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개월] 파라과이 사건 이후, 행사장 단편
대망의 행사일이 다가왔다. 행사 사전점검을 위해 실무 인력들은 행사 며칠 전, 지방에 위치한 행사 장소로 향했다. 우리 회사에서는 나, 정이씨, 이수석이 그리고 담당 부처에서는 3명의 공무원이 사전 점검 출장길에 올랐다.
미리 말하고 싶은 것은, 4박 5일 일정의 이 출장은 내 입장에서 상당히 불편한 출장이었다는 것이다. 일단 부처 소속 공무원들은 우리의 '갑'이었고, 이번 행사 규모가 워낙 컸기에 그들의 예민도도 한껏 올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선 빨리 이동하고, 빨리 대응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나, 정이씨, 이수석 모두 그곳 지리를 잘 모르기도 하고 교통편으로 이동하는 데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주로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그런데 택시를 타면 어떤 것이 발생하는가? 맞다. 바로 택시비. 택시비가 발생한다. 우리 셋은 보통 택시를 타고 이동했고, 일반적으로 택시를 탄 사람들 중에 가장 연장자가 택시비를 내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수석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택시가 어딘가에 정차함과 동시에 바로 문 밖으로 튀어나갔다. 그가 워낙 빨리 문을 박차고 나가버리는 바람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계속 택시비를 냈다. 한두 번은 낼 만 했다. 문제는, 4박 5일 중에 우리는 수 없이 택시를 탔다는 것이다.
하루에 왔다 갔다 기본 2번을 택시를 탔고, 중간중간에 이동해야 할 일이 발생하면 택시를 또 탔다. 그럴 때마다 그는 튀어나갔다. 당시에 기사님들이 카드보다 현금을 선호해서 가능하면 현금으로 결제를 했는데, 한 10번 가까이 택시를 타면서 내 현금은 소진되었고, 그다음부터는 정이씨가 택시비를 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출장 막바지쯤에 이르렀을 때, 이수석에게 택시비를 내달라고 부탁을 하게 되었다.
"수석님, 저랑 정이씨가 현금을 다 써서 그런데, 이번엔 택시비 좀 내주시겠어요?"
"(매우 황당하다는 듯이) 제가요? 왜 제가 택시비를 내야 할까요?"
"(그럼 나는 왜 지금까지 택시비를 냈을까..?) 저희도 계속 냈는데, 현금 다 써서 그래요. 한 번 내주세요."
"그건 잘 모르겠고, 현수씨가 한꺼번에 낸 다음에 회사에 출장비용 청구하세요."
참고로, 우리 회사는 택시비를 출장비용으로 청구할 수 없다. 이걸 돈에 예민한 데다가 회사까지 오래 다닌 이수석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 그는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하며 회사 비용으로 처리하라고 했다.
"수석님, 이거 출장비로 처리 안 되는 거 아시잖아요. 한 번 탈 때마다 몇 천 원 정도 나오니까 그냥 제가 지금까지 냈는데, 현금이 없다니까요?"
"그냥 출장비로 처리하세요."
그는 끝까지 출장비로 처리하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결국 저렇게 얘기를 했는데도 택시가 어딘가에 도착하자마자 뛰어내렸다. 결국 내가 카드로 택시비를 냈던 것 같다. (물론, 지금은 택시비를 카드로 내는 문화가 자리 잡았지만, 저 당시에 지방에서는 카드로 택시비를 내면 싫어하는 기사님이 많이 계셨다 정말...)
그러다가, 정말 마지막 날에는 나랑 정이씨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생각에 택시가 어딘가에 도착하자마자 그 누구보다 빨리 택시를 박차고 내렸다. 둘 다 뒷좌석에서 각각 오른쪽과 왼쪽으로 튀어나가다시피 했다. 그렇게 4박 5일, 10번 이상의 택시비 계산에서 이수석은 단 한 번만 그의 지갑을 내주었다.
