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개월] 행사장 단편
누가 처음으로 회사를 전쟁터라고 표현했는지 모르겠지만, 내게 회사는 정말 전쟁터 같은 곳이었다. 회사 생활을 시작하고 만났던 사람들을 떠올려 보면, 프린터를 사용했다고 프린터기를 던지는 사람, 본인이 미행과 도청을 당하고 있다고 하는 사람, 내가 한 일들을 훔쳐가고 이간질하는 사람 등등...회사 밖에서 만났던 사람들과는 겪지 못했던 일들이, 이곳 회사에서는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물론, 회사=전쟁터라는 비유는 어디까지나 비유겠지만, 정말로 회사가 전쟁터라고 생각한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회사에 들어오면서 사람들이 싸우는 것을 정말 많이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사람들은 바쁘고 예민해지면 각자의 예민함에 취해 고함을 지르며 싸우기도 하고, 또 일이 잘 풀리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화해라는 과정 없이) 예전처럼 일하고, 웃고 그랬다. 서로 미안했다는 말을 나누지도 않고 싸우기 전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면, 저게 진짜 어른의 사회생활인가 싶기도 했다.
이번에 행사장에서도, 다들 예민함이 폭발하는 바람에 눈앞에서 싸움을 두 건 목격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싸움은, 부처 공무원인 한 사무관과 우리 팀장님 사이에서 벌어졌다. 두 사람은 나이도 비슷했고, 성격도 조금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둘 다 마음속에 따뜻함이 있는 사람들이긴 한데, 너무 다혈질이고 갑자기 짐작하기 어려운 포인트에서 흥분하기 시작하면 고함치고 화를 내곤 했다. 다른 점을 굳이 따지면, 사무관이 우리 팀장님보다 히스테릭한 부분이 더 많긴 했다. 어쨌든, 아무래도 회사 안에서는 그들에게 있는 일말의 따뜻함보다는 다혈질의 모습이 부각되기 마련이었지만, 행사 진행 내내 둘 사이에 큰 문제는 없었다. 그러다가, 문제가 발생한 건 사무관님이 애지중지하던 가방이 갑자기 사라지면서부터였다.
그녀는 보통 일을 하면서도 그 가방을 어깨에 메고 다녔고, 솔직히 그 가방을 어딘가에 두고 다니는 것을 잘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정말 VIP들이 행사장에 올 때 잠깐 가방을 내려놔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전시회 부스 안에 있는 적절한 공간을 발견했고, 그쪽에 가방을 두면서 우리 팀장님에게 이런 부탁을 했다.
"팀장님, 미안한데 저 잠깐 여기 가방 두고 갈 테니까 이것 좀 잘 봐주세요."
팀장님은 알겠다고 대답을 하긴 했지만 가방을 가만히 지켜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행사장 안에서는 예상치 못한 일이 계속 발생했고, 팀장님도 계속 움직여야 했으니까.
부스 어딘가에 가방이 있었고, 그 가방의 주인도, 그 가방을 봐주기로 한 사람도 일로 바빴다. 그러다 일이 마무리될 때쯤, 가방을 찾으러 온 사무관님은 가방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순간 당황했지만, 우리 팀장님이 자신의 가방을 잘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하며 우리 팀장님을 찾았다.
"팀장님! 팀장님?"
"(약간 헐레벌떡) 네, 사무관님!"
"팀장님, 제 가방 팀장님이 가지고 계시죠?"
"네? 부스 안에 있을 텐데?"
"네? 부스 안에 없던데..."
"정말요?"
그 순간 사무관님은 통제력을 잃었다.
"(소리치며) 가방 좀 봐달라고 했는데 도대체 어디 갔다 온 거예요! 가방 없잖아요! 보이세요? 가방 없다고요!"
"다른 분들이 잠깐 맡아두고 계신 건 아닐까요? 죄송해요. 한 번 찾아볼게요."
다행히 이때까지는 팀장님이 통제력을 잃지 않았는데,
"팀장님, 혹시 내 가방에 손댄 거 아니에요? 없어진 물건 하나라도 있으면 책임질 각오 하세요!"
그랬다. 사무관님은 결국 선을 넘고 말았다. 그 말을 들은 우리 팀장님도 완전 이성을 잃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사무관님! 지금 말씀 너무 심하신 거 아닌가요!! 그 가방이 뭐라고 제가 손을 댑니까!"
"(더 크게 소리치며) 그럼 그 가방이 어딨냐고요!"
"(더 크게 소리치며) 저도 돈 벌고요! 그 가방 줘도 안 갖습니다!"
"(더 크게 소리치며) 뭐라고요!!"
이쯤 되었을 때, 나머지 공무원들과 우리 회사 사람들은 그 둘은 진정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 시작했다.
"사무관님, 좀 더 찾아보면 있을 거예요.", "팀장님, 여기 아직 사람이 있는데...속상하시겠지만..." 등등...
그 둘은 서로 몸을 점점 가까이하고 있었고, 정말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한 주무관님이 우리 쪽으로 헐레벌떡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헐레벌떡 숨을 쉬며) 아니...두 분 지금 가방 때문에...헉...이러신다고요...허헉...헉...그 가방 제가...보관하고 있어요. 부스에 사무관님 가방이 그냥 있길래, 혹시나 해서...가방 여깄어요..."
그렇게 주무관님은 사무관님에게 가방을 건넸다. 사무관님은 약간 당황한 듯하면서도 혹시 없어진 물건이 없는지 확인하고 싶었는지 가방을 뒤적거렸다. 그때 팀장님이 소리쳤다.
"이것 보세요!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을 것 같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사과하세요! 사과하시라고요!"
