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9개월] 두 얼굴의 유지비용
혹시 '별에서 온 그대'라는 드라마를 본 적 있는가? 오래전이지만, 그 당시 꽤 재미있게 봤던 드라마였는데, 극 중에서 배우 신성록씨(재경 역할)는 엘리트 재벌과 사이코패스 살인마라는 두 얼굴을 연기했다. 그렇게 두 얼굴을 가지고 오랜 시간 주변 사람들을 속이려면 극 중의 신성록씨처럼 능력이 있고 또 그 비밀을 지키기 위해 돈도 많이 써야 한다.
그 말을 다시 생각해보면, 돈도 안 쓰고 능력도 없으면 그 두 얼굴의 비밀을 지키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정필 수석의 두 얼굴이 까발려지는 데에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의 두 얼굴은, 하반기 최대 규모의 행사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9월에 해외에서 열리는 그 행사의 규모는 너무 컸고, 행사엔 우리가 뉴스로만 보던 온갖 귀빈들이 총출동할 예정이었다. 이정필 수석은 그 행사의 (잠정적인) 실무 총괄이었고, 돋보이는 일을 하면서 팀원들에게 행사와 관련된 일을 지시하며 으스댈 생각에 무척 들떠있었다.
“정말 저는 부족한 사람인데, 또 위에서 이렇게 신뢰를 보내주니까...이렇게 큰일도 맡게 되는 것 같습니다. 부끄럽네요.”
"제 와이프가 약사라서, 언제 그에 걸맞는 남편이 되나 했는데, 이렇게 또 빛을 보는 것 같네요."
"제가 박사 과정 하고 있을 때는~" 등등...
이런 말을, 한 10번쯤은 들은 것 같다. 나만 저런 말을 들은 것이 아니었다. 우리 팀, 다른 팀 사람들은 물론, 심지어 이정필 수석은 본인의 장인어른에게까지 큰 규모의 행사를 맡게 되었다고 자랑을 했다. 그가 이렇게 큰 규모의 행사에 집착하는 건 다 평가 때문이었다. 대규모 행사를 맡아야 좋은 평가를 받을 확률이 높아지고, 평가는 연봉에 바로 반영되기 때문이다.
반면, 나는 이 행사와 연관되고 싶은 마음이 정말 ‘0.0000001’도 없었다. 내가 총괄이 되는 순간, 정말 갖은 고생을 다 할 것이 뻔했고, 앞서 말했듯이 어차피 평가는 짬순이었다. 난 고생을 해도 득 볼 것이 없다는 뜻이다. 그렇게 9월 행사와 최대한 먼발치에 있고 싶었지만, 행사 규모가 워낙 컸고 이수석이 잡스러운 일들을 대부분 정이씨, 혹은 (주로) 나에게 시켰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고생을 하던 중이었다. 그러다 문득, 9월 행사와 관련하여 이수석보다 내가 더 많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팀장님, 저 9월 행사건 때문에 부처에 보고 좀 다녀오겠습니다.”
“아, 수석님. 현수도 데려가세요.”
“네? 이건 제 행사인데 왜 김주임을?”
“그렇긴 해도, 지금 현수가 지원 많이 하고 있으니까 보고도 같이 가고 요구사항도 같이 들으면 좋죠.”
이수석은 부처에 혼자 보고를 하려고 했지만, 나를 데려가라는 팀장님 때문에 정말 어쩔 수 없이 나와 함께 부처로 갔다. 부처로 가는 내내, 그는 내게 거의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도착하자마자 또다시 사람 좋은 척을 하기 시작했다.
“사무관님, 저 왔습니다. 우리 현수 주임도 같이 왔습니다.”
“혼자 오시는 줄 알았는데, 현수 주임도 왔네요?”
“네, 아무래도 보고하고 이러는 것도 옆에서 봐야 실력이 늘죠!”
이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펴본 적도 없는 담배가 땡길 지경이었지만 뭐 별 수 있겠는가!