이렇게 우리들끼리 있을 때는 절대 돈을 쓰지 않으려고 하는 이수석이, 4박 5일 중에 정말 흔쾌히 지갑을 열었던 적도 있다. 출장 첫날에, 행사를 준비하다가 공무원들과 다 함께 저녁을 먹으러 식당에 갔고, 우리는 1인당 11,000원 하는 갈비탕을 먹었다. 공무원들은 본인들은 어차피 출장 다 끝나고 본인들끼리 N빵 하기로 했다며 회사끼리 따로 결제하자고 했다. 그 말을 듣더니, 이수석은 싱글벙글하면서
"에휴, 저는 당연히 제가 대접해드리려고 했는데. 제가 계산하겠습니다."
"아닙니다. 법인카드도 못 쓰는데 회사 따로 각자 계산하시죠."
"알죠. 근데 다들 고생하시는데 제가 사비 쓰는 게 뭐 대수겠어요?"
그런 이수석을 지켜보면서, 진짜 어떻게 사람이 앞 뒤가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공무원들은 끝까지 그의 호의를 거절하며 따로 계산했고, 나와 정이씨도 11,000원을 결제하기 위해 카드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가 우리에게 따로 밥을 사 줄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근데 이게 무슨 일이지?
"김주임, 이정 연구원. 이건 제가 사드리겠습니다."
"네?"
"너무 고생하셨는데 이런 건 제가 대접해드려야죠!"
"(당신 그런 사람 아니잖아...) 아니에요. 각자 카드로 결제하면 될 것 같아요."
"아닙니다! 이럴 땐 그냥 감사합니다, 하고 얻어먹는 거예요!"
거짓말 아니고, 공무원들 앞에서 그 짠돌이 이수석이 사람 좋은 미소를 하고 나와 정이씨에게 밥을 사준다고 할 때, 혈압이 올라 머리 뚜껑이 열리는 느낌이었다. 저런 모습을 보자 공무원들은 "현수 주임 좋겠네, 수석님이 많이 예뻐하네!"와 같은 말을 날렸다. 출장기간 내내 공무원 앞에서 갈비탕 한 끼를 산 것 외에 이수석은 모든 계산에 있어서 매우 예민한 반응을 보이며 나를 불편하게 했다.
행사 당일 하루 전에는, 우리 회사에서는 본부장님, 팀장님, 준호씨, 석현씨, 그리고 주무부처에서는 국장, 과장 등 더 많은 사람들이 행사 지원을 위해 행사장으로 왔다. 다행스럽게, 모든 준비가 원활했고 그 행사를 통해서 난 나름 일 잘하는 젊은 직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
한편, 행사 기간 내내 이수석은 본인이 돋보이기 위해서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거짓말, 이간질을 수차례 시도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행사 지원을 하기 위해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있어서 그의 이간질은 시도하는 족족 들통이 나고 말았다.
그래서 그때마다 팀장님이나 공무원들은 그에게 "김주임 바쁜데 제발 쓸데없는 거에 신경 쓰지 말고, 지원 좀 제대로 하세요."라는 말을 들었다. 본인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자 섭섭했는지 돌연 행사 도중 잠수를 타기도 했다. 물론 잠수를 탔다고 해서 행사 준비에 지장이 생긴 것은 없지만, 사람들은 일도 안 하고 잠수까지 타버린 이수석을 불신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행사가 끝나고 서울에 있는 회사로 출근했을 때, 이수석은 이수석대로 마음이 상해있었고, 나와 정이씨도 그의 계산 회피, 이간질 때문에 마음이 상해있었다. 그러다 나와 정이씨를 회의실로 호출한 이수석은, 우리에게 영수증이 몇 개 붙어있는 A4용지를 내밀었다.
"수석님, 이게 뭐예요?"
"이정 연구원님, 이런 건 정말 확실히 하고 싶어서요. 저희 갈비탕 먹은 거 제가 한꺼번에 계산했는데, 1인당 11,000원이었거든요. 영수증을 통해 확인은 하실 수 있을 거고요. 그리고 제가 택시비 한 번 계산했던 적 있는데, 4800원 나왔어서, 그건 1600원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현금으로 주셔도 되고 계좌로 송부해주셔도 됩니다."
