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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회사에 도둑이 살고 있다_(2)

[13~14개월] 2년 차 시작

by 하이히니

이수석이 우리팀에 들어온 후, 책상 위에 있는 동전들이 사라진다든지, 심지어 무선 마우스 안의 건전지가 사라진다든지 하는 일들이 계속 발생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카페에서 자리 맡을 때 핸드폰과 지갑을 테이블 위에 둘 정도로 안전한 나라가 아니었던가? 태어나서 줄곧 이런 문화에 익숙한 채로 살아온 나에게, 사무실에서 물건이 없어진다는 것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이수석이 팀에 온 이후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탓에, 이수석이 의심스럽기는 했지만, 특별한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냥 물건을 좀 더 조심히 간수하는 것 밖에 답이 없었다.


이와 별개로 그는 지속적으로 내 업무 파일을 스틸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게 점점 더 불편한 존재가 되고 있었다. 어느 날은 참지 못하고 한글 파일을 PDF 파일로 변환해서 전송한 적도 있었다. 그런 내게 이수석은 "현수 주임, 너무 섭섭해유~저 못 믿으시나요."라는 말을 남겼다. 괜히 그에게 경계심을 드러내며 하수처럼 행동했다는 생각에 자책하기도 했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일주일 정도 지나자, 우리팀에 배정된 신입직원 세 명이 왔다.


바로 준호씨. 정이씨. 석현씨! 그들 모두 나보다 3~4살 나이 많은 남자 직원이었다. 이 두 명 중, 정이씨는 나와 이정필 수석과 함께 일하게 되었다. 이렇게 일하게 되면서 이수석은 본격적으로 나와 정이씨에 대해 일종의 간보기를 시작한다. 우리의 업무능력, 정치력 등등을 가늠해보기도 하고 둘 사이에서 이간질을 시도하기도 했다.


둘 중 첫 번째 타깃은 아무래도 이 회사에 처음 들어온 정이씨인 듯했다. 그는 나를 따로 회의실로 불렀다. (그는 무슨 말을 할 때마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하는 법이 없이 늘 회의실로 불렀다. 늘 켕기고 구린 것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김주임, 요즘 일 어때요?”

“총괄하는 다음 달 행사 때문에 좀 바쁘기도 하고..”

“으이그...그건 그렇고, 정이씨 어떤 것 같아요? 일은 좀 해요?”

“글쎄요. 제가 직접 일을 부탁하진 않아서 잘 모르겠는데...얼마 되지도 않았고...”

“음...사실 빠릿빠릿한 것 같진 않더라고요. 김주임도 알고 있어야 할 거 같아서...”

“아, 그래요? 제가 직접 일 부탁할 일은 거의 없을 거 같아서..”

“근데, 정이씨가 일 경험도 없고...정이씨가 현수주임 약간 불편해하는 것 같기도 하던데?”


이수석은 내 앞에서 정이씨에 대한 부정적인 말을 하고 싶어서 시동을 걸기 시작했지만, 그에 대한 경계심 때문에 별다른 말을 섞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 오후, 정이씨가 갑자기 팀장님, 이수석과 나에게 ‘사업 관련 계획’이라는 메일을 보냈다. 메일엔 첨부파일도 있었는데...그 첨부파일은?


사실 그 첨부파일을 처음 보고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공공기관에서는 문서 작성에 사용하는 기본적 틀과 글씨체가 매우 중요하다. 근데 그녀의 파일을 열었을 때 그런 틀이 전혀 없었고, 글씨체도 함초롱 바탕이었다. 이곳에서 이런 형식은 말도 안 되는 파일이었다. 2년 차인 내가 봤을 때도 당황스러운 파일이었으니, 팀장님이 그 메일을 열어본다면 놀라게 될 것이 분명했다.


“이정 연구원님, 근데 이 메일 갑자기 왜 보내신 거예요?”

“이거 이수석님이 작성해서 보내라고 하셨어요.”

“수석님이 확인한 자료라는 거예요?”

“네. 뽑아서 보시기는 했는데 팀장님한테도 하나 메일로 보내라고 하시던데...왜요?”

“아...이게 저희가 보고할 때 쓰는 양식이랑 너무 달라서...수석님이 보셨다니까 뭐...”


솔직히 형식도 그렇고 내용도, 팀장님이 보실만한 자료가 아니었다. 이상한 꿍꿍이가 있을 것 같았지만 정이씨는 크게 개의치 않아했다. 잠시 뒤 정이씨는 신입직원 안내 사항을 전달받느라 인사팀에 갔고, 회의 중이던 팀장님은 자리에 돌아와 메일을 확인하더니 정이씨를 찾기 시작했다.


“정이씨?”


부재중인 정이씨 대신 그 물음에 답한 건 이수석이었다.

“지금 이정 연구원 부재중인데, 혹시 메일 때문이신가요?”

“네...이거 뭐예요?”

