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미련 있는 작별, 안녕

[25개월] 새로운 팀

by 하이히니

(해당 브런치북은, 공공기관을 다녔던 여러 개인의 이야기를 종합하여 각색한 1인칭 시점 기반 소설로, 실제 특정 기관 및 단체, 개인과 전혀 무관합니다.)


성과 발표 자리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해 폭주하던 이정필 수석은, 정기 인사철이 되기도 전에 팀을 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그런 빌런이 사라지고 난 이후에는 숨죽이고 있던 소악마들이 얼굴을 내밀기 마련이었다.


팀에서 새로운 악마로 떠오른 것은 팀장님이었다. 사실 팀장님은 원래 다혈질에다 감정 기복이 심하고 늘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었는데, 뭔가 부담스러운 상대가 나타나면 비교적 조용히 있었다. 그러다가 속된 말로 자신 입장에서 만만한 사람들이 남으면 본래의 성격이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다행히 내가 팀장님 입맛에 맞게 일을 해서 일 때문에 나에게 소리 지른 적은 없었지만, 그런 말을 자주 듣는 사람들은 마음에 큰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나중에 들은 선배들의 증언에 따르면 애초에 우리팀에 이상한 선배들이 많았던 것은 팀장님의 탓이 컸단다. 유능한 직원들은 팀장님 때문에 우리 팀에 오길 거부했고, 그 때문에 뭔가 다른 팀에서 문제가 있었다거나 선택지가 없는 사람들이 우리팀으로 온 경우가 많았단다. 어쨌든, 나는 팀장님이 나에게 소리 지르고 화내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 그 상황을 견디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늘, 날씨도 쌀쌀한데 다 같이 맛있는 거 먹으러 가는 건 어때? 시간 다들 어때?”


팀장님이 갑자기 회식을 소집했다. 평소 팀장님은 술, 회식, 단합은 성공의 밑거름, 못 노는 사람은 일도 못한다는 식의 생각을 하는 사람이었고 (자신에게 불편한 사람이 없으면) 꽤 자주 회식을 소집했다. 참석 가능한 팀원들은 참여 의사를 밝혔다. 나도 가능하면 참석하려고 했으나 그날은 친한 동기들끼리 선약이 있던 날이었다.


“팀장님, 전 오늘 선약이 있어서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무슨 소리야? 오늘 팀 회식하기로 했잖아.”

“시간 되는 분들만 가시는 건 줄 알고...그리고 이게 선약이라서...”

“중요한 선약이야? 무슨 약속인데?”

“동기들이랑 모임이 있어서요.”

“동기들? 팀 회식하는 건데 동기들 모임을 간다고? 정 그러면 팀 회식 끝나고 가.”


속으로 번뇌했다. 그냥 팀 회식 갈까? 어떻게 할까? 그러던 중 도대체 내가 언제까지 이 상황을 참아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이렇게 일도 떠밀고 선약까지 좌지우지하는 이 상황을 언제까지...


“어려울 것 같아요. 저는 오늘은 선약 가야 할 것 같아요.”

“김선임! 이건 팀 회식이라고!”


팀장님은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사무실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이쪽을 주목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평소였으면 이 상황이 무섭고 불편했겠지만, 왠지 모르게 내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거 방금 말씀하신 거잖아요.”

“지금 정말 안 가겠다는 거야?!”

“네...내일 뵙겠습니다.”


난 저렇게 말하고 그냥 가방을 들고나갔다. 팀장님은 뒤에서 다시 소리 질렀다.


“팀장이 말하는데 예의 없게 이게 무슨 짓이야!!”

“예고 없이 잡은 회식은... 앞으로는 참여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가보겠습니다.”


그다음 날 팀장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팀장의 뜻대로 하지 않았다. 속이 시원할 줄 알았는데 약간 두려운 마음과 억울한 마음 등이 뒤섞여 눈물이 주르륵 났다. 그 상태로 동기들과 만나서 시원하게 욕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권팀장에게 전화가 왔다.


권팀장? 권팀장은 옥반지 언니네 팀의 팀장이었다. 평소에 나와 교류도 거의 없었고, 잘 아는 사이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팀장 치고는 약간 특이한 구석이 있었다. 윗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머리를 길러서 묶고 다녔다. (팀장님은 남자였다.)


