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9개월] 두 얼굴의 유지비용
내가 권책임과 특별한 관계라는 소문. 그 소문이 전사에 퍼지기 전에 이수석에게 따져볼까 생각도 했지만, 나는 그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 일을 더 적합한 인물은, 함께 소문의 주인공이 된 권책임이었다. 예전에도 말했지만, 그는 일도 잘하고 정치적이어서 모든 상황에서 가장 최고의 이익을 취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이이제이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권책임님, 혹시 그 소문 들었어요?”
“뭐?”
“권책임님이랑 저랑 불륜이라고.”
“뭐? 누가 그래?”
“이수석님이 그렇게 말한대요. 둘이 맨날 같이 야근하고 술 마시고, 주말 같이 보낸다고.”
“아니, 야근 같이 하고 싶어서 하나?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권책임은 이 이야기를 처음 듣는지, 꽤나 흥분한 눈치였다. 늘 큰 감정 동요를 보이지 않는 그가 이수석을 욕하고, 흥분하는 것을 보고 나도 좀 놀라웠다. 그 뒤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나는 권책임에게 이야기를 전달한 것뿐인데, 어느 순간 이수석은 팀장님은 물론 모두에게 고문관 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물론 이수석이 이상한 건 사실이지만, 권책임이 어떤 수로 모두가 이수석에게 반감을 갖게 만들었는지 신기했다. 곧 귀신처럼, 이상한 소문도 사라졌다.
그렇게 얼마 뒤, 이수석은 팀에서 진행 중인 거의 모든 실무에서 제외되고 갑자기, 부팀장이 되었다. 부팀장은, 팀 내의 모든 사업과 관련한 보고자료, 예산 등 주요 자료를 작성하고 담당하는 사람이었다. 팀장님이 없을 때는 팀장 대행으로 각종 회의에 참여하고 의사 결정을 하기도 했다.
부팀장이라는 공식 직책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팀 내에 컨트롤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서 이걸 일종의 권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게다가, 보통 자신의 고유 업무와 부팀장 업무를 겸하기 때문에 업무가 많아서 부팀장을 하는 사람은 다들 평가를 잘 받았다.
(팀장님과 부팀장이 사이까지 좋은 경우에는, 부팀장에게 외부 업무용으로 '팀장 명함'을 파도록 허락해주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 팀의 부팀장은 쭉 권책임이었는데, 이게 도대체 어떤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이수석은 부팀장 안장을 달고 또다시 기고만장해졌다.
“팀장님이 저를 이렇게 믿어주시니 어깨가 무겁습니다.”
“제가 이 정도 해드릴 힘은 있습니다.”
"와이프한테 이제 좀 면이 서겠네요."
와 같은 말을 습관적으로 내뱉었다. (솔직히 뭔가 중요한 일을 맡을 때마다 약사인 아내와 박사과정 시절 이야기를 많이 해서, 뭔가 컴플렉스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실제로 담당하는 사업은 하나도 없이 부팀장 업무만 하면서 좋은 평가를 받을 이수석을 상상해보면 피가 거꾸로 솟았다.
하지만, 이 문제는 정말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금방 해결된다. 그는 부팀장 업무만 수행하는 것도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담당하던 사업 업무를 제대로 못할 때보다, 부팀장 업무를 제대로 못할 때 그 파급효과가 훨씬 컸다. 팀장님도 ‘이수석님이 이 정도로 심각한 줄은 몰랐는데.’라고 불만을 표출했고, 나머지 팀원들도 이수석에 대한 불만이 점점 더 커졌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 이수석은 칼퇴했고 나도 퇴근을 하려고 준비하던 중이었다. 퇴근 시간이 지나 받지 않으려던 전화 벨소리가 유독 신경 쓰여서 전화를 받았다.
“네, 안녕하세요. 김현수입니다.”
“(분노의 깊은 한숨...)”