“사무관님, 일단 9월 행사에서, MOU 체결은...어쩌구저쩌구...포럼 개최는...VIP 만찬 행사는...”
솔직히, 그가 하는 보고를 듣고 있으면서 아무리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해도 열 받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가 행사 총괄이 아니다 보니, 이수석이 요청하는 파트 위주로 업무 지원을 하고 있었는데, 보고 내용을 보아하니 그는 잡스럽고 손가는 업무 대부분을 내게 시키는 것 같았다.
“수석님, 고생하셨네요. 아직 일정 여유는 있는 편이니까 2주에 한 번 정도는 정기적으로 보고 해 주시고, 중요한 거 있으면...어쩌구저쩌구...”
사무관이 칭찬하자 기분이 좋은지, 본인이 직접 본인의 공치사를 시작했다.
“사무관님, 저 진짜 정말 고생했슈. 이거 기본 자료들도 하나하나 찾아보고, 업체랑 미팅도 많이 하고 그랬슈~”
“고생하셨어요. 근데, 여기 자료 찾으신 것들은 다 확실한 거 맞죠? 저희가 추가적으로 안 봐도 되죠?”
“당연하죠.”
“근데 출처가 어디예요?”
“출처요? 믿으셔도 되는 자료라니까요~”
“알죠. 근데 어디서 찾으셨는지 궁금해서요.”
이정필 수석은 대답하지 못했다. 왜냐? 저 자료는 다~ 내가 찾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수석은 나를 넌지시 보면서, 대답하라는 듯 눈치를 줬지만 난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자기가 다 조사했다고 떠든 다음에 도대체 뭐라고 대답하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잠깐 뜸을 들이더니, 이수석은,
“그, 네O버 지식백과가 잘 돼있어 가지고, 네O버 위주로...”
“(어이없다는 듯이) 네? 그쪽에서 보셨다고요? 그건 연도 일치 안 된 것도 있고 공공 쪽 공식 자료들이랑은 기준이 다른 경우도 많은데? 이거 다 그렇게 만드셨어요?”
사무관의 일침에 이정필 수석은 헛소리를 늘어놓으며 말까지 더듬었다.
“아...아니고 사무관님...에이 진...진정하시고.”
그때, 내가 말했다.
“사무관님, 정부 홈페이지랑 공공기관에서 발행하는 보고서들 위주로 정리한 자료라 걱정 안 하셔도 괜찮아요. 그리고 여기 이 쪽 보시면 제가 출처 적어둔 페이지 있어요.”
“아 그래? 어, 여기 있네요. 근데 이수석님은 네O버 보셨다는데? 김주임이 한 것만 출처가 그런 건가?”
“아니요. 여기서 수석님이 하신 게 없어서...(뻘쭘한 듯 웃었음) 처음부터 끝까지 제가 한 거라서, 그냥 수석님이 하신 얘기는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아 뭐야. 난 또 이수석님이 다 한 줄 알았네. 말씀을 좀 이상하게 하시네. 김주임이 고생이 정말 많네.”
10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했다.
그렇게 보고를 마치고 회사로 돌아오는 길. 나와 이수석 사이에는 적막만 흘렀고, 분위기는 매우 어색했다.
그리고 다음 날, 팀장님이 나를 회의실로 호출했다.
“어제, 부처에서 보고할 때 무슨 일 있었어?”
“아니요? 특별히 없었는데...”
“사실은 어젯밤에 전화가 왔는데, 9월 행사에서 이수석님을 아예 빼 달래. 그리고 현수를 총괄로 해달라던데?”
“저요? 그래서 팀장님 뭐라고 하셨어요?”
“아니, 그쪽에서 밀어붙이는데 뭐 별 수 있니? 무조건 현수로 해달래...”
“팀장님, 근데 저 상반기에만 행사를 몇 개를 했는데...”
“알어...알어...알지. 근데, 정말 내가 정말 부탁할게. 응?”
