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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내 목덜미를 노리는 하이에나_(1)

[14~15개월] 강을 건너다

by 하이히니

다리에 큰 상처가 난 사슴 한 마리가 움직이지 못할 때, 어디선가 그 사슴을 지켜보는 동물이 있다. 바로 하이에나. 기회를 포착한 듯, 사슴이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내 사슴의 목덜미를 취한다.

만약 하이에나가 이런 동물이 아니라면 좀 미안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하이에나는 저런 동물이다. 누군가가 힘들고 지쳤을 때, 기회를 노려서 이득을 취하는 그런 동물?


그리고 하이에나는 정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다니는 회사에도 있다.


때는 중요한 행사 개최를 앞두고 점점 바빠지고 있는, 그런 시기였다. 그 무렵 우리 이정필 수석님은 나에게 점점 하이에나 같은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 행사에서 나는 전시회 실무 총괄 담당을 하고 있었다. 행사장에는 VIP가 오기로 되어 있었고, VIP 동선과 겹치는 몇 개의 부스는 특히 신경 쓸 것들이 많았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번다고 했던가? 고생하고 있는 건 나인데, 늘 본부장, 기관장 등 높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싶어 하는 것은 이수석이었다.


“본부장님, 이게 제가 총괄하고 있는 행사인데, 시안은 어쩌고저쩌고, 부처 의견은 어쩌고저쩌고...” 이런 식으로 내가 만든 자료를 가지고 본인이 보고를 하러 간다거나, 나와 같이 보고를 하는 자리에서도 늘 본인이 모든 것을 준비하는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실무 담당자들에게는 본인은 이번 행사와 무관하니 본인에게 어떤 연락도 하지 말고, 자료 요청은 김현수 주임에게만 하라고 했다.


내가 이것에 대해 약간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면, 언제나 그는 ‘으이그’라는 본인 시그니처와 함께 핑계를 대기 위한 시동을 걸었다.

“으이그. 실무는 김주임이 커버 칠 수 있어도, 위에 보고하다가 긴장하면 제가 커버해드리려고 이러는 겁니다. 저만 믿으세요.”


믿으라고 하면 할수록 그에게 모든 것을 말할 수 없게 되고, 그에게 어떤 자료도 넘기고 싶지 않아 졌다. 솔직히 공공기관에서, 성과평과가 나이순인 이 곳에서 왜 서로를 이렇게 경계하면서 살아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이런 식으로 긴장하며 지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내가 없으면 무슨 소리를 해댈지 모르기 때문에 자리를 잠시 비우는 것조차, 화장실을 가는 것조차 신경 쓰이는 날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화요일, 행사 준비 때문에 무리를 했는지, 몸이 으슬대는 통에 하루 연차를 내게 되었다. 물론 바쁘기는 했지만 주무부처의 요구사항은 월요일 회의가 끝나자마자 야근하면서 모두 반영해둔 상태였고, 이에 대한 내용을 수요일에 보고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수요일 오전에 조금 일찍 출근해서 마지막 점검을 한다면 괜찮겠지 싶었다.


하지만, 내가 간과한 것은 회사에 내가 아프기만을 노렸던 하이에나가 있다는 것이었다. 끙끙 앓고 있는데, 주무부처에서 전화가 왔다.

“김주임, 어떻게 된 거야?”

“주무관님, 안녕하세요. 근데 어떤 일...말씀하시는 거예요?”

“우리가 월요일에 말한 것들은 어떻게 된 거야? 반영도 안 되어있고?”

"네? 월요일에 회의하고 수정한 내용은 아직 저만 가지고 있는데, 그걸 어떻게 보고 계세요?”

“무슨 소리야? 지금 이수석이 급하게 보고해야 된다고. 일정 빠듯하다고 들고 와서 보고하고 있어.”

“네? 저희 수요일에 보고하기로 되어있잖아요.”

“어. 근데 김주임이 수요일에 시간 안된다며?”

“네? 제가요?”

“어. 지금 이수석 여기 와있는데, 사무관님들한테 엄청 까이고 있어.”


