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개월] 약 사이다
정우진 선임의 전화를 받고, 그다음 주 수요일이 될 때까지 몇 번이고 권성배 주임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성희롱 신고 이후에, 권주임은 나에게 상당히 화가 났고 내가 퇴사할 때까지 우리는 같은 팀 안에서 거의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일단 꿀리지 않게 최대한 잘 지내는 것처럼, 예쁘고 화려하게 꾸미고 가기로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그를 만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는 계속 고민되었다.
1) 사업설명회에서 마주치더라도 그냥 모르는 척한다.
2) 최대한 그와 마주치는 것을 피한다.
3) 오히려 내가 먼저 찾아가서 프로페셔널하게 인사를 건넨다.
4) 그의 주변에서 얼쩡거리며 잘 지내는 모습을 보여주다가, 그가 인사를 하면 그제야, '아, 여기 오셨어요?' 하고 인사하며, 너 따위가 있는 줄 몰랐다는 인상을 심어준다.
내 마음은 자꾸 4번 선택지에 기울었다. 그가 먼저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하면 담담하게 프로처럼 인사를 건네리라! 4번으로 가자!
하지만, 행사 당일 내 선택은 크게 의미가 없었음을 깨달았다. 행사장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기 때문에 도대체 누가 어디에 있는지, 약속을 하고 만나기도 어려운 지경이었다. 오히려 눈을 씻고 찾아봐도 권성배 주임을 찾을 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권성배 주임이 내 눈에 보이길 기다리는 지경이 되었고, 문득 그렇게까지 그를 볼 필요가 있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점심시간쯤이 되었을 때, 내 뒤에서 뭔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 이게 누구야? 김현수 아니야?"
이 목소리는?... 그는 권성배 주임이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었는데 그때는 안 나타나더니 마음의 긴장이 풀린 다음에서야, 마주치다니! 목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알 수 있었지만, 난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처럼 뒤를 돌았다.
"(최대한 여유 있게) 아, 권성배 주임님, 잘 지내셨어요?"
"와, 너 많이 변했다? 좀 회사원 티 난다? 잘 지냈지?"
"예. 잘 지내셨어요?"
"야, 너 우진이 형한테 한 마디 했다며? 원래 알던 사이였는데 좀 편하게 하자. 일 좀. 어? 너 아직도 내가 뭐라 한 것 때문에 삐져있어?"
"삐져...있냐고요?"
"야, 나도 그때 너 때문에 엄청 곤란했었어. 서로 그냥 퉁치자."
누가 보면 동등한 입장에서 잠시 다투기라도 한 줄 알겠지만, 어떻게 그 일을 퉁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성희롱을 당해서 신고했던 것이고, 권성배 주임은 본인이 한 성희롱 때문에 입장이 곤란했던 것인데 말이다. 하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실제로는 뭐라고 대꾸를 해야 할지 모르겠고, 위축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 업무 하다가 한 두 번쯤 마주쳤던 최준모 사무관이 우리 쪽으로 왔다. 담당 공무원이 아닌데 이름까지 기억하는 것은, 그가 상당히 젊은 사무관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담당했던 행사장에서 잠깐 인사를 나눴었는데 나에게는 인상이 좋은 사람이었다.
"어? 서로 아는 사이예요? 김현수 주임님을 여기서 다 보네요?"
"아, 네 사무관님 안녕하세요. 그때 전시회에서 뵜었죠?"
"네. 그때 전시회 갔다가 너무 괜찮아서 사진도 찍고 그랬는데...이렇게 두 분이 또 아는 사이세요?"
아마도 사진을 찍어서 정우진 선임에게 보낸 사람이 바로 최사무관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최 사무관은, 이들의 부처 담당 공무원인 셈이었다. 부처 담당 공무원을 만나자 권성배 주임의 목소리는 한 껏 올라갔다.
"아~ 사무관님. 오셨으면 연락을 해주시지."
"어차피 점심시간까지 못 만나면 전화드리려고 했어요. 근데 두 분은 어떻게 아시는 사이예요?"
"아, 예전에 김현수 주임이 저희 쪽에서 인턴을 했었어요. 완전 햇병아리였는데 이렇게 또 보게 되더라고요."
"그렇구나. 두 분이 친하실 테니까 전시회 팁 좀 받으면 좋겠네요."
"그럼요. 오빠 동생 하던 사인데. 안 그래요?"
?...하...그 놈의 오빠 소리 좀 집어치울 수 없나? 우리가 오빠 동생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는 대다가, 최사무관 앞이라고 뭔가 오버하는 꼴이 거슬렸다.
"그럼, 우리 셋이 식사라도 하러 갈까요? 근처 식당에서 식사하면 된다던데."
나와 권성배 주임의 사이가 정말 좋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최사무관이 식사를 제안했다. 우린 사업설명회에서 안내받은 식당으로 가서 함께 식사를 시작했다. 최사무관은 나에게 많은 질문을 쏟아냈다. 행사 준비하는 것이 힘들진 않았는지, 어떤 업체랑 일했는지, 나이가 몇 살인지, 왜 "A" 기관에서 정규직을 할 수 있었는데 "B" 기관으로 갔는지 등등...?
"아, 저는 좀 힘들었던 일들이 많아서...지금 여기도 엄청 힘들기는 한데...어쨌든 그 당시에 사람 때문에 좀 힘들었거든요."
"진짜요? 왜요? 제가 만나는 분들은 다들 좋은 분들인데...권주임님도 그렇고...어떤 게 힘들었어요?"
