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4개월] 그래도 누군가는 알아준다
사람이 흥분하고 화가 나면 평소의 모습과 다른 또 다른 나의 모습이 나오는데, 그때 내가 그랬던 것 같다.
“수석님, 평가 잘 받고 싶으신 건 알겠어요. 근데 이러시는 건 평가에 도움도 안 되고, 기조팀에선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제가 평가 때문에 이러는 것 같아요? 다 일의 효율성을 위해서 이러는 겁니다. 기조실에서도 고맙게 생각하고 이해할 겁니다.”
“하...진짜. 그쪽에선 수석님 때문에 저한테 화 엄청 내고요. 그리고 일 위해서 하시는 거면 제대로라도 하셔야죠. 정리도 안 된 데이터를 그렇게 뿌려서 뭐하시게요?”
“현수씨가 이렇게 예민한 줄 몰랐네요.”
“수석님, 현수씨 아니고요. 직책 제대로 부르세요.”
“참나...그깟거 다 뭐라고...그럽시다. 뭐 정 원하시니까. 근데 김주임, 이렇게 된 거 하나 충고할까요? 제 욕 많이 하고 다니셨죠? 그걸 듣고 제 기분이 어땠겠습니까? 제가 일도 제대로 안 하고 업무 뺐어간다고 욕하고 다닌 거 압니다. 그 일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제가 뺐어갑니까?”
솔직히 그를 욕하고 다닌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는 내가 불륜이라는 소문을 비롯해 별별 얘기를 다하고 다녔는데, 욕하는 건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 순간은 절대 물러날 마음이 없었다.
“아, 욕이요? 그럼 제가 무슨 얘기 들었는지 말씀드려도 될까요? 제가 뭐 할 줄 아는 것도 없으면서 까불고 다닌다고, 어린 게 싹수없다고 근데 참아야지 별 수 없다고 그런 말씀 하고 다니셨다면서요? 그리고 불륜이라는 얘기도 했다던데?”
“저는 결단코 그런 적 없습니다.”
“저도요. 그런 적 없는데요? 회사 하루 이틀 다니는 것도 아니고, 의도하지 않은 대로 소문이 돌기도 하고 그러는 거지, 그럼 제가 욕했다고 생각해서 일부러 골탕 먹이시는 건가요?”
“그런 게 아니라고요! 팀을 위해서 그런 것일 뿐이고, 그게 별로 큰일도 아니고요.”
대화를 계속해봤자 다시 원점이었다. 여기서 그냥 물러날까? 아니, 지금 이 순간 난 누구보다 멋지게 꿈틀대는 지렁이가 될 것이다!
“수석님, 논점 흐리지 마시고, 마지막으로 말씀드립니다. 이런 식의 자료 송부는 수석님한테도, 저한테도, 기조팀에게도 도움이 전혀 안 됩니다. 그리고, 전 지금 일 많아서 누구 대신 돋보이고 싶고 이런 것 전혀 없으니까 제발 안심하시고요. 제가 오늘 버릇없게 굴었다면 죄송하고, 수석님도 오해하고 있는 부분 있으면 저한테 지금 말씀하시거나 아니면 그냥 푸셨으면 합니다.”
마지막 말에, 이수석은 이 상황에 대해 납득한 듯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뭔가 내가 하고 싶었던 말도 한 것 같고, 그 간 이수석에게 느꼈던 억울함도 조금 가시려는데...이런...! 이수석은 갑자기, 보란 듯이, 또다시 주선임에게 쓸데없는 메일을 보내고 나를 참조로 넣었다. 이번에는 그 메일을 보고, 내가 먼저 주선임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선임님, 김현수입니다. 지금 저희 팀에서 메일이 하나 잘못 갔는데, 정말 죄송하고 그 메일은 무시해주세요. 죄송합니다.”
“어, 그래.”
주선임도 내가 분노를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난 곧장 팀장님에게 갔다.
“팀장님, 잠깐 팀 전체 회의 좀 할 수 있을까요?”
“현수, 무슨 일이야?”
“팀장님도 같이 참조 걸려서 보시긴 했겠지만, 이수석님이 자꾸 쓸데없이 기조팀에 보내는 메일 때문에, 업무가 너무 힘들거든요.”
“회의까지 해야 되는 상황이야?”
“제가 난리를 쳐도 바뀌는 것도 없고, 팀장님이 몇 번 말씀하셨는데도 똑같잖아요.”
그렇게 시작된 회의, 그 처음은 화기애애했다. 물론 그 화기애애함이 거짓이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팀장님은 자연스럽게 운을 뗐다.