주무관님에게 전해 들은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우린 월요일에 회의 후, 수정할 것들을 공유했다. 그런 다음 이를 수정해서 수요일 오전에 회의를 다시 하기로 했는데,) 갑자기 (내가 연차를 낸) 화요일에 이수석이 주무관님에게 전화를 했다고 한다.


“어이구, 주무관님. 바쁘시죠? 지금 행사건 보고 때문에 찾아뵈려고 하는데 괜찮을까요?”

“네? 김주임이 수요일에 와서 보고하기로 했는데.”

“아...김주임이 수요일에 시간이 안 된다는데... 오늘 갑자기 휴가를 내버려서...”

“네? 갑자기요?”

“아무래도...연차에 비해 행사 규모가 크다 보니 힘들어서 숨고 싶은 모양이더라고요.”


황당했지만, 나에게 개인적으로 전화를 해볼 생각으로 이수석에게 보고할 필요가 없다고 했단다. 근데, 멋대로 보고하러 거의 쳐들어 왔단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수석은 수정사항이 반영된 최종 파일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냥 가지고 있는 것 중 최신 버전 파일을 들고 부처로 들어간 것이다. 당연히 사무관들은 분노했다.

“아니, 수석님. 근데 저희가 말한 내용이 하나도 반영 안 되어 있는데...”

“어이구...사무관님. 저도 정신없습니다. 갑자기 김주임이 그렇게 잠수를 타는 바람에... 제가 고쳐서 오겠습니다.”


이러는 와중에 주무관님이 내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서 내가 이 상황을 알게 된 것이다. 전화를 끊고 확인한 팀 채팅방은 팀장님의 분노로 난리가 난 상태였다. 대충 요약하자면, 어떻게 된 일이냐, 부처에서 보고 때문에 난리 났다, 이수석이 커버 치느라 고생했다 등등?


도대체 하루 연차 낸 것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기고 있는 거지? 이수석은 무슨 생각으로 하루만 지나면 밝혀질 거짓말을 하는 걸까?


‘팀장님, 뭔가 착오가 있는 것 같은데 수정사항은 모두 반영되어 있고 제가 수요일에 제대로 보고드릴 예정입니다.’라고 메시지를 올리는데...마치 준비되어있던 것처럼 이수석의 메시지가 내 메시지를 올려내 버렸다.


‘김주임님, 아프신 와중에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고, 부처에서 급하게 보고 요청을 해서 제가 가지고 있는 자료들로 보고를 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한데, 주임님이 작성해 둔 파일에 문제가 많은지, 내일 보고는 철저하게 해달라고 부처에서 거듭 부탁하였습니다. 조금만 더 신경 써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보고는 제가 일단 잘 마친 상태이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푹 쉬세요^^.’


푹 쉬려고 하다가, 이수석 때문에 전혀 푹 쉴 수 없게 된 이 상황을 요약해보자면, 내가 아픈 틈에 부처에서 요청하지도 않은 보고를 굳이 본인이 하러 가고, 부처에는 내가 잠수 탄 것처럼 말하고, 우리 회사에는 내가 일 제대로 안 해서 부처한테 욕먹는 것처럼 말한다는 거지?


쉬는 와중에 이 일 때문에 몸은 더 안 좋아졌지만, 이수석 때문에 하루라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대망의 수요일. 보고 자료를 챙기고 확인하고 있었던 내게, 이수석이 다가왔다.

“현수주임, 많이 아프쥬~? 몸도 아프신데 최종 작업 파일만 공유해주시면 제가 보고하러 가겠습니다.”

“아닙니다. 수석님이 담당하는 부분도 없는데, 저 혼자 보고하러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으이그. 걱정 마시고 그냥 파일 주세유.”


그의 목표는 내 자료를 받아서 혼자 보고하러 가는 것이었고, 내 목표는 내가 만든 자료를 내가 가지고 가서 혼자 보고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 둘 다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내가 만든 자료로 함께 보고하러 가게 되었다. 이 최종 자료는 이수석에게 공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솔직히 보지도 않은 자료로 아는 척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역시 명불허전! 클라스는 영원했다. 부처 회의실에 입장하면서부터 이수석은 능글맞게 웃었다.


