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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내 목덜미를 노리는 하이에나_(2)

[14~15개월] 강을 건너다, 파라과이 사건

by 하이히니

회사에 복귀하는 길은 언제나 별로였지만, 그래도 이수석이 없다는 것은 큰 위안이 되었다. 나름 마음이 정화되기도 했다. 특별히 서두르지도 늦장을 부리지도 않으며 그렇게 회사에 돌아왔다. 그런데, 분명 볼일이 있다고 했던 이수석이 나보다 먼저 와있었다. 기본적으로 어디 돌아다닐 때 나보다 훨씬 빠른 것 같기는 했지만, 볼일을 보고도 나보다 먼저 왔다는 것이 신기했다. (신기함만 느낄게 아니라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어야 하는데..) 보고가 잘 끝난 상황을 팀장님께 전달하려고 자리에 갔지만, 팀장님은 자리에 계시지 않았다.


'다시 열심히 일해볼까?' 하고 자리에 앉았는데, 보라 언니가 나를 툭툭 쳤다.

“왜 핸드폰 확인 안 해?”

‘핸드폰?’


그러고 보니, 부처에서 회사에 복귀할 때까지 핸드폰을 확인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핸드폰을 확인하자, 보라 언니가 나를 찾는 다급한 메시지들이 쌓여 있었다.

‘현수야, 어디야?’, ‘너 어디임?’, '김현수 김현수!'....‘지금 화장실로 와.’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었음을 직감했다.

“언니, 왜? 무슨 일인데?”

“지금 이정필 여기 온 지 15분 정도 지났거든?”

“뭐? 15분이나? 볼일 본다면서 어떻게 그렇게 빨리 왔지?”

“야, 오자마자 팀장님한테 뭐라고 한 줄 알아? 김주임이 보고 제대로 못하고 엄청 깨져서 자기가 겨우 쉴드 쳤대. 김주임이 많이 힘들어해서 좀 쉬고 오라고 했다는 거야. 이거 진짜야? 구라지?”

“뭐? 나 완전 잘했어. 그리고 이정필 거기서 한 마디도 못했는데. 팀장님 어디 계셔?”

“팀장님 지금 외부에 회의 가셨어. 암튼 김주임 아직 미숙하다고 엄청 많이 말했어.”

“하...진짜 방심한 내가 미친년이야. 자긴 볼 일 있다고 먼저 가랬는데, 도대체 뭘 타고 이렇게 빨리 온 거지?”


그가 축지법을 썼는지 날아왔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는 나보다 15분가량 빨리 도착했고, 도착하자마자 (그가 도착했을 때는 자리에 있었던) 팀장님에게 인사를 했다고 한다. 내가 어딨는지 묻는 팀장님의 질문에, ‘본인’이 도와줘서 보고가 잘 마무리되긴 했으나 김주임의 미숙함 때문에 분위기가 좋지 않았던 탓에 김주임 마음이 힘들 것 같아 쉬고 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내가 돌아왔을 때는 외부 회의 때문에 팀장님이 부재중이었고, 내가 놀다 오지도 않았고 심지어 보고도 너무 잘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말해줄 방법이 사라진 상태였다.


나도 안 쉬고 바로 회사로 복귀했다고, 보고도 잘했다고 말하고 싶지만 대답 없는 메아리였다.


어떻게 보면 그의 레퍼토리는 늘 뻔했다.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었지만 막상 그 상황에 처하면 대처하기가 어렵고, 따지기도 어려웠다. 그리고 어쩌다 용기를 내서 이 상황에 대해 해명을 요구할라치면, 그는 미꾸라지처럼 그 상황을 빠져나갔다. 가령, 그 자리에 없는 팀장 핑계를 대며 위기를 무마하는 것처럼? 이쯤 되자, 차라리 모두에게 대놓고 막장처럼 굴었던 민경 언니가 더 좋은 동료인가 싶기도 했다.


이수석과 지내면서 이런 일들은 당하는 나조차도 언제 당했는지 어떻게 당했는지 모를 정도로 수 없이 반복되었다. 그러다가, 그와 본격적으로 언쟁을 시작하게 된 사건이 생긴다. 때는, 행사가 정말로 코앞까지 다가와 정말 미칠 듯이 바쁜 시기였다. 사실 그전까지는 행사 실무 총괄을 담당하면서도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린 적이 없었으나, 이제는 그런 지시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마침, 갑자기 타 국가 상황을 파악하는 시각 자료를 만들어야 했기에 내가 6개국, 정이씨 3개국, 이수석에게 4개 국가를 배분해서 조사를 하도록 요청했다. 나눠서 조사를 하려고 하는데, 이수석이 갑자기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이거, 이렇게 배분해서 조사한다고 팀장님께 메일 보내시는 건 어때요?”

“이걸 왜요?”

“보내시기 바쁘면, 제가 보낼까요?”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고 그런 메일을 왜 팀장님한테 보내냐는 말이었어요.”

“사소하다고 보고를 안 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 저희가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해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저희는 다 평가를 받는데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걸 알려 드려야죠.”

