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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그곳에서 생긴 일

[20개월] 고군분투 in 그곳

by 하이히니

대망의 9월 행사! 사실 난 행사 직전까지도 가능하면 이 출장을 피하고 싶었다. 지금까지 경험으로 봤을 때, 이 출장이 힘들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면서 동시에 엄청난 감정노동에 시달릴 것이 분명했다. (사실, 첫 해외 출장을 가기 전 내가 상상했던 출장은...우아하게 기내용 캐리어를 끌고 비행기에 탑승해서, 호텔에 도착하면 여독을 풀고, 다음날 조식을 먹고...이런 거였는데, 알고 보니 그건 판타지 드라마였다.)


한국에서는 멀쩡했던 사람들이 해외에 가면 뭔가 들떠서 그런지, 어떤 남자들은 내 앞에서 본인 불륜 상대들이 얼마나 예쁜지 자랑을 했고, 누군가는 내게 백허그를 했다. 유부녀가 출장 내내, 그것도 밤새도록 아직 잊지 못한 첫사랑 오빠와 밀회를 즐기고 있다는 이야기를 풀어놓기도 했다. 참고로,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모두 메신저 프로필이 가족사진이라는 것이었다.


어쨌든, 지금까지의 출장도 이렇게 별로였는데, 규모가 훨씬 큰 9월 행사를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했다. 그 행사 주요 참석자들은 대부분 너무 유명해서 우리가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사람들이었다. 유명한 고위층들의 숫자에 비해 나와 같은 실무자의 숫자는 턱없이 부족한 역 피라미드 구조를 띄고 있었고, 그나마 그 실무자들도 최소 5급 사무관은 되었다. 일이 고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실제로, 나는 이 출장지에서 내 정신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는 윗분들을 모시느라 혹은 모시기 위한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분들이 숙소에 들어간 이후부터 새벽까지 진짜 일이 시작되었다. 해외라서 딱히 도움을 청할 곳도 없어서, 밤에 못질을 한다든지, 판때기를 설치한다든지 하는 새로운 종류의 노동까지 섭렵할 수 있었다.


(한 2주쯤의 출장이 마무리된 이후에 집에 왔더니, 4kg 정도 체중이 줄어 있었다. 나는 힘들다고 해서 살이 쉽게 빠지는 인간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출장지에서 관계자 전체의 동선이 동일하진 않았고, 그룹마다 해야 할 일들이 잘게 나누어져 있었다. 나는 대부분 실무진으로 구성된 그룹에 속해 있었다. 그 그룹은 다양한 회사 사람들이 섞여서 10명 정도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중 라면남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그는 굳이 따지면 그룹에서 서열 2위쯤 되었는데, 서열 1위가 사라지면 말이 많아지고 활기차게 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출장 멤버 중 가장 나이가 어린 나에게 정말 많을 많이 걸었다.


“근데 나를 꼭 직책으로 불러야 하나?”

“네? 직책으로 안 부르면 뭐라고 해요?”

“김주임은 완전 애기잖아. 굳이 직책을 써야 하나?”

“(매우 퉁명스럽게) 그럼 뭐라고 불러요?”

“아니, 오빠...는 좀 그런가? 오빠 좋잖아.”

“(손가락으로 내 머리에 총을 겨누는 시늉을 하며) 우웩...오빠라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이상해?”

“안 이상하겠어요?”

“좀 그런가? 그럼...아저씨는 어때?”

“아저씨요?”


처음에는 장난처럼 대응을 했지만, 나와 두 바퀴 띠동갑인 라면남이 내게서 오빠나 아저씨라는 호칭을 원하는 것 자체가 너무 불쾌하다는 생각에 선을 긋기로 했다.


“직책 부르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앞으로는 이런 말씀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폭소하면서) 아, 설마 지금 화난 거야? 아 정말 귀엽다. 귀여워. 알겠어. 그럴게.”


