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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지렁이도 밟으면 (겁나 열심히) 꿈틀한다_(1)

[21~24개월] 이미지를 포기한다

by 하이히니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는 뭐해도, 난 처음 입사했을 때 동기들 사이에서 수블리(현수+lovely)로 불리던 사람이었다. 그랬던 내가 오랜 시간 비정상적인 상황에 노출되면서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다 보니 점점 지치고, 내 성격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굵직한 일들을 맡다보니 분노할 일들이 더 많아지고, 목소리도 점점 더 커졌다. 이런 꼴이 이정필 수석 눈에 보기 좋았을 리가 없다. 틈만 나면 나를 욕하고 다니는 것 같았지만, (그의 입장에선) 별다른 효과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전쟁통 같은 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네, 김현수입니다.”

“현수, 어디야? 회의실 안 와?”

“네? 지금요?”

“어. 지금까지 팀 실적 정리한 자료 가지고 회의하기로 했잖아.”

“그거 내일 오전 아니었어요?”

“무슨 소리야, 본부장님 내일 출장 잡혔다니까?”


옆 팀 부팀장인, 정책임이었다. 부팀장 업무를 맡으면서 이런 식으로 갑작스럽게 회의가 잡히는 경우가 많았지만, 일정을 잊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서둘러 회의실로 가긴 했지만, 뭔가 찝찝했다. 급하게 참석한 것 치고 별다른 문제는 없었지만, 그 찝찝함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회의 있는 거 까먹었던 거야?”

“아니요. 아예 못 들어요. 메일로 보내셨던 거예요? 왜 못 봤지?”

“아니, 아까 자리로 전화했었는데 이수석이 받더라고. 그래서 일정 변경된 거 전달 좀 해달라고 했지. 아무 말도 못 들은 거야?”

“네. 아예. 아무 말도...”


보통의 팀원들은 그런 식의 전화를 받게 되면 말을 전달해주거나, 최소 포스트잇에 메모를 남겨두곤 했다. 깜빡 잊고 실수를 할 수도 있었지만, 이수석이라면 실수가 아니라 악의적으로 내용을 전달하지 않았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팀으로 돌아갔을 때 이수석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수석님, 혹시 정책임님이 회의 일정 변경 건으로 메시지 남긴 거 없었나요?”

“네, 그래서 전달드렸잖아요.”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 당시 그는 본인이 원하던 일을 내가 다 뺐어간다는 생각으로 나와 말도 거의 섞지 않고 있었다. 저런 메시지를 전달해줬다면 내가 이렇게 잊었을 리가 없었다. 25살이나 나이가 많은 아빠뻘 선배한테 심하게 하고 싶진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 업무에 지장이 생기게 할 순 없었다. 막말로 여기가 진짜 전쟁터도 아니고, 왜 이렇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란 말인가?


“수석님, 이거 저희가 근래 나눈 첫 대화잖아요.”

“(사람 좋은 웃음을 하며) 회의 시간에 늦는 실수, 그렇게 큰 거 아닙니다. 당황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바쁜 거 다 아는데, 그럴 수도 있죠.”


완전체인가? 무슨 연극배우도 아니고, 왜 저러는 거야? 이렇게 부들거리는 찰나에, 정책임에게 메시지가 왔다.


‘김주임, 자책하지 마. 이수석님한테 얘기 들었어. 정신없고 바쁘면 잊을 수도 있지. 이수석님이 너무 다그치지 말라고 연락 주셨어. 김주임 상황 다 이해하고, 나 김주임 혼내거나 다그친 것도 아니니까 마음 상하지 말고.’


와...정말 이수석의 처세술은 어떤 의미로 참 대단했다. 정책임이 좋은 사람이었으니 망정이니, 그게 아니었으면 이걸 시작으로 또 다른 오해를 받고 불편한 일에 휩쓸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이후, 이런 일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아무도 믿지 않으며 정신을 다잡고 살아갔다.


그리고 사실 그 당시 나를 가장 힘들게 하던 것 중 하나는, 기획조정실 주선임이었다. 잠깐 설명한 적이 있지만 그는 엄청난 능력과 대단한 성격의 소유자였는데, 부팀장 업무를 하게 된 이후부터 그와 소통할 일이 너무 많아져 하루하루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의 내선번호는 2580이었는데, 전화기에 2580이 뜰 때마다 심장이 터질 것 같고 손이 덜덜 떨렸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자료를 작성하고 팀장님이 확인을 하고 보내도, 그의 기준에는 한참 못 미치는 모양이었다. 자료를 보내고 나면, 여지없이 10~30분 내에 전화가 왔다. 그 전화를 기다리는 시간도, 내선번호 2580이 내 전화기에 찍힐 때도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수화기를 들면 그의 깊은 한숨를 들을 수 있었다. "하...". 그 한숨소리로 그가 기분이 좋지 않음을 알 수 있었고, 없던 수전증이 생기기도 했다.


사실, 그는 다른 팀보다 유독 우리 팀에 더 냉정한 잣대를 들이밀기도 했다. 이수석이 잠깐 부팀장을 할 때 잠수를 탄다든지 이상한 자료를 넘긴다든지 해서, 우리팀을 오합지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와 일했던 수많은 후배들처럼, 나도 늘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그 눈물이 꽤 가치가 있었던 건지, 시간이 지나면서 주선임은 가끔씩 날 칭찬해주기도 했다. 그럼 난 날아갈 듯이 기분이 좋았다. 팀장님의 칭찬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그의 칭찬 한 마디에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고, 맨날 욕만 먹다가 들은 칭찬이라 그런지 세상을 다 갖은것 같았다. (이게 나쁜 남자들이 인기 있는 이유인가?)


