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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오빠? 응. 아니야_(1)

[16개월] 약 사이다

by 하이히니

행사가 잘 끝나고, 나에게는 잠깐 평화의 시간이 주어졌다. 내가 맡은 사업에서는 당분간 내가 총괄하는 행사는 열리지 않았고, 몇 달 뒤 열릴 큰 행사 총괄을 이수석이 맡기로 되어 있었다. 그렇게 한숨 돌리고 있는데, 어딘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뭔가 익숙한 번호로 전화가 왔다. 한동안 많이 봤던 전화번호였는데 어딘지는 잘 모르겠는 그런 곳에서? 찝찝한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네, 김현수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저 "A"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정우진 선임이라고 합니다."


"A" 공공기관? 혹시 기억하는가? 내가 지금 일하는 "B" 공공기관에 입사하기 전에 잠시 인턴을 했던 A 기관을? 그곳에서 나는 바나나 언니도 만났고, 권성배라는 사람에게 성희롱을 당하기도 했었고, 성희롱을 신고한 일로 권성배의 동료들에게 조롱을 당하기도 했었다.


사실, 일하면서 "A" 기관의 이름을 들은 적이 몇 번있어서, 언제고 이런 날이 올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이렇게 전화를 받자, 그것도 나를 조롱했던 권성배의 동료 중 한 명인 정우진에게 전화를 받자 기분이 묘했다. 나쁘게 헤어진 전 남자친구랑 갑자기 통화를 하게 된 것 같기도 했고, 뭔가 불편했다.


반면, 정우진 선임은 내가 누군지 잘 기억을 못 하는 건지, 호탕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어우. 바쁘시죠? 다름이 아니고 얼마 전에 B기관에서 한 행사가 굉장히 좋았다고 하더라고요. 저희도 얼마 있다가 비슷한 행사를 하는데, 좀 참고하고 싶어서 염치 불고하고 전화드렸습니다. 저희 담당 부처 사무관들이 그 행사 가서 사진도 찍어왔더라고요. 사진만 봐서는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잘 모르니까...사용한 콘텐츠라든지 계획안 같은 것들 혹시 좀 공유해주실 수 있나 해서...(어쩌구 저쩌구 어쩌구 저쩌구...)."

"아..."

"이런 부탁드리려면 식사도 하고 해야 되는 건데, 혹시 이번 주 중에 간단하게 회의하고 식사라도 하실 수 있을까요? 모여서 같이 안면도 트고 협조도 하고 그러면 좋을 것 같아서...(어쩌구 저쩌구...)"


그의 예의 바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가 그때 그 인턴 김현수라는 것을 말해주면 어떻게 반응할까 궁금했다. 혹시나 예전 일을 사과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제는 다른 기관에서 동등한 입장으로 일하고 있는 사람이니, 조금은 조심하지 않을까? 그런 약간의 기대로, 나는 내가 그 인턴 김현수임을 밝혔다.


"선임님, 저 혹시 기억 안 나세요?"

"네?"

"선임님, 예전에 제가 그쪽에서 인턴 했었는데..."

"잠깐, 김현수?...김현수...아! 너였어?"

"예. 잘 지내셨어요?"

"아, 나 또 긴장했네. 오빠 목소리 괜히 깔았다. 현수야. 어? 오빠인 거 알아봤으면 바로 말을 해줬어야지. 오빠 섭섭하다. 어?"

"네?"

"아니, 우리가 모르던 사이도 아니고 말이야. 바로 오빠 현수예요~ 했어야지. 아 자료 좀 공유하자 좀."


잠깐의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다. 내가 그 인턴 김현수라는 것을 밝히자 그의 태도는 180도 변했다. 같이 일하면서 내가 그에게 오빠라고 불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그는 본인 스스로를 '오빠'라고 칭했다.


"선임님...근데 제가 언제 선임님한테 오빠라고 한 적 있었나요?"

"어?"

"제가 그 김현수인 거 알게 되니까 태도가 많이 다르시네요."

"아...그렇지...그래도 오빤데~어? 그때 우리 사이 정이 있지."

"(오빠라고? 응. 아니야. 정이 있다고? 응. 아니야.) 그냥 전화 끊을게요."

"(다급하게) 잠깐! 잠깐! 그 행사 네가 실무 총괄한 거 맞아? 너 위에 누구 없어?"

"네. 없어요. 그럼 이만 끊을게요."

"잠깐잠깐! 미안해요. 미안해. 아니 난 반가워서 그랬지. 미안해요. 근데 자료 좀 부탁할게요. 다 주기 어려우면 기본적인 거라도 좀...우리 사무관들이 그 행사 좋았다고 계속 그래서...응? 좀 부탁할게요."


그는 완전히 내게 반말을 하기도 좀 그렇고, 그렇다고 존댓말을 하는 것도 좀 그런지 반존대를 하며 내게 자료 송부를 부탁했다.


"헛소리 한 건 진짜 미안해. 응? 제발?"

"...흠...제가 보고, 보낼만한 것들 있으면 보내드릴게요. 없으면 어쩔 수 없고요."

"어...고마워요. 아...근데 혹시 다음 주에 있는 사업설명회 가?"

"다음 주 수요일에 있는 그 사업설명회요? 왜요?"

"그거...우리 기관에서는 성배가 가거든. 보기 불편할 텐데 알고 있으라고...그리고 현수 주임, 예전에는 미안했어. 어쨌든 성배랑 친하게 지내다 보니까 그때는 성배 편을 들어주고 싶기도 하고 상황을 잘 몰랐었는데... 미안하고, 자료는 잘 좀 부탁할게."


정우진 선임이 초장부터 '오빠' 소리를 해대서, 그에게 정말 사과를 받을 수 있을거란 생각은 못했었다. 엎드려 절 받는 꼴이기는 해도 그에게서 미안했다는 소리를 들으니까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자료는 잘 좀 부탁할게.'에서 눈물이 쏙 들어가기는 했지만. (줄만한 자료들은 있었지만 그에게 자료를 공유하진 않았다.)


그나저나, 다음 주 수요일에 있는 사업설명회에 권성배가 온다고? 권성배를 마주친다는 생각을 하니 심장이 쿵쾅거렸다. 근데, 난 이제 더 이상 권성배 주임이 있는 팀의 인턴도 아니고, 그때보다는 조금 더 성숙하고 조금 더 강해졌다.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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