그 한숨 소리를 듣자마자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기획조정실 주선임이었다. 그는 일을 잘하기로 유명한 남자직원이었는데, 일은 진짜 잘했지만 성격은 좀 무서웠다. 성격 더러운 사람이 일을 끝장나게 잘하면 얼마나 무서운 줄 아는가? 그와 함께 일하는 후배들은 누구나 몇 번씩 그의 앞에서 혹은 그의 뒤에서 울었다. 심지어 그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 후배들도 그와 함께 일을 시작하면 눈물을 줄줄 흘렸다. 나도 주선임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몸이 굳었다.
“김현수. 이수석 어딨어?”
“퇴근하셨어요. 무슨 일 있으세요?...”
“너네 팀 신청 자료 안 내냐?”
주선임이 말하는 저 자료. 어렴풋이, 팀 회의 때 팀장님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수석님, 이거 중요한 거니까 기한 맞춰서 제출하시고...’ 그 자료는 우리 팀에게도 기관 자체에도 매우 중요한 자료였다. 근데 이수석이 제출을 안 했다고? 주선임은 매우 격앙된 듯 보였다.
“야, 이수석이 작성 안 하고 포기한단다. 미친. 이거 보낸 시간 보니까 예약 전송인 것 같은데?”
“(왜 나한테 그래...) 죄송합니다. 일단 제가 확인하고 다시 연락 바로 드릴게요.”
“5분. 그 안에 전화해라. 하...”
식은땀이 줄줄 났다. 이수석에게 전화를 해봤지만, 이런 일들을 예견하고 있었는지 전화기가 꺼져있었다. 다분히 의도적인 듯했다. 어쩔 수 없이 팀장님에게 전화를 했지만, 팀장님도 별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 같다.
“현수...미안해. 이거 현수가 작성할 수 있을 것 같은데...작성하고 같이 확인하고 보내자.”
왜 하필 그 전화를 받았을까, 이런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5분 내에 주선임에게 전화로 상황을 전달해야 된다!
“선임님, 저 김현수입니다. 제가 지금 작성해서 최대한 빨리 보내겠습니다.”
“빨리 보내라. 그거 늦으면 내 퇴근 더 늦어지는 거 알지.”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을 끝으로, 잠시 정적이 흘렀다.
“김현수, 미안하다. 아무튼 너한테 화낼 일은 아닌데...이수석이 훨씬 선배다 보니까 나도 편하게 말하긴 어렵고...그냥 받는 사람이 너라서 화낸 것 같다. 아무튼 부탁할게.”
그래. 솔직히 주선임이 무슨 죄가 있겠어. 젊은 나이에 일 잘하는 기조실 끌려가서 죄로 저 고생을 하고 있는데...최선을 다해서 작성해서 빨리 주자! 생각했지만, 결국 늦은 시간까지 자료를 작성하고 (내 돈으로) 택시를 타고 퇴근했다. 야근 신청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 덜 억울했을까?
하지만 야근을 신청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당시 팀 내에 야근 시간이 많으면 팀장 평가에 영향이 있었다. 그래서, 야근 신청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랬기 때문에 야근을 해도 수당이 없는 건 물론 내돈내산 밥을 먹으며 일했다.
그렇게 다음날, 피곤한 몸을 이끌고 회사에 왔는데, 아직 출근 시간이 되기도 전인데 뭔가 팀의 분위기가 무거웠다. 정확한 원인은 모르지만 사람들이 말도 잘 안 하고, 어색한?
그때, 갑자기 팀장님이 나를 회의실로 불렀다.
“혹시 앞으로 현수가 부팀장... 할 수 있을까?”
“제가요?”
“어. 혹시 아침에 못 봤어? 이수석이랑 나랑 싸우는 거?”
“네? 싸웠다고요?”
“어제 이수석이 자료 작성 안 하고 그냥 퇴근했잖아. 그래도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오늘 갑자기 야근 신청을 하더라고. 어제 열한 시까지 자료 작성했다고. 결재 안 하고 반려했지. 근데 그게 그렇게 싫었나 보더라고.”
“자료요? 어제 제가 작성했잖아요?”