“어휴...제가 주의 주겠습니다. 제가 자료 작성 좀 시켰는데, 아무래도 퀄리티가 좀 그렇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손보고 나중에 팀장님께 같이 보고하자 했는데,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걸 팀장님한테 바로 보낸 것 같더라고요.”

“이런 자료를 왜...”

“잘은 모르겠는데, 본인이 고생해서 작성한 건데 같이 보고하자고 하니까 뭔가...그랬는지 팀장님한테 바로 보낸 것 같네요. 후배님들한테 신뢰를 줘야 되는데 제가 약간 그러질 못했는지...”

“그런 건 아니겠지만 문서 워딩이 좀 그렇네요. 훈련이 많이 필요하겠는데요? 수석님이 많이 좀 도와주세요.”

“그런 거라면 당연하죠.”


내가 정이씨에게 들은 말과 이수석이 팀장에게 하고 있는 말은 전혀 달랐다. 정이씨를 잘 알지는 못했지만, 솔직하고 무신경한 스타일이었고, 거짓말을 할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직감했다. 정이씨에게 억울한 일이 생겼다! 인사팀에서 돌아온 정이씨를 조용히 불렀다.


"이정 연구원님, 근데 지금 인사팀 다녀오는 거죠? 혹시 수석님한테도 말씀드렸어요?"

“네. 아침에...왜요?”


머릿속에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 수석님은 정이씨가 자리를 비울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팀장님이 회의에서 돌아오는 시간도 대략 알고 있었다. 어쩌면 정이씨의 부정적인 면을 팀장님에게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이런 판을 짠 것일 수 있었다.


이걸 말해줄까 싶었지만, 내 앞가림도 잘 못하는 상황에서 나보다 나이가 많은 후배의 상황에 참견하는 것이 오지랖처럼 느껴져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그 대신, 나는 이수석을 더 많이 경계하게 되었다. 나 또한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이런 일을 당하는 건 아닐까? 아니 이미 당한 일이 있는 건가?


그러다 며칠 뒤, 팀장님이 출장으로 자리를 비운 날이었다. 이수석이 사람 좋은 미소를 하며 나와 보라 언니에게 다가왔다.

“다들, 점심 약속 있어요? 없으면 제가 오늘 푸짐하게 대접해드리고 싶은데, 같이 가시겠어요?"


그의 제안에 나, 보라 언니, 준호씨, 석현씨, 정이씨, 이수석 이렇게 6명이 점심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는 뭐든 다 사주겠다며, 한 고깃집에 데려갔다. 점심에 고깃집? 조금 의아하긴 했으나, 감사한 마음으로 먹기 시작했다. 그는 평소 머슴밥을 먹을 정도로 식사량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고기도 몇 번을 추가했고 어느새 우리 테이블에서 계산해야 하는 금액은 어느새 9만 원가량이 되었다.


그렇게 평화롭게 식사를 하는데, 갑자기 그가 곤란한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팀장님 너무 하시네...이거 밥값도 만만치 않은데...다들 지갑 가지고 오셨죠?"

"네...?"


알고 보니, 팀장님이 부재중인 틈을 타서 법인카드로 밥을 먹으려고 했는데, 팀장님이 법인카드 사용을 불허했다는 것이다.

"다들 지갑 가지고 왔죠?"

그의 태세 전환에 모두 약간 당황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N빵이라도 하면 되겠지 싶었다. 근데 계산할 시간이 되자 그는 갑자기 홀연 사라졌다.


'일단 내가 먼저 계산하고 나중에 N빵 하자고 하면 되겠지? 나도 돈 없는데...'


그렇게 N빵 할 마음으로 카드를 내밀었는데, 그 사이 후배님들이 "잘 먹었습니다." 하는 인사를 남기고 식당을 빠져나갔다. 허망했다. 저 후배들은 사실 나보다 나이도 3~4살이나 많은 녀석들인데...내 카드로 계산할 때 내 곁에 남아있었던 것은 내 동기 한 명뿐이었다.


“현수야, 근데 이수석 지금 도망간 거 아니야?”

“설마 그렇겠어?”

“왜 밥 먹고 갑자기 나간 다음에 안 들어와? 핸드폰 이런 거 다 가지고 나갔잖아.”

“몰라...근데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후배니까 내가 사주는 거라고 치고, 언니랑 나는 맨날 뭐 사주고 얻어먹고 그러니까 그렇다고 치고, 이수석님은 졸지에 내가 밥 사 주는 건가? 싫은데...N빵한 돈 달라고 하면 주겠지?”

“당연하지. 가서 달라고 하자.”


식당에서 사라진 그는 사무실에서 컴퓨터를 하고 있었다.

“이수석님, 식당에서 먹은 건 만 오천 원 정도 주시면 될 것 같아요.(솔직히 네가 사기로 했잖아.)”

“(엄청 큰 헛기침 소리) 음음음... 음”

“수석님?”

“(두 번째 헛기침) 음음.”