"사무관님은 사무관이잖아요. 당연히 사람들이 다 잘해주겠죠. 전 엄청 힘들었어요. 인턴이었잖아요."
'사무관님은 사무관이잖아요.' 소리를 듣고,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아, 진짜 누가 저한테 사무관님은 사무관이잖아요. 이런 소리 하는 거 진짜 처음 들어봐요. 빵 터졌네. 김주임님 진짜 재미있으시다. 누가 힘들게 했어요? 궁금하다."
"어휴. 궁금하시면 진짜 저희 따로 만나요. 여기서는...말하기가...어휴."
나와 최사무관이 A 기관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자, 권성배 주임은 내가 어떤 말을 꺼낼지 신경 쓰이는지 자꾸 대화 주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했다. 가령, 여기 식사 괜찮지 않냐, (뜬금없이) 휴가 어디로 갈 예정인지 등등...?
하지만 최사무관은 내가 A 기관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궁금한지, 계속 내게 A 기관에서 있었던 일을 물었다.
"현수 주임님, A 기관에서 어떤 일 있었는데요? 일단 권성배 주임님이랑 같은 팀이었던 거죠?"
"네...근데 이런 말씀드려도 되나... 제가 거기서 성희롱당했었는데 그걸 신고했었거든요..."
여기까지 얘기하자, 권성배 주임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나한테 성희롱한 당사자가 본인인 것을 입 밖으로 꺼낼까 봐 전전긍긍하는 눈치였다. 물론, 최사무관이 그런 것을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딱히 없지만, 그래도 회사 밖에서 나름대로 유지해왔던 대외적 이미지가 무너지는 것이 싫은 모양이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A 기관에 있을 때도 권성배 주임과 그 무리들은 회사 밖의 사람들에게는 젠틀하고 스마트한 젊은 직원으로 통했다.
"정말요? 성희롱을 당했었어요? 그런 일이 있으셨구나...신고하기도 힘들었을 텐데..."
"네. 그래도 용기 내서 신고했었는데 그것 때문에 성희롱했던 당사자가 저한테도 엄청 화내고, 그 사람 친구들까지도 와서 엄청 뭐라고 하고...그런 일이 있었네요..."
"어우, 진짜 고생하셨다. 도대체 누가 그랬어요? 그래도 그쪽 사람들은 제가 많이 아는데..."
"(사무관님 옆에 얼음처럼 굳어있는 사람 안 보이시나요? 그분입니다.) 아마 사무관님이 진짜 아는 분일 수도 있어서...그걸 말하기는 좀 그렇고...어쨌든 그런 일이 있었어요. 근데 권주임님 말대로 여기 맛 괜찮네요! 그냥 그럴 줄 알았는데, 그죠?"
최사무관과 나는 식사 내내 활기차게 이야기를 나눴지만 권성배 주임은 좀처럼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최사무관에게 별다른 얘기를 한 것도 아니었는데 이미 뭔가 속이 시원하고 개운했다. 최사무관은 나랑 얘기하는 게 재미있고 웃기다면서, 언제 한 번 함께 식사를 하자고 했다.
"아 맞다, 김현수 주임님. 그때 명함을 못 드렸는데 이거 제 명함입니다. 저는 여기까지 듣고 다시 회사로 복귀해야 돼서, 그럼 주임님들 나머지 내용 잘 듣고 오세요!"
그렇게 그는 나와 권성배 주임을 남겨두고, 떠났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권성배 주임은 나를 노려봤다.
"김현수...너 최사무관 앞에서 뭐 한 거야? 너..."
"주임님. 주임님이 성희롱한 사람이라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진정하세요."
참고로, 화내는 사람한테 '진정하라는' 말을 하면, 상대방은 더 분노하게 되어있다.
"진정? 하...진짜."
"주임님, 화나세요?"
"야, 화 안 나게 생겼냐?"
"주임님, 이게 그렇게 화날 일이면 그때 성희롱당한 저는 얼마나 화났겠어요. 앞으로 이런 식으로 얼굴 볼 일도 있을 텐데 서로 조금만 더 존중하고 야, 오빠 이런 소리 안 했으면 좋겠어요."
"하..."
"주임님 회사 밖에서 만난 사람들한테는 좋은 사람이잖아요. 저도 이제 외부 사람인데 그냥 최소한만...부탁드릴게요. 그럼 나머지 내용 잘 듣고 가세요."
권성배 주임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고, 난 화장실로 들어왔다. 나는 저렇게 똑 부러지게 말하는 스타일이 아니어서, 다리가 후덜 거리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래서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한 동안 잘 일어나지 못했다. 다리는 후들거려도 왠지 기분은 좋았다.
몇 년 전, 나를 두렵게 하고 슬프게 했던 사람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권성배 주임을 생각해도 이제는 억울하지 않고 이 날의 작은 통쾌함이 떠오를 것 같아서? 어쨌든 기분이 좋았다. 화장실 변기 위에서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가끔, 다른 사람과 맺고 있는 현재의 관계가 앞으로도 지속될 거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회사를 다니면서 느낀 것은, 정말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다. 무시하던 사람에게 무시당하게 되는 날도 오고, 도움을 주던 사람에게 도움을 받는 날도 온다.
나에게 해를 주는 사람을 일부러 품고 살 필요는 없지만, 후배든, 선배든, 누구든 상관없이 같은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는 건 정말 중요한 일 같다.
그게 도리이기도 하지만, 언제 누가 어떤 사람이 될 지 모르는 일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