“그래. 근데 자기 말로는, 집에서 11시까지 작성을 하고 있었는데, 김현수 주임이 갑자기 멋대로 작성해서 보내버렸다는 거지. 김현수 때문에 자기가 작성한 자료가 쓸모없어지긴 했지만, 일을 하긴 했으니까 야근 인정하라고 하네? 안 된다고 하니까 표정 싹 변하더니 소리 지르고, 고용노동부에 신고하겠다는데? 책상에 종이도 던지더라.”
대단하다. 얼마 전까지는 팀장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렇게 가면을 쓰고 다니다가 조금 수틀리니까 이렇게 스스로 자기 가면을 벗어던지다 못해 부셔버리다니?
“아무튼, 현수. 내 생각에 현수가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제발. 응?”
“팀장님...근데 저도 너무 힘들어요...”
나는 왜 그랬는지, 팀장님 앞에서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때까지의 모든 것이 폭발했는지 다 싫다면서 엉엉 울었다.
“(오열하며 끅끅대면서) 팀장님, 전 진짜 우리 팀 사람들 다 쓰레기라고 생각해요. 선배 같은 사람도 없고, 이 사람들이 있는 팀에서 부팀장하기 싫어요. 저한테 시키지 마세요. 제 성격 아시잖아요...제가 이 팀에서 부팀장 맡으면... 일 열심히 하려고 엄청 고생할텐데...전 진짜 싫어요.”
나도 팀장님 앞에서 저 정도로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게 될 줄은 몰랐다. 근데 정말 보라 언니나 몇 명을 제외하고는 일하는 사람도 없고, 나도 지쳤던 것 같다. 이렇게 우는데 더 강요하진 않겠지 싶었다. 하지만, 반전이 있었으니...
갑자기 팀장님이 내 앞에서 울기 시작했다.
“(눈물 뚝뚝 흘리며) 무슨 마음인지 알어...근데...나도 정말 살고 싶어. 제발...부탁할게.”
그때 알았다. 후배가 울면 선배도 당황하지만, 선배가 울면 후배는 진짜 정말로 당황스럽다는 것을. 그건 내가 본 선배의(그것도 팀장의) 첫 번째 눈물이었다. 심지어 팀장님이 황정민 배우를 너무 많이 닮아서 그런지,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도 들었다. 너무 당황스럽기도 하고, 팀장이 내 앞에서 눈물까지 보이는데 내가 뭔가 좀 더 해봐야겠다는 미친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부팀장을 하기로 했다.
그 날, 팀 점심에서 팀장님은,
“수석님이 고생해주셨지만 어려움을 느끼셔서 이제부터 현수가 부팀장을 하게 되었어요. 나이는 어리지만, 업무 능력도 좋고, 본부장님도 굉장히 기뻐하세요.”
몇 명은 박수도 쳐주고 좋아했다. 그러나, 그 날 점심을 마치고 회사로 복귀하는 길에 이수석은 슬그머니 내게 다가와서 귓속말하듯 속삭였다.
“아주 대단하시네요? 이깟 일 뭐 대단하다고. 승리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몇 주 정도 팀원들과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회사 온 동네방네 ‘부팀장 업무를 하면서 권력이 커지자 팀장이 견제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김현수에게 부팀장을 시킨다.’는 말을 하고 다녔다. 문득, 그가 우리 팀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원래 있었던 팀을 욕했던 것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 팀도 피해자였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어때?”
“어, 권책임님.”
“생각보다 빠르네.”
“뭐가요?”
“이수석 붕괴 속도?”
“네?”
“봐. 바로 혼자 자멸하지?”
“그럼 일부러 이렇게 만드신 거예요?”
“네가 이수석 일을 대신 다 하니까 사람들은 저 인간이 어느 정도로 무능한지 알 수가 없지. 저렇게 혼자 하는 일시키니까 자멸하잖아. 얼마 있다가 이 팀도 나가려고 할 걸? 저 사람 수순이야 저게. 근데 이번엔 생각보다 빨랐네.”
“이렇게 될 걸 아셨어요?”
“어. 당연하지. 근데 생각보다 좀 빠르긴 하네.”
생각보다, 권책임은 대단한 사람일 수도. 어쨌든, 난 이렇게 부팀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