그는 나의 말에 어떤 대답도 하지 않고, 헛기침을 하며 음음 거렸다. 보다 못한 보라 언니가 내쪽으로 와서,

“만 오천 원 주면 되지? 여기 있어. 수석님도 현수한테 만 오천 원 주시면 돼요.”


하지만 보라 언니의 노력이 무색하게 그는 큰 헛기침 소리를 냈다. 그 뒤로도 억울한 마음에 그에게 몇 번 돈 달라는 말을 했지만 그때마다 그의 헛기침 소리는 점점 더 커져갔다. 그 큰 헛기침 소리에 주눅이 들어 결국 나는 그에게 밥을 사줬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뒤, 밸런타인데이가 가까워 올수록, 그는 초콜릿을 먹고 싶었는지 나를 재촉하기 위해 부릉거리며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김주임, 요즘 길거리에 초콜릿이 많더라고요? 밸런타인데이라나 뭐라나?”

"예.”

“으이그. 근데 궁금한 게 밸런타인데이가 여자가 남자한테 초콜릿 주는 날인가요?”

“(정말 몰라서 물어보는 건가?) 잘 모르겠네요.”

“김주임이 여자이기도 하고 또 제가 남자이기도 하니까 동료들 사이에서도 그렇게 초콜릿 주는 건가 해서요. 별 뜻은 없고요.”


초콜릿 달라는 소리인가? 만 오천 원 줄 생각은 없고 초콜릿은 먹고 싶은 건가? 소름이었다. 나는 애써 그를 무시했다. 하지만 사무실에서 마주칠 때마다 그는 내게 “좀 알아보셨어요~? 밸런타인데이가 여자가 받는 날인지 남자가 받는 날인지?”

“(그만 좀 해...) 행사 준비하느라고 그런 것 까지 할 상황은 아니라서요.”

“으이그. 아무래도 바쁘죠? 그래서 제가 알아봤는데 남자가 받는 날이긴 하더라고요. 들으셨어요? 남자가 받는 날이래요. 저도 남자고요.”


결국 그의 반복적인 압박을 이기지 못했던 나는, 그에게 페레로 로셰 세트를 건넸다. 그에게 받지 못한 만 오천 원, 그에게 가져다준 페레로 로셰, 그가 가져갔을지도 모르는 내 마카롱들을 생각하면서 부들거리고 있을 때, 우리팀은 오랜만에 회식을 하게 되었다.


신입직원과 이수석을 환영하는 회식이었는데, 그 회식을 가는 길에 있는 망고식스에서 행사를 하며 1+1 음료 쿠폰을 무료로 나눠주고 있었다. 6000원 정도 하는 음료를 사면 똑같은 음료를 공짜로 주는 그런 쿠폰! 이수석은 뛰어가서 그 쿠폰을 받아오더니 나를 보고 씩 웃었다.

"예전에 만 오천 원 달라고 했었죠? 거기서 6000원 정도는 이걸로 갈음하면 될 것 같네요.”

“네?”

“이게 음료를 하나 공짜로 주는 거라, 6000원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네요.”


네? 내 귀를 의심했다. 이게 진정 사람의 모습이란 말인가? 어차피 만 오천 원 받는 것을 포기하고 있었는데 이런 쿠폰이라도 생긴 걸 감사해야 하는 건가? 난 무언갈 포기한 것처럼 그 쿠폰을 받아 들었다. 안 그래도 회식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을 텐데, 여기서까지 감정을 소모할 수 없었다.


과연, 그 날의 회식은 노래방에서 트로트를 부르고 나서야 마무리되었고, 집으로 가려는 나를 이수석이 불러 세웠다.

“김주임!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다는 의미로 한 번 쿨하게 안아주세요!”

“네?”

“파이팅하자는 의미로 한 번!”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나를 안아주었다. 그 순간 그의 입에서 나던 커피와 담배냄새... 키보드와 어깨에 떨어져 있던 비듬... 지금 내 몸과 맞닿은 불룩한 배... 모든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고 난 얼음처럼 굳었다. 지금 생각해도 왜 그가 갑자기 안았는지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이것이 매우 불쾌한 기억이라는 것이다.


내 불쾌함이 채 가시기 전에 그는 정이씨에게 향했다. 근데, 정이씨와는 포옹을 하지 않고 주먹치기 인사를...했다? 왜 나는 포옹이고 남자인 정이씨랑은 주먹 치기 인사를...? 하...



<지금 생각해보면>


"저만 믿으세요."


사실, 누가 나한테 저런 말을 한다면 고마워야 하지만, 제대로 된 사람들은 저런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 저 말이 주는 무게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저 말이 책임져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 알고 있는 사람들은 저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


보통, 그것도 회사에서 저런 말들을 함부로 남발하는 사람들은, 정말 믿어서는 안 될 사람인 경우가 많다. 회사에서 만난 사람들이 내게 하는 말을 100% 걸러들을 필요는 없지만, 언제나 어느 정도의 필터를 가동하고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 불필요하게 누군가를 믿었다가 속상해지는 일도 줄어들고, 스스로 행동에 선을 지키며 지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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