그것 외에 내가 그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그가 유행가를 좋아한다는 것과... 애플 제품을 제대로 사용할 줄은 모르지만 어쨌든 애플 매니아라는 것... 그리고, 아! 직권남용으로 몇 차례 신고를 당했었다는 것? (회사 내에서 권팀장을 신고한 사람들에 대한 여론이 매우 안 좋았기 때문에, 권팀장은 피해자에 가깝다고 전해 들었다. 그리고 신고한 사람들을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퇴사했다.)


“네, 팀장님. 김현수입니다.”

“어. 어. 알지. 알지. 김선임, 혹시 잠깐 통화할 수 있을까?”

“네. 말씀하세요.”

"혹시, 내일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내일요?"

"어. 우리 팀 쪽으로 잠깐 와 줄 수 있을까?"

도대체 그는 나를 왜 부르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나를 부를 만한 이유는 딱 하나 뿐이었다.

그렇게...그 다음날...


“혹시, 이번 인사이동 때 우리 팀으로 올 생각 없어?”


역시...내 예상대로였다.


“네? 전략팀이요?”

“어. 지금 팀에 정규직이 옥반지 밖에 없어. 근데 반지랑은 친하잖아?”

“그죠. 그렇긴 한데...”

“이번에 팀 업무가 확장되서...정규직 두 명 섭외 중. 그래서 김선임한테 전화한 거고.”

“아...”

“편하게 생각해 봐. 나랑 일하는 거 생각보다 괜찮을걸? 지금 팀에 정규직은 옥반지 1명, 계약직 1명, 파견직 2명 있는데, 김선임도 오고, 또 다른 정규직도 오면 구색은 갖춰질 거야. 사실, 또 다른 정규직은 하수석님 생각하고 있어.”


일단, 누군가가 날 찾아준다는 것이 감사하기는 했지만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순 없었다. 물론 소문에 따르면 권팀장이 피해자였지만, 어쨌든 직권남용으로 몇 번이나 신고를 당했고, 저 중에 내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옥반지 말고는 없었다.


다른 팀원들은 모두 우리보다 늦게 입사한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이 어떤 사람인가 하면...


일단 계약직 1명, 박상호 주임은, 30대 중반 쯤 되는 남자 직원이었다. 반지 언니의 증언에 따르면, 팀 내에서 언니를 도와 일을 하는 사람은 박주임 한 명 뿐이었다. (다른 사람에게도 업무 지원 요청을 해야 하는데,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박상호 주임에게만 부탁을 하게 된다고 그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 있다고 했다.)

그는, 인상 자체도 굉장히 차분한 편이었는데, 실제로 말수도 적어서 직원들 중에 박상호 주임이 직원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다. 어디선가 묵묵히 일하고 있지만, 그걸 티내지도 않고, 티를 내지도 못하는 사람이었다.


파견직 중 1명은...김지수 주임이었다. 그녀는 40대였고, 애교가 많아서 채용됐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애교가 많았다. 치렁치렁 긴 머리에 늘 핑크색 머리띠를 하고 다녔다. (머리띠 색은 늘 핑크색이었지만 색은 조금씩 달랐다. 인디핑크, 다크 핑크, 연한 핑크 등등...) 머리띠뿐 아니라, 원래 핑크색을 좋아하는 건지 언제나 드레스 코드 중에 핑크색이 포함되어 있었다. 옷을 전체적으로 핑크색으로 입고 오거나 아니면 핑크색 핀 등 어쨌든 뭔가 핑크색을 하고 나왔다. (나중에 보니, 휴대폰 케이스에 달린 큐빅들, 키보드, 마우스, 필통 이런 것들 죄다 핑크색이었다.)


그녀랑 직접적으로 대화한 적은 거의 없었지만, 엘리베이터나 식당에서 그녀가 얘기하는 것들을 들어보면 약간 소름이 돋았다.


