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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회사에서, 손절의 역사_(2)

[17~19개월] 왜 내가 손절을 당하지?

by 하이히니

나와 탁구 연습을 했던 반지 언니는 나와 가장 친한 동기였지만, 줄곧 다른 층에서 근무를 해서 그런지 의외로 친한 사람이 많이 겹치진 않았다. 언니는 워낙 성격이 털털해서 그런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선배와도 격의 없이 지내는 경우가 있었는데, 언니와 같은 본부에서 근무하는 장석원 선임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가끔 보면 둘은 격투기를 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격한 장난을 치곤 했다. 내 입장에서 그건 좀 신기한 일이었다. 그는 나와 띠동갑 이상이었고, 늘 정장에 무테 안경을 착용했는데, 뭔가 좀 접근하기 어려운 사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언니, 근데 장선임님 좀 무섭진 않아? 성격 괜찮아?”

“어. 성격 엄청 좋아. 일도 열심히 하고. 의외로 엄청 섬세해.”


나는 장선임을 잘 알지는 못했지만, 나와 가장 친한 반지 언니가 좋은 사람이라고 했기 때문에, 나도 막연하게 장선임이 좋은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현수야, 장선임이랑 다 같이 영화 보러 갈래?”

“영화? 셋이?”

“어. 요즘 재미있는 영화도 많이 나왔고, 같이 가서 밥도 먹고 영화도 보고 오자.”


언니를 따라, 그렇게 셋이 영화를 보러 갔다. 그 날이 장선임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는 거의 첫 번째 날이었는데, 영화 보기 전 저녁 먹기까지는 분위기가 괜찮았다. 근데, 영화관에 들어가서부터 약간 불편한 상황이 생겨 버렸다. 장선임이 무조건 본인이 가운데 앉아서 영화를 보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난, 장선임 옆에서 영화를 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원한 자리 배치는, [나 - 반지 언니 – 장선임]이었다. 장선임 옆에서 영화를 본다고 생각하니 불편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 상황에서 무조건 반지언니 옆에 앉겠다고 우기기도 애매했다.


그렇게, 우리는 [나 – 장선임 – 반지 언니] 이렇게 앉아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영화가 무서운 스릴러 종류 같은 것은 아니었지만, 중간에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장면이 있었다. 그 장면들도 보통 사람들이 봤을 때는 별 문제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나는 심담 허겁증이라는 병을 진단받은 적이 있을 정도로 쫄보였다. 그래서인지, 큰 소리는 아니더라도 “헉!”, “악!”과 같은 정체불명의 (크지 않은) 소리를 내며 혼자 놀라고 있었다.


근데 그때, 영화보다 더 ‘헉’ 소리 나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

“(귓속말로) 무서워?”


갑자기 장선임이 내 쪽으로 몸을 기대더니 내 귀에 “무서워?”라고 속삭였다. 영화관처럼 어두운 공간에서, 너무나 가까이 온 장선임 때문에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는 또다시 내 귀에 속삭였다.

“내가 손잡아 줄게. 너, 손 부드럽다.”


응? 손을 잡아 준다고? 부드럽다고? 심지어 그는 내 손에 '깍지'를 꼈다. 낯선 남자와 손에 깍지를 끼는 상황 자체도 너무 오랜만이고, 갑자기 잘 알지도 못하는 장선임이 손에 깍지를 껴서 그런지 불편함에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뭐지 이게? 그는 손에 힘을 꽉 줬고, 점점 당황스러웠다. 결국 내 딴에 가장 자연스럽게 손을 빼서 음료를 먹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상황이 정리될 줄 알았는데, 그건 오산이었다.


“(귓속말로) 왜 빼?”

“네?”

“왜 손을 빼냐고. 영화 보는 거 무섭잖아.”

“아...음료수 마시려고...”

“다 마셨지? 손.”


그는 내게 또 손을 내밀었다. 너무 당황스러워서 몸이 굳었다. 그가 내민 손 위에 내가 손을 포개어주지 않자, 그가 내 손을 가지고 또다시 손깍지를 꼈다. 와! 이게 뭐지?


‘왜 손을 잡지? 지금 우리 셋이 다 같이 손 잡고 있는 거지? 나랑 반지 언니보다 훨씬 어른이라서 우리를 걱정해주는 건가? 근데 너무 불편한데...손 빼면 호의를 거절하는 것 같으려나? 그래도 언니가 이 사람 괜찮은 사람이라고 했으니까 이상한 마음으로 손을 잡는 건 아니겠지?’


난 그 당시에 [나 – 장선임 – 반지 언니] 이렇게 3명이 모두 손을 일렬로 잡고 있다고 생각했다.


