로를 던져서 일했고 회사를 위해 성과를 냈지만 그 결실을 함께 나눠 받을 수는 없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특별히 본인이 얻어가는 것은 없고, 쳇바퀴 안의 부품일 뿐이었다는 것을 느낀 순간. 모든 것이 재미없어진 것이다.


 '재미없네.'


 혼란스럽기도 하고 괴롭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한, 그런 표정으로 볼펜을 던지며 '재미없네.'라는 대사를 날리는 박과장의 표정은 내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그 이후, 박과장은 서서히 빌런이 되어 간다. 비리를 저지르며 돈을 벌어도 그게 일종의 보상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가 나쁜 짓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빌런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했을 때, 무조건 그를 비난만 할 수는 없었다. 나 또한 회사를 다니면서 박과장처럼 행동하지 않았을 뿐이지, 박과장이 했던 그 '재미없음'을 수없이 떠올렸기 때문이다.


 사실 처음엔, '재미없음'이 퇴사하는 데에 영향을 미칠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취업 전 이미, 인턴을 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직장은 정말 '재미없는' 곳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열심히 일하는 것에 대해서 인정 못 받을 수도 있고, 인정을 받더라도 내가 얻는 것이 없을 수도 있다고 늘 생각했다.


 어차피,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소수의 몇 명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리고 업무 성과와는 전혀 무관하게 모두 같은 급여를 받았다. 100의 일을 해내는 사람, 50을 해내는 사람, 0을 해내는 사람, 심지어 일을 망치며 -100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모두 같은 급여를 받았다.


 이런 것들 때문에 마음이 힘들 때가 있을지라도 나 스스로를 위로했다.


 '여긴 그래도 좋은 직장이잖아. 다들 부러워하잖아. 난 일을 잘하고 능력 있잖아.'


 좋은 직장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저런 재미는 포기해도 될 거라고 나 스스로를 위안해보기도 했다. 그런데, 한 사람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것, 인정받은 만큼 대우를 받는 것은 생각보다 중요했다. 그리고 나만큼 일하지 않는, 혹은 일하지 못하는 사람과 같은 대우를 받을 때 느끼는 박탈감은 생각보다 컸다.


 우리팀의 팀장님은, 일을 잘하는 직원을 신뢰하며 업무 대부분을 몰아주는 타입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팀장님의 신뢰를 받고 있는 직원이었다. 어떻게 보면 신뢰를 당하는 느낌도 들었는데, 어쨌든 나처럼 함께 신뢰를 당하는 직원들과 함께 늘 (수당 없는) 야근을 하며 버겁게 일했다.


 그래도 나는 그 당시 내가 큰 일을 맡고 있다는 것, 이 일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싶다는 목표, 큰 일에 기여하고 있다는 뿌듯함 같은 것이 있었다. 그 뿌듯함을 부여잡고 서로를 위로하면서 그렇게 몇 년을 보냈다. 그 사이 나는 건강을 잃고, 내가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는 지경까지 왔다. 그 사이 일이 몰리는 현상은 점점 심해지고, 문득 내가 이 팀을 부양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현수, 이번에 담당했던 행사 잘 끝났는데, 저녁이나 다 같이 할까?"


 팀장님의 회식 제안에 대해 뭔가 대답을 하려는 사이 또 전화가 울렸고,

 "네, 김현수입니다."

 "어, 이번 행사 결과 보고서는 언제 가능해?"

 "아...보고서는 전체 내용은 빠르면 이번 주 안에 될 것 같고, 방문자랑 성과 보도자료 내려고 하시죠? 그 내용은 제가 미리 작성한 것 있으니까 확인해서... 어쩌구저쩌구..."


 회식을 제안하는 팀장님의 한 마디에 사람들은 고기니, 회니 의견을 내놓기도 하고, 식당을 검색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행사를 준비하느라 지친 몸으로, 행사 결과보고서에 대한 통화를 하면서, 회식 메뉴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사람들을 보고 있을 때. 그때, 나도 느꼈다. 나도 어쩔 수 없이 이 모든 상황이 답답하고 억울했음을 말이다. 내가 더 일하는 만큼, 내가 더 일을 잘하는 만큼, 인정받는 만큼 더 좋은 대우를 받고 싶었음을. 그리고 시간을 흘려보내면서도 나와 똑같은 대우를 받는 사람들을 보고 박탈감을 느끼고 있었음을...


 아. 정말 재미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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