“수석님, 일을 하고 있다는 걸 다 알리고 싶은 건 저도 마찬가지지만, 조사 완료한 자료를 보내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조사하려고 우리끼리 배분했다는 메일을 보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네. 바쁘시면 제가 보내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수석은 평낳괴(평가가 낳은 괴물) 같기도 했다. 더 이상 언쟁을 할 여유가 없던 나는 그냥 그를 내버려 두었고, 그는 팀장님에게 ‘현수 주임 6 국가, 정이씨 3 국가, 본인은 4 국가’를 조사한다는 메일을 보냈다. 이런 메일을 보내는 게 속으로 한심하게 느껴졌지만, 워낙 정신이 없어서 그렇게 일에 매진했다. 퇴근 시간 한두 시간 전쯤 (수정이 필요 한 부분은 많이 있었지만) 정이씨가 3개국 조사 자료를 보내주었고, 나 또한 6개국 조사 자료를 끝마쳤다. 근데 이수석은 퇴근시간이 임박하도록 자료를 보내주지 않았다.


“수석님, 자료 언제 보내주실 수 있어요?”

“저도 업무가 너무 많아서...아직 조사 중입니다.”

“(뻔히 지금 업무 없는 것 알기에) 어떤 거 때문에 바쁘신데요?”

“저도...하나하나 말씀드리긴 어려워도, 조금 바쁘네요.”

“그래도 오늘까지 국가 조사하시기로 했는데, 그거 먼저 해주셔야죠. 수석님이 담당하는 행사는 어차피 몇 달 뒤잖아요.”

“그냥 지금까지 한 거 보내드릴까요? 지금 퇴근해봐야 해서... 나머지는 김주임이 좀 해주실래요?”

“(그래 차라리...내가 한다.) 예...보내주세요 그냥.”


차라리 내가 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지금 보냈습니다. 김주임 수고하시고, 전 퇴근해보겠습니다.”


그렇게 이수석은 내게 메일을 보냈고, 그 메일을 열어보고 난 충격을 감출 수 없었다. 메일에 첨부된 파일에는 딱 4글자가 적혀 있었다.


‘파. 라. 과. 이.’


파라과이? 파라과이는 그가 조사하기로 한 나라 중 하나였다. 그 어떤 정보도 적혀 있지 않고 그냥 파라과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도대체 지금까지 무슨 조사를 하고 있다는 거지? 장난치는 건가? 아니야. 그래도 이 정도로 막장일 리 없어. 파일을 잘못 보내준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황급히 이수석에게 전화했다.


“수석님, 저 김현수입니다. 지금 파일 잘못 온 거 같아서요.”

“더블체크하고 보내서, 제대로 갔을 텐데요?”

“(더블체크?) 지금 파일에 파라과이만 적혀 있어요.”

“아 김주임, 그 파일 맞습니다. 조사 중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끝내지 못하고 드린 건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저도 업무 때문에 바빠서 불가피하게...그럼 수고하세요.”


저 말을 듣자마자, 뭔가 눈 앞이 잘 안 보일 정도로 화가 난다는 느낌을 받았다. 기한도 안 맞추고 아무것도 안 하면서 파라과이 네 글자가 쓰인 파일을 보낸 게 정말 현실인 건가? 그러다 그가 팀장님에게 보낸 메일이 떠올랐다.


그 쓸데없는 메일을 보고, 팀장님은 어쨌든 우리가 국가를 배분해서 조사한다고 생각할 것이고, 어쨌든 이수석이 4개국 조사를 맡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렇게 내게 파라과이 4글자만 적혀 있는 파일을 주더라도, 내가 다시 팀장님에게 ‘저렇게 배분했지만, 수석님은 4글자만 써서 주셨습니다.’라고 메일을 보내진 않는다. 이게 혹시 이수석이 그린 또 다른 큰 그림인 건가?


“수석님.”

“네?”

“앞으로는 업무에 신경 좀 써주세요. 수석님이 담당하는 행사 기한 여유 있는 거 저도 알고 있고, 오늘 하루 열심히 하셨으면 이것보다는 결과물이 좋을 거라고 생각해요. 어린 직원이 이런 말 하는 거 듣기 싫으시겠지만, 앞으로는 좀 제대로 부탁드립니다.”

“...”


이수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파라과이 전까지는, 그에게 화나는 일이 있어도 속으로 생각하거나, 겉으로는 적당히 웃으면서 너무 딱딱하지 않게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파라과이 사건을 기점으로 나는 그에게 약간의 쓴소리를 내뱉게 되었고, 이후부터 우리 사이는 매우 악화되기 시작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난 어릴 때부터 '화나는 일이 있어도 참아야 한다.',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식의 교육을 많이 받고 자랐다. 그 가르침은 ENTJ(MBTI 검사 결과)인 나에게는 잘 맞는 가르침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걸 실천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쓰면서 살았다.


회사에 들어오기 전에는 비교적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 그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사는 데에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입사 후에는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일평생 참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을 주입당한 나로서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쓴소리를 할 수 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또, 어떤 사람과 갈등 관계에 돌입한다는 것 자체에 대해 두려움이 컸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내가 변한 것은, 이정필 수석 같은 사람을 만나고부터이다. 덕분에 회사에서 누군가와 갈등을 겪는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에게 쓴소리를 하는 것 모두 큰 거리낌이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래봤자 예전에 비해서지만...)

갈등이라는 것은 모두에게 불편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필요할 때 내 목소리를 내는 것보다는 덜 중요한 거 아닐까? 나부터 살고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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