“사무관님, 저희 다시 왔습니다. 김주임 실수한 부분들은 제가 호되게 혼냈으니 너무 뭐라고 하시면 안 됩니다~ 차라리 저를 혼내세요.”


저 얘기를 듣고 나도 표정이 썩고, 전날 통화한 주무관의 표정도 ‘?’ 이랬다. 하지만 상황을 잘 모르는 사무관이나 더 높은 사람들은 나를 감싸주는 이수석이 대단하다면서 그를 칭찬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무조건! 이번 보고는 완벽해야 한다! 가자 김현수!라고 마음을 먹고 있을 때, 이수석은 남들에게 다 들리는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김주임, 떨지 말고 파이팅입니다. 부족한 부분 있으면 제가 바로 커버할 테니. 이러면서 일 배우는 겁니다.”

내용도 몰라서 보고도 못하면서 마치 나에게 성장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처럼 말하는 그에게 보여주리라!


그 날, 나의 보고는 마치 스티브 잡스의 그것과도...같진 않지만 대박이었다. 요청 사항을 완벽하게 반영했고 추가 요청에 대해서도 대안과 해결책을 제시했다.

“근데, 김주임 이렇게 잘하면서 어제는 왜 갑자기 잠수 탄 거야?”

“네? 제가요?”

“어. 갑자기 휴가 내고 잠수 탔다며.”

“(질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무관님.) 네? 그런적 없는데요? 그리고 오늘 보고 하려고 준비도 다 끝내 놓은 상태였어요. 제가 듣기로 사무관님이 급하게 이수석님에게 보고 요청하셨다던데?”

“제가요? 수석님, 이게 무슨 말이에요?”


이게 바로 N자 대면이 필요한 이유임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수석님, 저한테 어제 그러셨잖아요. 부처에서 급하게 찾는다고?”


회의실에 있던 사무관, 주무관들은 누가 도대체 급하게 보고하라고 했냐고 서로에게 묻기 시작했고, 이수석은 이제 궁지에 몰렸다 싶었는데 역시 명불허전! 클라스는 영원했다!


“에휴, 제가 꼭 나쁜 사람이 된 것 같네요. 다름이 아니고 팀장님 때문에...아직 현수 주임이 못 미더우신지 저한테 어제 꼭 굳이 보고하고 오라고 해가지고...에휴 저도 정말 난처했습니다. 김주임은 열심히 하고 있는데 팀장님은 김주임을 업무적으로 믿어주질 않으시니...”


와! 진짜 미꾸라지 같은 이수석. 정말 대단했다. 황정민을 닮은 우리 팀장님은 화나면 책상을 쓸어버릴 정도로 감정 표현에 솔직한 사람이었다. 팀장님과 함께 있는 것이 힘들기도 했지만 적어도 뒷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고, 업무에 대해서는 보통 나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큰 행사도 맡겨준 것이었고...근데 이수석은 또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을 이용해서 팀원을 못 믿는 팀장+팀장이 아직은 인정하지 않은 못 미더운 김현수 프레임을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


보고는 성공적이었지만, 이수석에 대한 경계와 혐오는 점점 더 심해졌다. 그렇게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회사로 복귀하고 있었다. 오랜 침묵을 깬 것은 이수석이었다.


“김주임, 저는 잠깐 어디 들렀다 가야 해서, 먼저 회사 들어가세요.”


이 건조한 한마디로 우리는 제 갈길을 갔다. 그와 함께 회사 복귀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잠시나마 상쾌함이 밀려왔다. 그래, 엿같았지만 보고는 잘 끝났고 다시 잘 준비해보자! 파이팅이다! 하지만, 내 상쾌함은 그다지 오래가지 않았다. 왜냐? 명불허전. 그의 클라스는 영원했다.


PS. 생각보다 하이에나를 너무 귀엽게 그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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