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4개월] 2년 차 시작
(해당 브런치북은, 공공기관을 다녔던 여러 개인의 이야기를 종합하여 각색한 1인칭 시점 기반 소설로, 실제 특정 기관 및 단체, 개인과 전혀 무관합니다.)
입사 후 1년이 흘렀고, 그동안 불신과 경계가 생활화되는 등 나에게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리고 팀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송선임, 정책임, 또 다른 선배 한 명이 육아휴직을 하게 된 것이다. 물론 대외적인 명분은 육아휴직이지만, 사실 그들은 자주 고함을 내지르는 팀장님과 갈등을 겪고 있었고, 그러다가 업무 평가 결과가 나오면서 갈등이 폭발했다. 결국, 그들은 비슷한 시기에 육아휴직을 신청했다.
평가 시기엔 우리 팀뿐 아니라 회사 전체가 시끄러웠다. 공공기관에서는 정해진 급여만 받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평가 결과에 따라 연봉이 다르게 책정되었다. 심지어는 결과에 따라 연봉이 낮아지는 경우도 많아서, 모두 평가에 예민했다. 나 또한 평가 결과가 좋지 않아서 2년 차 때 연봉이 더 낮아졌는데, 그때 나 또한 회사를 떠나고 싶긴 했다.
‘현수는 아직 어려서 돈을 모을 시간이 더 많잖아.’, ‘현수는 아직 결혼 계획이 없으니까 돈 급하진 않잖아.’라는 평가 면담을 통해 받은 결과를 어떻게 수긍할 수 있겠는가.
어쨌든 몇 명이 팀을 떠나게 되면서, 새로운 직원 네 명이 팀에 들어오게 되었다. 세 명은 신입직원으로 얼마간 교육을 받은 후 팀에 합류할 예정이었고, 한 명은 다른 팀에서 근무하고 있었던 선배(심지어 팀장보다 입사가 빠른)였다.
그 선배의 이름은 이정필. 나이는 나보다 25살 정도 많았다. 내가 1년 동안 혼자 담당하고 있었던 사업을 함께 담당하며 내 사수가 될 예정이었다. (입사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1년 동안은 혼자 담당하다, 이제 내용 파악하니까 갑자기 내용을 모르는 사수가 생기는 건 좀 아이러니했다.)
그의 꿈은 원래 교수가 되는 것이었는데, 안타깝게도 그는 꿈을 이룰 수 없었다. 왜냐하면, 박사 학위를 따는 동안 그가 선택한 전공 분야가 학문적으로 거의 사장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본인의 능력은 출중하나 전공 분야를 잘못 택해서, 그러니까 결국 운이 없어서 교수가 되지 못한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나는 그런 류의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저런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보상 심리와 피해 의식에 사로잡히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는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지만 인상이 좋지는 않았다. 마른 체형임에도 배만 불뚝하게 나온 그는, 어깨에는 비듬이 잔뜩 떨어져 있었고(심지어 그의 컴퓨터 키보드에도), 담배와 커피를 달고 살아서인지 입에선 현기증이 날 정도의 쩐내가 났다. 그리고 그 담배와 커피 때문인지 낯빛이 매우 칙칙했다. 또 다른 특이한 점은, 고향이 서울인데 가끔씩 어색게 각종 사투리를 쓴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사투리 가릴 것이 없이 갑자기... 난, 서울에서만 살아서 정확하게 사투리를 구분해내진 못했지만 그냥 듣기에도 뭔가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김주임, 잘 부탁해유. 현수주임, 여태껏 힘든 일 많았다던데, 얘기 좀 할까요? 회의실에서?”
그렇게 회의실로 들어가자마자 그는 본인을 믿어야 한다고 했다.
“현수주임, 정말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믿어도 됩니다. 저는 욕심도 없고, 이제 역량 키우는 주니어들 잘 가르쳐서 팀장님, 본부장님 앞에서 돋보이게 하고 싶어요.”
갑자기? 이 사람은 뭐지? 근데 자기를 믿으라고 하는 사람 치고 믿을 사람 없던데?
“이 팀, 별일 다 있잖아유~ 안 그렇노? 팀장님도 유별나고, 싸움도 많고, 작년엔 정민경인가 하는 분도 있었고...이젠 제가 왔으니 중심 제대로 잡고, 현수주임 고생 안 하게, 회사생활 행복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예...감사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까지 힘들었던 이야기들을 들어주고 싶다면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근데, 그 정민경이라는 사람이 그러고 있을 때 이 팀은 어떤 분위기였어요?”, “팀장님 업무 스타일이 어때요? 꼼꼼한가요?”, “본부장님이랑 팀장님 사이가 안 좋다던데...”, “실제로 권책임이 본부장님 꽉 잡고 있다던데...”, “팀원끼리 싸운 적은 있어요? 누가 사이가 안 좋아요?”