이렇게 팀이 안정화 되다 보니, 이수석의 기분인 좋지가 않았던 모양이다.


“김주임, 일 열심히 하는 건 좋은데 기조실에 자료 보낼 때 제가 작성한 부분은 제대로 표시합니까?”

“네? 기조실에 자료 보낼 때 어떻게 나가는지 아시잖아요. 팀 단위로만 표시하죠.”

“그니까, 아무튼 제 이름은 안 들어간다는 말씀인가요?”

“그럼 30p짜리 자료가 나가면 4p는 이정필 수석, 5p는 김현수, 1p는 누구 이런 식으로 표시하길 원하세요?”

“당연하죠.”

“하...내부 업무 분장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리고, 사실 기조실에 보내는 거 거의 다 작성은 제가 하잖아요. 특히 수석님한테 요청드렸던 건 정말 로데이터(raw data)였는데...”

“로데이터도, 출처가 저라면 제 이름을 표기하셔야죠. 외부에서 김주임만 일한다고 오해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너무 유리한 방식 아닌가요?”

“수석님은 잠깐 총괄할 때 그렇게 하셨나요? 한 번도 그런 적 없잖아요.”

“지금이랑 그때는 때가 다르지 않습니까.”

“(조금 이성을 잃어서) 뭐가 달라요? 아, 다르죠. 그때는 실제로 수석님이 작성한 자료가 거의 없다면, 지금은 제가 거의 다 작성한다는 게 다르죠. 또 다른 게 뭐가 있을까요?”


이런 내 반응을 보고서 이수석은 "앞으로 전 제 방식대로 하겠습니다."라고 외치고 나갔다. ‘예. 마음껏. 마음대로 하세요.‘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지만 참고, 그렇게 그 일이 마무리된 줄 알았다.


근데! 그 뒤로 이수석이 정말 나를 엿 먹이려고 작정한 모양인지, 내가 로데이터를 요청하면 그걸 나한테 직접 보내지 않고 기조실 주선임에게 바로 보냈다.


<메일>

받는 사람: 기조실 주선임

참조: 우리팀 팀장님, 김현수

제목: 실적 송부


안녕하세요? 이정필입니다. 기조실에서 요청한 자료 중에, 제가 담당하는 부분을 송부드립니다. 나머지 내용은 김현수 주임이 작성해서 송부할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첨부파일. 실적 정리_raw data. 1부. 끝



이 메일을 보고 현기증이 났다. 분명히 화가 단단히 난 주선임이 전화가 올 것 같은데...따르르르릉...전화가 울렸고, 내선번호는 2580이었다.


“선임님, 안녕하세요...”

“하... 너희 팀 관리 안 해?”

“죄송합니다.”

“(겁나 차가운 말투로) 내가 너네 팀 자료 취합하는 사람이야? 이수석이 이런 거 보내려고 하면 막았어야 될 거 아니야!! 이건 네가 다 확인하고 취합하고 수정해서 보내야 되는 자료잖아!! 나, 메일도 엄청 많이 오고 바빠서 이런 거 확인하고 짜증 낼 시간도 없거든. 조심해라.”

“죄송합니다.”

“이수석한테 밀리지 말고 일 제대로 해라.”


주선임 성격에 화낼 만도 했다. 내가 열심히 쓴 자료를 보고도 화를 내는 사람인데, 아무런 가공도 안 한 자료를 그것도 본인 관련 내용만 딸랑? 천지가 뒤집어질 일이었다. 처음에는 이수석에게 화도 내고, 나중엔 부탁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심지어,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어떤 자료를 요청하지 않아도 주선임에게 저런 메일을 보냈다.


난 화내는 주선임이 점점 더 무서워졌고, 회사에서 그가 보이면 멀리 도망치기도 했다. 하루하루 피가 말라가던 중, 또 이수석이 말도 안 되는 로데이터를 주선임에게 보내버렸다.


여지없이 전화가 왔다. 따르르르릉...내선번호 2580...이쯤 되니, 주선임에게도 화가 났다. 솔직히 이수석에게는 한 마디도 안 하면서 왜 나한테만 화를 낸단 말인가!


“(전화 받자마자) 주선임님, 김현수입니다. 얘기 다시 할게요. 이수석님이 말귀를 못 알아들어서 저도 어쩔 수가 없네요. 팀장님한테 얘기했는데 별로 신경도 안 쓰고, 제가 오늘은 본부장이든 사장이든 누구한테라도 말해서 고쳐둘게요.”

“(약간 당황한 듯이) 어...그래. 수고해라.”


이건 마치 이수석에게 날리는 선전포고와도 같았다. 이수석은 내 옆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뻔히 대화 내용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화를 끊고, 자리에 태연하게 앉아있는 이수석에게 갔다.


“수석님, 얘기 좀 하시죠.”

“현수씨, 그럼 회의실로 갈까요?”


여기에서, 그가 갑자기 날 현수씨라고 부른 것은 아마 나를 흥분시키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이 회사에서는 싸울 때나 사람을 짜증 나게 하고 싶을 때 직급을 낮춰서 부르거나 직급을 없이 부르기도 했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 ‘직급 제대로 불러주세요.’라고 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은근히 말 까는 거랑 비슷한 상황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아니요. 수석님이 사람들 앞이랑 뒤에서 말씀이 좀 다르셔서. 여기서 하시죠.”

“현수씨, 정말 여기서 말하는 거 괜찮겠어요?”

“네. 그리고 현수씨 아니고 직급 제대로 불러주시고요.”


이미 이 정도 얘기가 나왔을 때, 우리팀은 물론 사무실을 같이 쓰는 다른 팀 사람들까지 우리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이 많은 선배한테 함부로 말하는 것이 내 이미지에 타격을 주겠지만, 난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래, 그냥 내 갈 길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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