"..."
나 같으면 이런 싸움을 만들지도 않았겠지만, 이 상황까지 왔으면 바로 사과할 것 같은데 사무관님은 "오해할 수도 있죠!"라는 말과 함께 자리를 떠버렸다.
"팀장님, 괜찮으세요?"
"현수, 거봐. 내가 그 딴 가방에 손을 왜 대? 정말. 웃기지도 않아. 그래도 다행이네."
"뭐가요?"
"행사 남은 기간은 편할 거야. 저렇게 해놓고 무안해서 행사할 동안은 우리 못 건드릴 거야. 좋다!"
좀 전의 전투 상황이 무색하게 팀장님은 해맑게 웃으며, 오늘 저녁은 맛있는 것을 먹자고 하셨다. 싸움의 내용은 유치하기 짝이 없었지만 싸움 이후 팀장님의 반응은 그가 어른임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게 했다. 큰 감정 동요 없이, 담담한...?
하지만 회사라는 전쟁터 안에서 팀장님 같은 사람들만 싸움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그 행사를 하면서 후배들이 내 앞에서 싸우는 것을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하필 행사장에서 준호씨는 그 간의 섭섭함이 폭발한 모양이었다.
사실, 석현씨와 정이씨는 성격이 비슷한 편이었고, 준호씨는 그 둘과는 성격이 약간 달랐다. 그 둘보다 훨씬 더 섬세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내가 어림짐작하기에도, 준호씨가 약간 소외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도 할 말이 있으면 행사가 다 끝난 뒤에 그들만의 자리를 마련했으면 좋았을텐데...!
하필 행사 도중, 팀 내에서 교대로 밥을 먹을 때! 그래서 나, 준호씨, 석현씨, 정이씨가 따로 네 명이서 밥을 먹으러 나갔을 때 표출되다니!
밥을 먹으러 가면서부터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정이씨와 석현씨는 서로 어울려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눴지만 준호씨는 잘 웃지도 않고 걸어서 올 때도 약간 거리를 유지하면서 따라왔다. 괜스레 눈치가 보여서, 내가 이제 후배의 눈치도 봐야 하는 건가, 싶었다.
그래도 회사에서 별 일 있겠나 싶었다. 그런데... 준호씨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너넨 왜 늘 이런 식이야?"
이 말을 들은 석현씨와 정이씨는 당황하는 눈치였다.
"무슨 소리야?"
"사람이 같이 있으면 다 같이 얘기를 해야지. 지금 내가 소외감 느낄 거란 생각 안 해봤어?"
"너도 말 같이 하면 되잖아. 무슨 소리야?"
"그래. 또 내가 문제지. 둘이 그렇게 얘기를 하는데 쉽게 같이 얘기할 수가 있겠냐고."
"얘기하고 싶은 거 있으면 얘기해. 왜 이래?"
비슷한 연차의 직원들과 밥을 먹게 되어, 최소한 밥이라도 편하게 먹겠구나 싶었는데 저들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동공에 지진이 오기 시작했다. 준호씨는 나이에 비해 굉장히 동안에다 눈이 동글동글한 편이었는데, 눈에는 눈물도 약간 맺혀 있는것 같았다. 그런 그의 눈망울을 보고 있자니 내 동공에도 지진이 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기선 내가 어느 정도 상황을 수습해야 할 것 같았다.
"저기...일단 지금은 행사 중이니까..."
그때, 정이씨는 테이블 위에 수저를 놓더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전... 가볼게요."
정이씨가 나가자, 준호씨는 더 할 말이 있는지 정이씨를 따라나섰다.
나와 석현씨는 어색한 정적 속에서 한 10분 쯤 꾸역꾸역 식사를 이어갔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려는데, '어? 다리가 왜 이러지?'
며칠 째 구두와 불편한 옷과 함께 행사장을 누볐던 내 다리...식당에서 조차 맘 편하지 못했던 나...이것이 조화를 이루며 다리에 쥐가 난 것이었다. 석현씨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식당 문 쪽으로 걸어 나가고 있는데, 난 일어날 수 없었다.
"저기...석현씨? (석현씨는 나의 작은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하... (큰 목소리로) 석현씨!!!"
"네?"
"석현씨...미안한데...제가 다리에 쥐가...난 것 같거든요? 죄송하지만..."
그 와중에 말을 듣지 않는 다리 때문에 석현씨의 부축을 받았다. 어색한 분위기에서 그에게 몸을 의지하고 간다는 건 뭔가 수치스러운 느낌이 들기도 하는 일이었다. 카리스마 있는 선배가 되고 싶었는데, 싸움을 말리지도 못하고 다리에 쥐까지 나서 부축까지 받다니..! 게다가 석현씨와 나는 키가 거의 비슷했기 때문에 부축하고 있는 모양새가 더 웃겼을 것이다.
"주임님, 저희 동기들 일은 죄송했습니다...주임님 앞에서 그러면 안 되는 건데..."
"(그래...그걸 알고 있다니 다행이야.) 그럴 수도 있죠. 같이 잘 얘기해봐요."
"주임님, 근데 준호 있잖아요. 솔직히 엄청 이상한 거 아세요?"
"(그만!!)..."
"사실, 그 준호가 주임님한테도 섭섭한 거 있다고 우리한테 얘기도 하고, 주임님 별명도 지었는데...별명 뭐로 지었는지 말해드릴까요?"
솔직히 겁나 궁금하긴 했지만, 그 별명이 뭔지 알게 되면 내가 상처 받을까 봐 판도라의 상자를 열지 않기로 했다. 이래서... 회사는 전쟁터라고 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