"뭐라고요?"
'뭐라고요?'를 외친 건 정이씨였지만, 내 마음도 그와 똑같았다. 갈비탕은 사준다고 한 것 아니었나? 그리고 10번 넘는 동안 택시비 딱 한 번 낸걸 지금 N빵 하겠다고? 솔직히 공무원들 앞에서 갈비탕 사준다고 내숭 부릴 때도 구역질이 났는데 심지어 그것조차 공무원들 앞에서 잠깐 연기를 한 것이었다니. 이제 와서 돈을 달라고 하다니!
난 정신이 아득해졌고, 정이씨는 따지기 시작했다.
"그거 사준다는 거 아니었어요? 왜 사람들 앞에선 사준다고 하고 이제 와서 돈 달라고 하세요? 그리고 택시비는 저랑 현수주임이 더 많이 냈는데요?"
"흥분하지 마시고, 전 이런 건 정확하게 하고 싶다는 말씀입니다. 전 영수증이 있습니다."
정이씨의 얼굴이 욹그락붉그락했다. 저런 대화를 하면서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는 이수석이 새삼 대단하고 징그럽게 느껴졌다.
아득해졌던 정신이 서서히 궤도를 찾으며, 지금까지 내가 당한 것들이 떠올랐다.
"수석님, 정말 대단하시네요. 정확하고 싶으시다고요? 저희가 택시비 훨씬 많이 냈는데, 그냥 안 받을게요. 그건 그냥 가지시고요. 이렇게 철저하시면서 지금까지 저랑 식당 가서 먹은 돈은 왜 안 주시는 거예요?"
"제가 언제요?"
"언제 어디서 누구랑 먹었는지 다 말씀드릴까요? 15,000원 주셔야 되는데 안 주셨잖아요. 그것도 사주신다고 데려가 놓고 도망가셨잖아요."
"저는 정확한 게 좋을 뿐입니다. 택시비 안 받는다고 하시니 저도 택시비는 안 받겠습니다. 근데 현수주임 말대로, 제가 15,000원 드려야 한다면 제가 망고식스 쿠폰으로 6000원 갈음했고, 주임님이 저한테 11,000원 주셔야 하니까 제가 2000원 받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정말 여기가 현실세계인가? 만약 지금의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으면 개싸움이 날 수도 있었겠지만, 25살의 나는 그에게 2000원을 건네는 것으로 그 일을 마무리한다. 그냥 그렇게 이 모든 것을 잊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전까지는 이 정도로 돈에 구질구질한 인간을 만난 적이 없어서 어찌할 바를 몰랐던 탓도 있다.
"수석님, 여기 2000원이고 앞으로는 돈과 관련된 어떤 걸로도 연관되지 않길 바라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2000원은 유용하게 쓸게요. 그럼 이만."
<지금 생각해보면>
정확히 언제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느 날 어떤 선배가 내게 밥을 사주려고 했다. 그가 밥을 사준다고 했을 때, 난 오만가지 의심을 했다.
'밥 사 준다고 한 다음에, 도망가려나?', '유부남인데도 나한테 관심이 있는 건가? 여자로?', '아니면 밥 사준 다음에 일할 때 내 뒤통수를 치려고 하나?' 등등...
내 우려와는 다르게, 그 선배는 밥도 사주고 업무도 잘 알려주는, 그리고 나를 전혀 여자로 생각하지 않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 선배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다음에, 난 나 스스로 저런 모난 생각을 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나는 왜, 밥 사 준다는 따뜻한 한 마디를 저렇게 곡해하고 의심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나는, 내가 너무 오래 동안 비정상적인 상황을 경험했기 때문에 내 생각도 거기에 머물고 있었다는 답을 내렸다. 아마도 저런 상황에 더 오랫동안 노출이 되었다면, 더 모난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회사를 다니면서도 내가 원래 어떤 생각을 하고 지내던 사람인지, 어떤 것이 정상적인 것인지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지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는 내가 저런 이정필 수석 같은 이상한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