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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회사에서, 손절의 역사_(1)

[17~19개월] 왜 나를 손절해요?

by 하이히니

내가 쓰는 회사일기에 사내연애, 사랑 얘기 같은 것은 거의 없다. 이직과 퇴사가 활발한 회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직장에서 누군가가 가볍게 접근해 오는 것, 혹은 내가 접근하는 것 모두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했고, 특별히 관심이 가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마, 그게 입사 직후였지?


동기들과 신입 직원 교육을 받고 있을 때, 일정의 마지막 밤은 ‘선배들과의 대화’ 시간이었다. 선배들에게 이런저런 노하우를 듣고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는 시간이라고 안내는 받았지만, 실제로 그 시간은 술 마시며 신입 직원이 재롱잔치를 부리는 자리였다. 우리보다 1년쯤 먼저 입사한 남자 선배 한 명이 나타나더니 사회자를 자처했고, 닥치는 대로 우리에게 춤과 노래를 시켰다. 파도타기로 술을 마셔야 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환멸 비슷한 것을 느끼고 있을 때, 누군가 내게 말을 걸었다.


“이런 자리, 힘들죠?”

그는 우리를 괴롭게 하는 사회자와 동기인 남자 선배였다.


“아...아니에요. 괜찮아요.”

“쟤가 저 정도는 아닌데, 분위기 띄워야 된다는 압박이 있나 봐요. 힘들면 잠깐 나갔다 와요.”

“아닙니다. 다들 있는데 저도 있어야죠.”

“이름이 뭐예요?”

“아! 김현수입니다.”

“저는 이윤이예요. 궁금한 거 생기면 편하게 다 물어봐요.”

“네, 감사합니다.”


이윤 선임은 말수가 적긴 했지만, 우리에게 노래를 시켜대는 사회자에 비해 훨씬 더 좋은 선배 같았다. 인상 자체는 약간 차가운 느낌이었고, 목소리가 낮고 키도 커서 느낌 자체로는 인기가 꽤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날 밤 우리가 나눴던 대화는 그게 다였다.


얼마 뒤, 정식으로 팀에 배정을 받고 처음으로 사내 메일 시스템에 접속을 해보는데, 이게 뭐지?


‘제목 : 하이루’


뜬금없이, ‘하이루’라는 제목의 메일이 와 있었다. 누가 회사에서 하이루가 제목인 메일을 보내지? 보낸 사람의 이름은 ‘이윤’? 그 점잖던 사람이 갑자기 하이루? 나는 약간 얼떨떨한 마음으로 메일을 클릭했다.


제목 : 하이루

하이루! 좋은 아침! 자리는 맘에 드삼?


응? 그의 뜬금없는 메일, 그리고 그와 매칭이 되지 않는 충격적인 말투. 난 당장 친한 동기들에게 혹시 이윤 선임의 메일을 받았는지 물었다. 그의 메일을 받은 건 나 한 명이었다. 뭐지? 나한테 관심이 있나? 에이. 설마. 나이 차이가 몇 살인데, 나보다 9살 많다고 했었나? 내가 교육 때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 신경 쓰였나? 메일을 보낸 이유는 잘 몰라도, 어쨌든 답장을 해야 했다.


제목 : 감사합니다

선임님, 안녕하세요. 김현수입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리는 괜찮은 것 같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메일을 보내고 몇 분 지나지 않아, 이윤 선임의 답장이 도착했다.


제목 : Re. 감사합니다

궁금한 거 없삼? 회사 근처에 파스타 맛있는 곳 있는데 파스타 좋아하삼?


답장을 보냈다.


제목 : Re.Re. 감사합니다

네. 좋아합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답장이 왔다.


제목 : Re.Re.Re. 감사합니다

많이 바쁘삼? 폰 번호 알려주삼


혼란스러웠다. 왜 계속 메일을 보내는 것이며, 도대체 ‘삼’은 무엇인가? 선배와의 대화 시간엔 분명 정상인 같았는데, 이 말투는 도대체 뭐지? 게다가 입사 첫날은 너무 정신없었다. 기억하는지 모르겠지만, 팀에 배정받은 첫날부터 민경 언니가 인턴 언니와 갈등을 빚었고,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부터 메일에 답장을 못하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핸드폰으로 메시지가 왔다. 그 메시지의 주인공은 이윤 선임이었다.

‘나 이윤. 많이 바쁘삼?’

‘선임님. 답장 못 드려서 죄송해요. 조금 정신이 없었어요.’

‘괜찮삼. 인사기록 보고 연락함. 바쁘면 열심히 일하삼. 바이루~ 그리고 언제 밥이라도 같이 하삼.’

‘(당연히 점심을 생각하고) 네. 좋아요.’

‘저녁?’


이게 뭐지? 그는 그 뒤로 '하이루, 바이루, ~하삼' 등 알 수 없는 말투와 함께 연락을 해왔다. 언젠가부터는 ‘저녁 먹기 좋은 식당’ 같은 것들을 언급하며 언제 시간 되는지 묻기도 했다. 난 당시에 남자친구가 있었고,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그래서 이윤 선임이 남자친구에 대해 물어보면 언제든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먼저 나서서 '선임님. 저 남자친구 있어요.'라고 말하기에는 좀 부담스러웠다. 저 말이 '혹시 나한테 이성으로서 관심이 있으면 신경 꺼주세요.'로 들릴 수도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윤 선임의 관심이 부담스러운 한편, '설마 나이가 '9살'이나 많은 선배가 나한테 이성적으로 관심이 있겠어?'라는 생각도 들면서, 그냥 어린 친구에게 마음이 쓰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실제로 만나서 점심 식사를 할 때는 저런 식의 말투를 사용하지도 않았고, 부담스럽게 하거나 선을 넘지는 않았다.