내 귀에 그의 질문들은 사내정치를 위한 초석 다지기 같았다. 불편함에 대답을 피하려고 해도, “으이그. 아직 제가 못 미더우시구나. 정말 전 믿으셔도 괜찮아요.”라는 말로 응수했다.
이수석이 믿으라는 말을 많이 할수록, 점점 더 그를 믿기 힘들어졌다. 그가 내게서 정보를 캐내고 있다는 캐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생각보다 원하는 정보를 공유해주지 않는 나에게 당근을 들이밀고 싶었는지, 그는 갑자기 고구려 호텔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으이그. 현수 주임 혹시 고구려 호텔 어때요?”
“고구려 호텔? 왜요?”
“찾아보니까 고구려 호텔에 2박 3일로 교육이 있던데 (종이를 들이밀며) 신청하는 거 어때요?”
“(종이를 확인하며) 아, 감사한데 내용이 저랑 관련이 없고, 있더라도 2박 3일 일정은 무리인 것 같아요. 팀장님도 허락 안 하실 거고요.”
“으이그. 제가 이 정도는 보내드릴 수 있어요! 팀장님 무서워서 그래요?”
“아니요. 아무튼 감사한데 괜찮아요.”
“으이그. 사실, 현수주임 너무 고생 많았잖아요. 고구려 호텔에서 편한~ 마음으로 2박 3일 쉬었으면 해서 그래요. 교육을 들으라는 게 아니라 그냥 쉬라는 말입니다~”
“너무 바쁘기도 하고, 진짜 괜찮습니다.”
당시의 내가 봤을 때 저 교육을 가고 싶어 하는 것 자체가 욕먹을 짓이었다. 근데 자꾸 내가 고생한 걸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서 참을 수 없다며 날 기어코 고구려 호텔에 보내주겠다는 것이다. 팀장님에게 말이라도 꺼내보겠다는 간절한 부탁에, 나는 “네.”라고 하고 말았다.
그렇게 회의실을 빠져나와서 이수석은 팀 쪽으로 향했고 나는 화장실로 향했다. 그렇게 화장실에 갈 예정이었으나 회의실에 들어갈 때 핸드폰을 두고 가서, 핸드폰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급 방향을 돌려서 팀 쪽으로 갔다. 내가 왔을 때, 이수석은 팀장님과 함께 대화중이었다.
“팀장님, 혹시 현수주임 잠깐 교육 다녀와도 될까요?”
“무슨 교육이요?”
“내용은 좀 그런데...현수주임 아무래도 고생하고 그래서 그런지 좀 쉬고 싶은 건지 이런 걸 프린트해가지고 왔더라고요. 고구려 호텔에서...”
“이건...현수랑 아무 상관이 없는 교육인데 이런 걸 간다고 했다고요? 현수가?”
“으이그. 팀장님 흥분하지 마시고...현수주임 없는 동안엔 제가 잘할게유.”
이게 뭐지? 회의실에서 말했던 내용과 전혀 다른 내용인 것 같은데? 그리고 그놈의 ‘으이그’는 좀 그만 할 수 없나? 당황했지만, 오해를 풀고 싶다는 생각에 팀장님 자리로 향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그 자리에 가면, 없는 말을 지어내고 있는 이수석이 당황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수주임, 계속 부탁했던 그 교육 보고하고 있었어요.”
내가 부탁했다고? 그것도 계속? 너무 당황해서 진짜 내가 부탁한 적이 있었는지 착각하게 될 정도였다.
“현수, 안 그러던 사람이 왜 그래? 이수석님 와서 마음이 편해진 거야? 교육 내용 현수랑 안 맞잖아. 이건 그냥 쉬겠단 소리잖아.”
“팀장님...그게 아니라...”
“으이그. 팀장님, 제가 잘 타이를게요. 너무 그러지 마세요.”
“수석님도 현수 그렇게 싸고돌지 마시고, 자를 건 자르세요.”
“네! 으이그. 알겠습니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김주임 놀라겠어요. 제가 괜히 일을 이렇게 만들었네요. 제가 일은 얼마든지 대신할 수 있으니까 보내고 싶었는데...”
졸지에 나는 고생했다고 생색내며 호텔에 가겠다고 땡깡 부리는 사람이 되었고, 이수석은 그런 나를 위해 대신 열심히 일하려고 했던 선배가 되었다. 매우 찝찝하게 대화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왔다.