“팀쟝니임~헤헤, 안녕하세요오. 팀장니임 오늘 너무 멋있으세요오~”, “(손가락으로 음식을 가리키며) 팀쟝니임, 저 이거 너무너무너무 좋아요오~ 맛있어요오~ 또또또 먹고 싶어요오~”

요오~, 니임~, 헤헤? 가히 충격적이었다. 게다가 부팀장 하면서 그녀에게 받았던 메일을 떠올려 보니...


안녕하세요~ 김지수입니다.

바람이 살랑 불고 기분까지 좋아지는 날들입니다아! (헤헤 뭔가 부탁을 드리고 싶어서 이렇게 서두가 길고 막 이래요~ㅎ)

요즘 많이 바쁘시죠~? (바쁜 거 알면서 막 이래요~ㅎㅎ)

다름이 아니고, 저희 팀에서 뭘 부탁드리려고요오. 근데 혹시 목요일이나 금요일 언제 시간 되시나요? 저희 팀장님도 바쁘셔가지구 막 제가 이렇게 대신 메일 보내구 그래요~ ㅎㅎ

곧 점심시간인데 나중에 다 같이 맛있는 거라도 먹으러 가면 좋겠어요!


막 이래요?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


사실 난 그녀의 메일을 처음 보는 순간부터 그녀에게 호감을 가질 수 없었다. 나처럼 일을 열심히 그리고 꽤 잘하는 사람 입장에서 저런 사람은 기피 대상이었다. 그녀가 보낸 메일은 그 목적을 파악할 수도 없었고, 어쨌든 저런 메일을 보내는 사람 치고 일 잘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저 정도로 심한 메일을 쓰는 사람을 본 적도 없긴 했지만...)


그 메일을 떠올린 순간부터, 그녀에 대한 온갖 부정적인 일화들이 떠올랐다. 일단, 그녀는 병가를 밥 먹듯이 쓰다가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규정상 5일까지는 증빙자료 없이 병가를 사용할 수 있었는데, 그 5일이 넘어가면 꼭 증빙자료를 제출해야 했다. 그런데 그런 규정을 몰랐던 그녀는 병가를 그냥 사용하다가 일수를 넘겼고, 인사팀에서는 이에 대해 증빙을 요청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날은 아프지 않았던 날이고 (심지어, 그날 이란성 쌍둥이 아들, 딸과 함께 어디로 놀러 갔다고 한다.) 그 어떤 증빙자료도 제출할 수 없었던 그녀는 남자 팀장들에게 <울먹울먹+무서워요오+휴가가 없어서 어쩔 수 없었어요+어떡하죠오?>와 같은 태도를 취했다.


무책임하고 무능력했지만, 김지수 주임은 파견직이었고 계약기간 끝나면 나갈 사람이었기 때문에 책임감을 갖지 않는 것에 대해 그 누구도 터치하지 않았다.


그럼, 나머지 파견직 1명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사진 촬영을 위해 고용된 30대 후반 남자, 이경우씨였다. 그는 특별한 경력도 없고 회사에 취업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마*라티 기*리와 포르* 파*메라를 번갈아 가며 타고 다녔다. 벌이가 뻔한 회사에서 저런 차를 타고 다니면 별별 소문이 나기 마련이었다. 그 소문 중에서 가장 유력한 내용은, 그의 아버지가 엄청난 규모의 과수원을 운영하고 있는 지역 유지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취업한 적이 없는데도, 형편이 여유로운지 결혼해서 아이가 세 명이나 있었다. 그는 키가 작고 매우 둔한 인상이었지만 권팀장에게는 업무를 제외한 모든 부분에 있어서 충성하는 사람이었다. (업무에 충성하지 못하는 것은 그저 그에게 업무가 없었기 때문이다.)


경우씨는 지나가다 햇빛이 비치면 “팀장님, 햇빛이 너무 강합니다!” 하면서, 손으로 팀장님 얼굴에 그늘막을 만들어주는 사람이었다. 다른 팀에 있는데도 그 광경을 몇 번이고 목격했을 정도였다. 반지 언니의 얘기를 들어보니, 체질적으로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이었는데, 권팀장이 술을 마실 때면 늘 새벽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다 권팀장을 데려다주고 그 다음날 모시러 가고 그런다고 한다. 물론, 이런 모습이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마찬가지로 이 사람은 계약기간만 채우고 갈 사람이기 때문에 별로 신경 쓸 것은 없었다.