윽. 귀엽다는 말도 뭔가 더럽게 느껴질 만큼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 일로 라면남에게 이런저런 경계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정이 빠듯해서 점심 식사를 하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했다. 점심을 생략하고 각자 숙소에서 25분 정도 재정비할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근데, 라면남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김주임, 혹시 라면 괜찮아요? 지금 배고픈 사람들 몇 명은 내 방에서 컵라면 먹기로 했거든요. 내가 컵라면 많이 가지고 와서, 드실래요?’

‘오! 컵라면이요? 갈래요!’


사실 나는 배가 고프긴 했다. 근데 컵라면이라니! 거부할 수 없었다.

‘한 5분쯤 뒤에 오세요!’


그렇게 라면 생각에 들떠 있는데, 멤버 중 대기업 남자 대리님에게서도 메시지가 도착했다. (대리님과는 나이가 비슷해서 출장 기간 내내 꽤 편한 사이처럼 지냈다.)


‘주임님, 피곤하시죠? 근데 혹시 괜찮으시면 저랑 호텔 카페에서 간단하게 식사하실래요?’

‘아, 근데 저 라면남(실제로는 직책으로 부름)이 다들 모여서 컵라면 먹는다고 불러서 간다고 했거든요.’

‘라면이요?’

‘네. 혹시 연락 못 받으셨어요?’

‘네. 그리고 저희 회사 사람들 다 연락 못 받은 것 같던데...’


설마, 공무원이랑 공공기관 사람들에게만 연락했나? 라면 가지고 너무 하잖아. 사기업한테 그렇게 갑질을 하더니... 라면 가지고 이러나? 그깟 라면이 뭐라고, 그가 쪼잔하게 느껴졌다.


‘대리님 쪽에는 연락 안 했나 봐요... 참나. 그 라면이 뭐라고.’

‘주임님...그게 아니라 제 생각엔 주임님한테만 연락한 것 같은데...그걸 간다고 했어요?’

'저한테만? 왜요?’

‘주임님, 잘 생각해봐요. 평소에도 주임님한테 이상하게 굴었고, 그 사람, 우리 회사 사람들만 있을 때는 여자분들한테 성희롱도 장난 아니었어요.’

‘대리님...그 정도인데 왜 말씀을 안 하셨어요.’

‘제가 여기까지 와서 어쩌겠어요. 주임님, 이건 어때요? 일단 간다고 했으니까 저랑 같이 가요. 그 대신에 저랑 같이 간다는 말 미리 하지 마세요. 우리가 같이 갔는데 정말 그 안에 몇 명 더 있으면 별 일 아니고, 만약에 갔는데 아무도 없으면 진짜 이상하고 무서운 사람이잖아요.’


그렇게, 나와 대리님은 라면남의 숙소 앞에서 초인종을 눌렀다.

“현수 주임?”


그때, 나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대번에 나인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옆에 있는 대리님의 눈빛은 ‘이것 봐요. 이 새끼 이럴 줄 알았다니까?’ 라고 말하고 있었다.

“네! 김현수예요.”


라면남이 말했던 것처럼, 그의 숙소 안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컵라면을 먹고 있었다, 로 끝나면 해피엔딩이겠지만, 우리의 예상대로 그의 숙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그는 목욕 가운 하나만 걸치고 있었다. 속옷을 제대로 입었는지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건 목욕 가운 외에 별 다른 ‘상의’는 걸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목욕 가운이 나풀거리고...하 더 자세히 설명을 해주고 싶지만,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나와 대리님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지만 실상 우리보다 더 놀란 건 라면남이었다. 그는 우리를 보곤 놀라더니, 목욕 가운을 더 꽉 여미고 급히 그 위에 상의를 더 입었다.


이 상황에서 침묵을 깬 것은 대리님이었다.

“라면 어딨어요?”