“괜히 미안하네요. 마음 들떴을 텐데.”
“처음부터 교육 안 간다고 했는데, 왜 팀장님께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으이그. 팀장님 말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뭐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리고 현수주임 떳떳한 거 제가 알면 되는 거 아닌가유?”
이수석을 만난 지 하루 만에, 그의 으이그, 어색한 사투리(내가 사투리를 잘 몰라서 대부분 표준어로 작성하긴 했는데, 그는 정말 불시에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사투리를 섞어서 내뱉었다.), 능구렁이 같은 웃음에 질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다음 날, 그는 지금까지의 사업 현황, 실적, 계획, 성과, 개선점 등등을 자료로 정리해달라고 했다. 나도 불과 1년 전 이 사업을 맡게 됐지만 어쨌든 그보다는 내가 더 많이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가 이 사업을 이해할 수 있도록 나름 열심히 자료를 만들었다. 자료를 프린트해서 전달해주자, 이수석은 메일로도 하나 공유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래서 나는 아무 의심 없이 (아니, 당연히 의심할 부분이 없었기에) 그에게 메일로 그 파일을 전송했는데, 불과 몇 분 뒤 그는 그 파일을 팀 전체와 본부장님에게 메일로 공유했다.
‘안녕하세요? 이정필 수석입니다. 따뜻한 환영 감사드리고, 제가 맡게 된 사업에 대한 현황 파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자료를 조금 정리하였습니다. 해당 내용 공유드리오니, 앞으로의 사업 진행에 있어서 고견을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파일을 인쇄해서 팀장님에게 가져갔다.
“팀장님, 부끄럽지만 자료 보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 본부장님께도 메일 드리기는 했습니다.”
“지금 메일 보고 있어요. 언제 이런 걸 하셨어요? 본부장님께도 잘 보내드린 것 같네요. 고생하셨네요.”
그는 내가 있어도 전혀 거리낌 없이 본인이 자료를 작성한 듯 행동했다.
내가 몇 시간 동안 작성한 자료를 훔쳐가다니!
“김주임, 아까 자료 잘 받았고, 조금 수정해서 공유했으니 앞으로 저만 믿고 따라오세요.”
“수석님, 근데 어디 수정하셨어요? 아무리 봐도 달라진 건 없는데...”
“으이그. 파일에 작성자 이름을 안 썼더라고요. 그래서 작성자 적었죠.”
“그럼 작성자에 수석님 이름 넣은 걸 수정이라고 하신 거예요?”
“으이그. 제가 뭐 훔쳐갈까 봐요? 그리고 제가 선배니까 제 이름 적는 게 나아요. 현수주임이 복잡한 일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가 않아요. 진짜 지금처럼 제가 묵묵히 뒤에서 서포트할 테니까, 다른 건 신경 쓰지 마셔유~”
이런 식의 서포트를 몇 번 더 당했다간 어딘가로 밀려나고 말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그는 몇 번 더 자료를 요구했고, 내가 작성한 자료는 여지없이 이정필 수석이 작성한 것으로 여기저기 퍼져나가고 있었다.
근데 그가 온 뒤로 도둑맞는 건 자료가 끝이 아니었다.
사실, C 부처에 파견을 갔던 세호 오빠가, 그곳에서 온통 기가 빨리고 왔는지 시름시름 앓더니, 퇴사를 한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어, 오빠.”
“어디야? 나 퇴사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인사하러 왔는데.”
“나 출장이야. 퇴사해도 앞으로 따로 만나자.”
“그래야지. 자리에 선물 두고 갈게.”
“뭔데?”
“마카롱. 이거 비싸다. 몇 명한테만 주고 가니까 다른 애들한테 말하지 말고.”
세호 오빠는 전화를 끊고, 내 책상 위에 올려 둔 마카롱 세트 인증샷을 보내줬다. 그 사진을 보고, 출근하면 마카롱 먹을 생각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근데 막상 출근해서 보니 선물 포장지의 테이프를 뜯었다가 재봉합한 흔적이 역력한 것 아닌가! 심지어 세트에 8개가 들어가 있어야 하는 마카롱은 3개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보라 언니, 혹시 이거 누가 이랬는지 알아?”
“어? 이거 왜 이래? 오빠가 두고 갈 때만 해도 멀쩡했는데?”
마카롱 자체에 대한 집착이라기보다, 도대체 누가 포장까지 되어 있는 세트를 뜯은 후에 마카롱을 5개나 빼먹고 다시 어설프게 테이프를 붙여놨는지 알고 싶었다. 사원증이 없으면 출입할 수도 없는 이 사무실에서 도대체 누가 내가 받은 선물을 뜯어먹었을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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