그렇게 어영부영 시간이 흐르는 중에, 회사에서는 주말 체육 대회가 열리게 되었다. 신입이다보니 각종 종목에 출전해야 했는데, 그건 그렇다고 해도, 뜬금없이 어리다는 이유로 내가 본부 대표로 남녀복식 탁구 부문에 출전하게 되었다. 당시 탁구채를 잡아본 적도 없었기에 경기를 포기하고 싶었지만 함께 출전하는 상대방이 탁구에 목숨을 거는 나이 많은 선배였다.


“현수, 너 때문에 패배하면 용서하지 않을 거다.”


그의 실력에 맞추기 위해 난 기획본부에 있는 동기, 옥반지 언니랑 탁구 연습을 시작했다. 반지 언니는 나보다 1살 많은 동기였는데 나이 차이가 얼마 안 나고 성격도 잘 맞아서 제일 친한 동기였다.


언니 또한 탁구 경험이 전무했지만, 본부에서 제일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복식 대표 선수가 된 상황이었다.


“현수야, 나 진짜 탁구 겁나 어려워.”

“나도. 언니는 누구랑 출전해? 나는 조수석님이랑 출전하는데 탁구 매니아라서 절대 지면 안된대.”

“나는 이윤 선임이랑.”

“아 진짜? 그래도 수석님 보다는 낫겠다.”

“아 근데, 연습하자고 해도 시간이 없대.”

“나 내일은 야근해야 돼서 연습 못 할 것 같아. 혹시 야근해? 야근하고 탁구 할까?”

“그럼 난 내일 그냥 가야겠다. 난 야근 안 할 거거든!”


그렇게 그다음 날. 밥을 건너뛴 채로 야근을 하고 있는데...

‘야근하삼?’

이윤 선임이었다.

‘네. 지금 야근 중입니다.’

‘저녁 드셨삼? 혼자삼?’

‘안 먹고 빨리 일하려고 했어요.’

‘그러지 말고 밥 드시고 하삼.’


그렇게 그는 나를 불러냈고, 우리는 저녁을 먹었다.

“근데, 탁구 연습은 잘 돼가? 탁구 말고 출전하는거 또 뭐 있어?”

“아, 전 탁구만. 열심히 연습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처음이니까 좀.”

“나 탁구 잘 치는데.”

“아, 대표로 경기 나오신다고 들었어요. 탁구 말고 다른 것도 출전하세요?”

“뭐 다른 것도 이것저것. 탁구 어려우면 탁구 연습할래?”

“네? 저랑 탁구 연습을요?”

“어. 옥반지한테 하자고 했더니 약속 있다고 해서. 근데 나도 연습을 좀 해야 될 것 같거든.”

“(아, 연습 없어서 언니가 약속을 잡았나?) 그래요. 그럼.”


그렇게 우리는 밥을 먹고 나서 탁구 연습을 했고 그만큼 퇴근이 늦어져서, 다음날 피로도는 최고조였다.


내가 피곤하다는 것이 얼굴에 역력하게 드러나는지, 반지 언니는 내 피곤함을 한 번에 알아차렸다.

“현수야, 왜 이렇게 피곤해 보여?”

“나 실제로 피곤해. 엄청 늦게 갔어. 이윤 선임이랑 탁구 연습도 하고.”

“어? 탁구?”

“어. 야근하는데 밥 먹자고 해서 밥 먹은 다음에, 아 맞다 언니 어제 약속 있었어? 탁구 연습해야 되는데 언니가 약속 있어서 못했다고 나랑 하자고 그랬거든.”

“뭐? 나 어제 약속 없었는데.”

“진짜? 그럼 이윤이 왜 그랬지?”

“안 그래도 너 야근한다고 해서 탁구 연습하자고 했었는데 바빠서 안 된다고 했거든. 아 짜증 나네.”


뭐지? 그럼 거짓말하고 나랑 탁구 연습을 한 건가? 왜? 설마? 나한테 관심이 있는 건가? 아니겠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왠지 더 이상 그의 연락에 계속 반응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 뒤로 그가 연락을 해도, 미적거리며 약속을 미뤘다. 그러던 어느 날,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그 안에 이윤 선임과 사회자였던 선배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요즘 많이 바빠? 힘들지? 언제 한 번 밥 사줄게. 근처에 맛집이...”


이윤 선임과 나를 번갈아보던 사회자 선배는, 뭔가 애매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 윤이 형, 남친 있는 여자한테 너무 시간 쓰지 말라니까.”

“어? 김현수 남자친구 있어?”

“형 몰랐어? 현수 남자친구 있잖아. 몰랐나 보네? 아 현수 나쁜 여자네. 남자친구 있는 거 말도 안 하고.”


예상치 못하게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는 나쁜 여자가 되었다.

“아니, 물어보지도 않는데 남자친구 있다고 말 꺼내기도 그렇잖아요...”

“와, 형 얼굴 빨개진다.”


내가 먼저 그 엘리베이터에서 내렸고, 그 둘은 담배를 피우러 옥상에 가는 듯 더 높이 올라갔다. 내가 뭔가를 잘못한 것 같은 찝찝함도 있었고, 한편으로는 내가 잘못한 게 없는 것 같은데 왜 찝찝해야 할까 싶었다. 그리고 진짜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됐다. 내가 남자친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이윤 선임은 내 인사를 잘 받아주지 않았다. 인사에 대한 답도 “네”가 끝이었다.


그렇게 혼자 하이루, 바이루, ~하삼 거리더니, 내가 남자친구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마자 자신이 배신당한 것 처럼 행동했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라 불편감은 최고조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불편함도 많이 옅어졌다.


하지만, 왜! 왜 이런 상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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