팀장님은 막무가내로 사정했다. 아! 이럴 거면 어제 그냥 가만히 있을걸... 잠깐 사이다를 마시겠다고 이 불구덩이 속에 스스로 몸을 던지다니! 솔직히, 내가 또 일을 책임져야 된다는 생각을 하니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이런 대화를 나누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수석이 나를 회의실로 불렀다.
“김주임, 혹시 제가 총괄하는 9월 행사에 관심 있어요?”
“아니요.”
“김주임 욕심 많은 사람인데, 돋보이고 싶을 것 같은데? 제가 양보할게요.”
“네? 아니요. 전 괜찮고 양보 절대 하지 마세요. 꼭 가세요.”
“으이그. 제가 양보하겠습니다. 어제 부처에서 보니까 사무관들 앞에서 아주 대단하시던데 뭘."
"그건, 수석님이 본인이 하지 않은 일까지 했다고 말하면서 출처까지 이상하게 말하니까 정확한 사실을 전달한 것뿐이에요. 전 이 일 진짜 하고 싶지 않아요. 욕심 없으니까 양보한다느니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그렇게 가고 싶어 했으면서, 본인이 갈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이 되자 갑자기 이수석은 양보 운운하며 회의실을 나갔다. 그는 그렇게 자존심을 지키고자 했으나, 그 날 팀 회의에서 팀장님이 ‘부처 요청으로 현수가 수석님 대신 출장을 간다.’고 하면서, 그는 자존심을 지키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온 팀을 돌아다니면서, “제가 가려던 출장, 김현수 주임이 욕심내서 양보했슈. 전 욕심이 없어서.” 따위의 말을 하고 다녔다. 그래서 종종 사람들은, 나를 야망 있는 인간으로 취급했지만 거기까지는 참을 수 있었다. 내가 진짜 참을 수 없었던 건 따로 있다.
어느 날, 다른 팀 선배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현수야, 너 근데 권책임이랑...무슨...사이야?”
“권책임님이요? 저희 팀에 있는 권책임님이요? 아니요...?”
“뭐 따로 많이 만나? 밤이나 주말에?”
“네? 아니요? 왜요?”
“하...이럴 줄 알았어. 너, 요즘 이정필 수석이 뭐라고 하고 다니는 줄 알아? 너랑 권책임이랑 무슨 사이인 것 같다고 얘기하고 다녀. 맨날 일 같이 하더니, 따로 만나는 것 같다고.”
어이가 없었다. 권책임이랑 야근하면서 저녁 식사를 자주 하기는 했다. 그 이유는, 이정필 수석 대신에 업무에 투입되는 사람이 보통 나와 권책임이었기 때문이다. (부처에서 나와 권책임을 신뢰하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일한 것 뿐인데...)
“네? 근데 권책임님 애가 두 명인데? 저보다 훨씬 어른인데...? 저랑 나이도 10살 넘게 차이나요.”
“알지. 근데 이수석이 말을 이상하게 하고 다녀. 권책임이 유부남인데도 김주임이랑 술 마시러 다니고 따로 어디 간다고...너무 걱정된다면서 그걸 그렇게 얘기하고 다니더라고."
“제가 술을요? 저 술 안 마시잖아요. 그리고 야근한 다음엔 집에 가야죠. 무슨...”
“나는 너를 아니까, 바로 물어봤지. 현수 술도 안 마신다고. 그러니까 또 대충 얼버무리더라.”
“아...진짜 억울해요. 미쳤나 진짜...그럼 제가 불륜이라는 거예요?”
‘미쳤나’ 소리가 절로 나왔다. 이걸 바로 가서 따질까? 아니야. 그럼 그 미꾸라지 능구렁이가 요리조리 빠져나갈 텐데? 그럼 사람들한테 해명할까? 아니야. 오히려 그게 더 이목 집중시키는 것 같은데...가만 생각해보니, 하필 권책임이랑 이런 소문이 난 건, 다 이수석의 질투심 때문인 것 같았다. 본인은 계속 인정받지 못하고 있고, 본인이 하고 싶었던 일을 나와 권책임이 하게 되었으니...
난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