“뭐 별일 아니고, 요즘 너무 바쁘다 보니 팀원들끼리 이런 시간이 통 없었던 것 같아서...각자 어떻게 일 진행하고 있는지, 또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얘기해보면 좋을 것 같아서요. 또 현수가 이제 부팀장 맡은 지도 좀 됐으니, 어떻게 일 하고 있는지도 궁금하기도 했고요.”
팀원들은 각자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눴다. 업체가 빠르게 대응을 해주지 않아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느니, 잔여 예산을 어디에 쓰려고 한다느니, 요즘 기조팀에서 요청하는 자료들이 너무 많다느니 등등...그래. 바로 지금이 내 얘기를 할 타이밍이다.
“음. 요청 자료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정말 제가 부족한데도 다들 자료 작성에 힘써주셔서 감사드려요. 근데, 제가 그 자료들 취합해서 기조팀에 보낼 때, 저도 ‘이건 나 혼자 다 한 것이다.’라고 생각하지 않고, 기조팀에서도, 팀장님도 다 우리팀이 함께 한 일이라고 생각할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본인이 돋보이고 싶다고 단독 행동을 하시거나, 저한테 자료 주시는 걸 경계하거나 그러지 않으시고 협조해주셨으면 합니다.”
내 말을 듣고, 뭔가 억울한지 말을 하고 싶어서 부릉부릉 시동을 거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이수석이었다.
“팀장님, 말 나온 김에 여쭤보면, 제가 단독 행동을 하는 게 다 팀을 위해서였는데 이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수석님, 물론 팀을 위해서 노력하시는 것 알지만 그냥 현수 말을 전적으로 따라주셨으면 해요. 실제로 수석님이 하고 계신 게 팀을 위하는 것 같지도 않고, 효율성도 떨어지고요.”
“그럼, 차라리 다시 제가 팀 부팀장 업무 맡게 해 주시죠.”
“수석님, 그 업무 맡겼을 때 많이 힘들어하셨잖아요. 그냥 현수가 하도록 지원하시죠.”
팀 회의에서 팀장님까지 내 의견을 지지해주자, 이수석은 더욱 파들파들 부들부들거렸다. 난 마지막으로 그에게 부탁 같은 경고를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수석님, 팀장님 의견도 이러니까 제발 앞으로는 잘 부...”
“(말을 끊으며) 하...진짜 어이가 없어서...”
“수석님, 앞으로는...”
“(또다시 말을 끊으며)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수석님, 말 끊지 마시고요! 끝까지 좀 들으세요. 팀 회의에서 팀장님이 이 정도까지 말씀했는데도 또 이런 일이 반복되면, 이제는 본부장님한테 찾아갈 거고, 앞으로는 뭐 하실 때 저한테 보고하세요.”
나도 나보다 훨씬 어른인 누군가에게 강하게 의사 표현을 하는 것이 너무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냥 이 때는 정말 뵈는 게 없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순간 어찌 됐든 이수석이 약간 수치심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팀에서 본인을 지지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팀장님도 끝까지 "그냥 현수 말대로 좀 하세요."라고 했으니까...
그 이후, 이수석은 특별한 이상 행동을 하지 않았다. 또, 팀장님과 좋은 사이가 되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했는지 본부장님에게 본격적으로 치근덕대기 시작했다. 본부장님과는 대학 선후배 사이라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던 것 같다. 대한민국에 학연, 지연, 혈연의 중요성은 상당히 컸고, 아마도 그 학연이라는 것을 이용해서 본부장님 마음에 들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본부장님은 원래부터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친근하게 다가가며 대학교 얘기를 해도 잘 받아주지 않았고, 늘 이수석에게 거리를 뒀다.
평가를 위해 우리는 각자 개별 성과 발표를 해야 했고, 본부장님이 지금까지 해온 업무 성과 자료를 각자 정리해서 가져오라고 하셨다. 팀장님은 따로 평가를 받기 때문에 그 성과 발표 회의에는 팀장을 제외한 팀 전원이 참석했다. 직급 순서대로 성과를 발표하는데, 이수석의 발표를 듣고 이자니 헛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일단, 제가 맡은 업무 중에 비중이 작은 부분은 그냥 적지 않았고, 주요 업무 부분만 설명드리겠습니다. 어쩌구, 저쩌구, 저쩌구가 있고, 부팀장 업무도 했었고 어쩌구 저쩌구...”
그가 말한 업무들은 대부분 내가 했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이 한 업무였다. 본인이 아주 작은 도움을 준 일들은 마치 본인이 한 것처럼 적어두었고, 아무것도 아닌 일들을 굉장히 중요한 것처럼 포장했고, 지원하지도 않은 중요한 일들을 지원해서 성과를 냈다고 가득 적어둔 것이다. 그는 신나게 발표를 해댔다.