제일 중요한 건 정규직인 옥반지와 하수석님이었다. 반지 언니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고, 하수석님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사실 하수석님은 얼마 전까지 본부장이었고, 심지어 본부장일 때 본부 팀원 중 권팀장이 있었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회사에서 여러 정치 싸움에 휘말리는 바람에 잠시 보직 해제된 상태였다. 사내에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몇 번 들은 적이 있었는데, 꽤 쿨하고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또, 탁구와 마라톤 매니아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래서인지 약간 마르고 다부진 느낌이 드는 분이었다.


생각을 해보니, 계속 같이 일할 정규직 두 명은 괜찮은 사람이고, 계약직 직원도 나쁘지 않고, 파견직은 별로지만 곧 헤어질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찝찝하긴 해도 그 팀에서 일하는 것이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마침 우리 팀장이랑 마찰이 있고 직후에 받은 연락이라 꽤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쉽사리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심란한 마음에 정말 오랜만에 책상과 서랍 정리를 시작했다. 특히, 서랍까지 정리하는 것은 입사 후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서랍에서 온갖 서류들을 꺼내고 있는데, 어라? 서류 맨 밑 깊숙한 곳에 깔려 있는 초콜릿 상자?

출처 :https://cyberskyshop.koreanair.com/prd/viewProduct.do?kalPrdtCode=S09231F0


이 초콜릿은 내가 입사한 해에 선물 받은 초콜릿이었다. 근데 맛이 좀 이상하고 떫어서 한 입만 먹고 서랍에 처박아 두었던 것이다. 내 입에 맞지 않는 초콜릿을 누군가에게 권하기도 좀 그렇고,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그 사이 그 상자 위에는 서류들이 수북이 쌓였고...


몇 년 만에 그 초콜릿 상자를 발견했을 때, 공포로 몸이 얼어붙었다. 혹시 바퀴벌레가 생긴 건 아닐까? 이 오랜 시간 동안 여기에 있으면서 정체 모를 벌레들을 품고 있진 않을까? 사실 이렇게 무서우면 그냥 버리면 되는데, 뭔가 또 궁금한 마음에 떨리는 손을 부여잡으며 초콜릿 상자의 뚜껑을 열었는데...?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난 분명히 저 중에 하나의 초콜릿도 다 먹지 못했는데, 상자를 열어보니 초콜릿이 딱 하나만 남아 있었다. 그 많던 초콜릿이 어디로 간 거지?


나는 평소 퇴근할 때는 보안상 그 서랍을 열쇠로 잠그고 다녔고, 열쇠는 나름대로 나의 비밀공간에 숨겨 두었다. 나는 맹세코 그 맛을 다시 체험하고 싶지 않아서 그 초콜릿에 손댄 적이 없고, 누구 하나 그 초콜릿이 먹고 싶다거나 그런 기색이 없었다. 심지어 서랍 깊숙한 곳에 갇혀 있느라 내 기억 속에서도 사라진 초콜릿인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가 서랍 열쇠를 찾아서 서랍을 열고 서류를 꺼내서 초콜릿을 몇 개씩 먹고 다시 원위치 해 둔 것이다.


도대체 그 초콜릿을 누가 먹었을까? 누가 열쇠를 찾아서 서랍을 열고 서류를 다 빼고 상자를 열어 초콜릿을 먹고 다시 상자를 닫고 서류를 다시 위에 쌓아놓고 열쇠로 서랍을 잠갔을까? 그리고 여기 초콜릿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우리팀에서 야근을 제일 많이 한 건 나였는데, 도대체 언제였을까?


그 순간, 갑자기 이 팀에 신물이 나다 못해 신물이 넘어올 지경이었다. 그냥 더 이상은 못해먹겠다 싶었다. 전략팀도 찝찝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냥 이 팀을 떠나야 할 것 같았다.


난 그렇게 어이없게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이 이야기들을 처음부터 보고 싶으시다면

https://brunch.co.kr/@ilovesummer/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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