“맞아요. 라면 주세요.” 나도 거들었다. 라면남은 허둥지둥 라면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입장에선) 다행히 라면을 몇 개 가지고 왔다. 나와 대리님은 그 방에서 10분 정도 라면을 흡입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라면을 먹긴 했어도, 도대체 그가 무슨 생각으로 가운만 입고 나를 불렀는지 생각할수록 오싹했다. (여지없이 그의 프로필 사진은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그 이후 출장 내내 그와 거리를 유지했다. 출장 막바지, 주요 고위급 공무원들은 모두 출장지를 떠났고 실무진들이 남아 뒷정리를 하는 중이었다. 실무진들만 남게 되자 그 안에서 또다시 계급이 발생했다. A급 실무진들은 나 같은 하급 실무진보다 하루 먼저 출장지를 떠나게 되었다. 나는 졸병이나 다름없었기에, 끝까지 남아서 자잘한 것들을 처리하고 가야 했다. 그렇게 A급 실무진이 떠나는 날, 난 호텔에서 그들을 배웅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김주임, 공항까지 안 가?”

“저는 호텔에서 뒷정리를...”

“우리 공항까지 잘 가는지 보고 와서 해도 되잖아.”

“그런데, 차량 인원도 약간 빡빡하지 않나요? 그리고 제가 기사님한테 미리 다 말해둬서 공항 가는 동안 특별히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진 않은데...”

“그래도, 김주임이 같이 가서 혹시 기사님이랑 소통해야 될 일 있으면 통역해줘야지.”


호텔에서 공항까지는 왕복 3시간 정도였으므로, 그 시간 동안 뒷정리를 시작하면 훨씬 빨리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런데 A급 실무진들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무조건 동행을 요구했다. 어쩔 수 없이 그들과 함께 공항으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한 사무관의 전화기가 울렸다.

“진짜? 그래? 근데 우리 차는 지금 1명 정도 더 탈 수 있는데? 아 그래? 세 명? 어쩌지?”


전화를 끊고 그는 난감한 듯 내게 말했다.

“근데 김주임, 어차피 공항까지 갈 필요는 없지? 피곤하지?”

“(어. 아까 말했잖아.) 근데 이미 같이 출발했는데 방법이 없죠. 여기서 내릴 수도 없고.”

“이 지역이 많이 위험한가? 좀 내리긴 그렇겠지?”

“네?”

“아니, 다른 쪽 사람들이랑 이 차를 같이 타야 될 것 같아서. 세 명이 타야 된다는데, 여기 지금 한 명 더 탈까 말까 하잖아. 한 명 정도는 내려야 끼어서라도 탈 것 같은데...김주임은 공항 갈 필요 없잖아.”


띠용? 공항 갈 필요도 없는 사람을 끌고 올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내리라고? 여기가 얼마나 위험한데!

차 안에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여기선 내리면 안 될 것 같아요. 납치되면 어떡해요.”, “그런 거 뉴스에 나오면 진짜 우리 다 큰일인데”, “근데, 한 명은 내려야 할 것 같은데.”, “이 나라는 남자도 혼자 다니면 안 되는데.”, “김주임한테 무슨 일 나면 다 징계받아요.” 등등...


하지만, 그 웅성거림의 결과는?

"어쩔 수 없겠다. 여기 근처에서 김주임 내려야겠다..."로 마무리되었다. 손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속으로는 계속 기도했다. ‘제발 저를 지켜주시고, 제가 한국으로 무사히 갈 수 있도록....’


사무관은 미안한 표정과 함께 “김주임, 억지로 내리는 건 아니지 그래도? 지금이라도 숙소 가는 게 더 편하지? 어쨌든 꼭 안전하게 도착해! 만약 여기서 김주임 잘못되면 우리 다 끝이야.”라는 말을 덧붙였다.


나쁜 새끼들...그렇게 걱정되면 호텔에 두고 오든가, 데리고 왔으면 끝까지 책임을 지든가! 그 순간 나는 정말 하나의 부품이 된 것 같았다. 나를 내려주고 멀어지는 차를 보며 눈물이 났다. 하지만 눈물보다 식은땀이 더 많이 나기 시작했고, (미친 척하면 아무도 건드리지 않을까 싶어서) 크게 노래를 부르며 멀리 보이는 어떤 호텔로 뛰어 들어갔다. 그 호텔 직원에게 따로 돈을 주고, 안전한 차량을 섭외해서 숙소로 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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