그때!
“수석님, 잠시만. 그래서 정확히 어떤 업무 하신 거죠?”
“아, 본부장님. 제가 지금까지 설명한 이 부분이랑, 저 부분이랑...”
“아니, 그건 현수가 했던 거잖아요. 부팀장은 얼마 하지도 않았고...중요한 것 적으셨다면서 거기서 실제로 하신 업무가 딱히 없는 것 같은데...적으신 것들 중에서 뭘 하셨는지를 좀 설명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와! 역시 본부장이 괜히 본부장이 아니네! 멋지다! LET’S GO PARTY! 본부장님 가즈아!
“수석님, 제가 원했던 자료는 진짜 실제로 하신 업무 중에 성과가 어떤 건지 이런 걸 적으라는 거지, 팀 전체 업무를 적으라는 게 아니었잖아요.”
“네. 저도 아는데, 제가 중요한 업무를 할 기회가 별로 없었습니다.”
“어휴...수석님이 신입사원도 아니고, 그런 기회가 왜 없었겠습니까... 그냥 수석님은 발표 여기까지 하시죠.”
본부장님에게까지 외면당한 그의 표정은 너무도 어두웠다. 당시 우리 팀은 프리라이더인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많았는데, 그들은 모두 본부장님에게 비슷한 평가를 들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본인 어필을 어떻게든 더 해보려고 팀에 할당된 시간을 야금야금 다 썼다.
내 차례쯤 되었을 때, 다른 팀이 성과 발표를 해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 너무 초조했다. 지금 여기서 제대로 발표를 해야 하는데, 나에게는 할당된 시간이 거의 없었다!
“현수, 지금 발표 못할까 봐 초조해? 시간 없는데 그냥 현수는 생략하자.”
“네?”
내 편인 줄 알았던 본부장님이 나보고 발표를 하지 말라고 하셨다. 이게 무슨 일이지?
“현수는 여기서 발표 안 해도 괜찮아. 얼마나 일을 열심히 하고 고생했는지, 어떤 일 했는지, 내가 다 알아. 여기서 제일 고생 많이 한 거 아니까, 걱정 말고 그냥 나가 봐. 이 팀은 여기서 마무리합시다. 다들 고생 많았습니다.”
와...난 뭔가 감동을 받았고, 뭉클했다. 난 정말, 그 자리에서 내 업무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나왔다. 우리가 나오자, 팀장님은 회의 상황이 어땠는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사실, 본부장님이 우리에 대해 좋은 인식을 갖고 있으면 팀장님도 좋은 평가를 받는 경우가 많고, 그렇지 않으면 팀장까지 부정적으로 보고 있을 확률이 높아서 그런 듯했다.
“다들 고생 많았어요. 안에 분위기는 어땠어?”
“팀장님, 발표 잘 끝났고 본부장님이 저희 팀 상황을 아주 정확하게 알고 계세요.”
“정말?”
“네, 말 안 해도 일 많은 거 다 안다고 고생했다고 하시더라고요. 완전 최고!”
“아 진짜?”
팀장님은 내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아졌고,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이수석은 급히 담배를 피우러 나가버렸고, 얼마 뒤 우리팀에서도 나가버렸다. 알고 보니, 그는 어느 팀을 가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과 사이가 안 좋아져서 보통 1년을 주기로 팀을 옮기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본부장님이 말한 대로, 난 그 해에 엄청 좋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본부장 평가에서는 본부 상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평가를 받았다. 그렇게 그 해의 마무리만큼은, 따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회사에서 나에게 일이 너무 많이 몰릴 때마다, 힘든 일을 당할 때마다 참 많이도 억울했다. 그 누구도 내 노력을 알아주지 않는 것 같고, 그 누구도 내 능력을 봐주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 1년, 2년 지나면서, 생각보다 나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묵묵히 견딘 시간이 힘들긴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은 중요한 업무 할 때 나를 찾아주었고, 또 결국 나에게 좋은 평가를 주기도 했다.
또, 이수석 같은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실체가 드러나 좋은 평가를 받지도 못한 채 쫓기듯이 팀에서 나가게 되었다.
당장 내가 처한 상황이 억울할 때가 있어도, 회사에서는 그 억울함을 시시때때로 풀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래도 그 억울함에 밀려나기보다, 조금만 더 견디면 사람들이 알아주는 날이 온다. 확실히.
(그때는, 내가 화를 내도 사람들이 나를 지지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