언니와 장선임은 친해서 이렇게 손잡고 영화 보는 것이 괜찮은 걸까? 둘은 어떤지 몰라도, 나는 여기에서 빼줬으면 싶었다. 손에 땀이 나서 손을 빼고 싶다는 제스처를 취해도 그는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거의 영화 내내 나와 그는 손깍지를 끼고 있었다.


솔직히 너무 불쾌한 경험이었지만, 반지 언니랑 장선임이 너무 친해 보여서 언니에게 그 날의 불쾌한 경험을 말하지 못했다. 언니는 장선임과 손을 잡고 영화 보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데, 나만 불편해한 것이면, 언니도 나를 유별나다고 생각하진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장선임은 나를 약간 불편하게 대하며 피하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나도 그를 자연스럽게 피하게 되었다. 그렇게 꽤 시간이 지났을 때, 반지 언니와 장선임은 업무 협업을 하다 그 계기로 사이가 악화되었다.


언니는 장선임을 욕하기 시작했고, 그제야 난 그때의 이야기를 꺼냈다.

“언니, 근데 나는 그 사람 원래 별로였어. 언니랑 친해서 말을 안 했지만.”

“너는 왜? 너한테도 뭐라고 했어?”

“아니, 우리 영화 보러 갔을 때도 계속 우리 손잡고 그랬잖아. 난 그것도 싫더라고.”

“뭐? 손을 잡아?”


손을 잡았다는 나의 말에, 언니의 표정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어. 우리 다 같이 손잡고 영화 봤었잖아. 기억 안 나?”

“아니, 난 그 새끼랑 손잡은 적 없는데. 네 손을 잡았어?”

“뭐? 우리 셋이 손잡고 있었던 게 아니라고?”

“자세히 얘기해봐.”

“아니, 내가 놀라니까 무섭냐면서 계속 손깍지 끼는 거야. 나는 계속 빼는데 또 끼고...”

“뭐? 미친 새끼. 결혼할 여자도 있었잖아.”


솔직히, 나는 그가 결혼할 여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전사에 청첩장을 다 돌렸지만, 결국 파혼해서 결혼을 하지 않았음) 나에게 찝쩍거린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난 당연히 그냥 단순히 어린 우리들이 걱정되어서 다 같이 손을 잡고 영화 보자고 하는 것인데 내가 불편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언니랑은 손을 안 잡고 있었고, 나한테만 그런 거라니!


“언니, 정말 그 인간이 내 손만 잡은 거야?”

“야...너 날 어떻게 생각한 거야? 난 그 새끼가 내 손 잡았으면 가만 안 있었지. 김현수 진짜 이 바보를 어떻게 해? 무슨 셋이 손을 잡고 있어. 코미디냐고!”


반지 언니는 내 이야기를 듣고 숨이 넘어갈 것처럼 웃어젖혔다. 난 진짜, 그 사람이 띠동갑 어른으로서 자기 딴엔 나와 언니를 신경 써주고 싶어서 손을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솔직히 손을 잡은 것 자체가 불편했던 것이지 나한테만 그랬을 거란 생각은 아예 안 하고 있어서 충격은 너무 컸다. 언니와 친하니까 당연히 좋은 사람일 거라고, 그리고 셋이 함께 영화를 보는 자리에서 나한테만 그러고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어쩐지 왠지 성희롱당하는 것처럼 찝찝하고 불편하더라니! 도대체 왜 나한테만 그런 걸까!


장선임과 영화 내내 손깍지를 끼고 있었던 것은 너무나도 수치스러운 기억이었고, 그 이야기가 나오기만 하면 반지 언니는 숨 넘어갈 것처럼 웃어댄다. 그리고 한 동안은 내가 보이기만 하면 길에서든 회사에서든 버스 정류장 앞에서든, 손을 높게 들어 올려 손깍지 퍼포먼스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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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지금 생각해보면>


이윤 선임과 장석원 선임을 보면서, 확실히 느낀 것이 두 가지 있다.

첫 번째, '저렇게 나이가 많은 남자가 나를 챙겨주는데, 이건 남자가 아니라 어른으로서 챙겨주는 걸 거야.'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 나보다 9살이 많든, 12살이 많든 필요 이상으로, 그리고 내가 불쾌할 정도로 다가오는 것은 호의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두 번째, 자기들이 찝쩍거려놓고서 반응이 자신들의 생각과 다르면 지들이 먼저 손절하고 멀어진다는 것.


이 중에,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첫 번째다. 내가 불쾌할 정도로 다가오는 남자 선배가 있다면, 그건 호의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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