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개월] 당신은 누구세요?
전략팀으로 팀을 옮겼을 때, 나의 회사생활도 어느덧 3년 차를 맞게 되었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나도 이 회사 생활에 익숙해졌고, 점점 아는 사람들도, 편한 사람들도 많아졌다.
사실 처음 신입직원으로 입사했을 때, 나에게 이런 날이 오리라고 쉽게 상상하지 못했었다. 모두가 낯설었다. 회사에서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은 내가 신입직원이라는 것을 아는 것 같은데, 나만 상대방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 같아 긴장하게 되기도 했고, 가끔은 어디선가 감시를 당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엘리베이터에 가만있다가도 누군가가 "이번에 들어온 신입사원인가?" 하면서 말을 걸면, 마치 나도 그들을 알고 있는 것처럼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렇게 회사 모든 공간이 긴장의 연속이던 신입사원 시절을 지나서, 그래도 꽤 편한 사람이 생기고 적응을 했다는 것이 신기하고 대견했다. 어쨌든, 3년 차쯤 되니까 동기들이랑만 편하게 지내는 것이 아니라 친한 선후배들도 몇몇 생겼다.
그중에, 나보다 1년 선배인 방선임이라는 남자 선배가 있었다. 입사가 얼마 차이 나지 않는 거의 직속 선배이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편한 사이가 되었다. 난 친한 사람들과는 엄청 반갑게 인사를 하는 편이었는데, 방선임을 볼 때마다 서로 인사하며 소리치기도 하고 발길질도 하는(진짜 막 발로 차 버린 것이 아니라 그냥 서로 장난을 치는 정도?) 그 정도 사이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났을 때 내가 대뜸 노래를 부른 적도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선배인데 갑자기 무슨 노래를 불러? 그리고 왜 소리를 치면서 인사를 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사이코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나도 아무한테나 그러는 것이 아니라 서로 그런 행동을 해도 이상하지 않은 사이인 그런 사람들에게만 하는 것이었고, 방선임도 그런 사람 중에 한 명이었다.
방선임도 꽤 유쾌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런 내 인사에 늘 화답하고 맞장구를 쳐주었는데 그런데도 난 가끔 방선임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내가 봤을 때, 그는 감정 기복이 좀 심한 편이었다. 본인이 기분이 좋을 때면 내가 요란법석을 떨며 인사하기도 전에 먼저 시끄럽게 인사도 해주고, 내 노래와 발길질에 화답해주었지만, 본인이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날에는 내가 인사를 해도 잘 받아주지 않았다. 내가 웃으면서 다가가도, 크게 반응하지 않았고 간단한 목례를 하고 자리를 벗어났다.
꽤 친한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리고 내가 먼저 그러기도 전에 먼저 재미있게 인사를 해줄 때도 있었으면서, 본인 기분 내키는 대로 거리를 두는 그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괜히 내가 큰 잘못을 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좀 쉽게 표현하면 마음이 '짜게 식는다'는 느낌이었다. 그럴 때면 '다음부턴 절대로 장난치지 말아야겠다. 내가 저 인간한테 또다시 이렇게 인사하나 봐라!' 싶었다. 그래서 내가 거리를 둘라치면, 또 방선임이 먼저 와서 장난을 치고, 인사를 해줬다.
이쯤 되자, 내가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 동기들에게 방선임에 대해서 물어본 적이 있었다.
"언니, 근데 방선임 있잖아. 성격이 어때?"
"방선임? 글쎄? 너랑 친하지 않아?"
"아, 뭐 친하다기보다 그냥 편하게 인사는 하는 사인데,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한 것 같아."
"아 진짜? 그건 잘 몰랐네?"
"심해. 어쩔 때는 막 잘해주다가, 어쩔 때는 엄청 거리 두고 정색하고 그래. 좀 이상해."
가끔 그에 대한 불평을 털어놓은 적은 있었지만, 그래도 그가 감정이 다운되어 있지 않을 때는 유쾌한 사람이었으므로 다 같이 여럿이서 치킨을 먹으러 간다거나, 카풀을 한다거나 그랬던 적도 있었다. 그렇게 내가 입사하고 2년이 넘게 지났다.
그러던 어느 날, 난 그때 막 전략팀으로 팀을 옮겨서 일을 시작했고 회사에선 큰 행사가 있었다. 전 직원이 참여해야 했고, 모두 행사장으로 집결했다. 거의 전 직원이 왔다 갔다 하다 보니 난 자연스럽게 방선임과 마주쳤다.
"오, 김선임! 오늘 행사라서 옷 예쁘게 입고 오셨네요!"
"오, 방선임님도! 오늘 간지 나게 하고 오셨네!"
그렇게 익살스러운 인사를 마치고 방선임은 내 뒤를 지나갔다.
그리고 몇 초가 지났을까? 내 눈앞에 또다시 방선임이 나타났다. 분명 좀 전에 방선임은 내 뒤를 지나갔는데? 이게 무슨 일이지? 난 순간적으로 당황해서 몸이 굳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신비체험인가? 심지어, 방선임은 좀 전과는 다른 옷을 입고 있었고, 아까와는 다르게 좀 피곤해 보였다. 아득해지는 정신을 부여잡고, 방선임이 지나간 길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 근데 이게 무슨 일이야! 내 앞에도 방선임이 있고, 내 뒤에도 방선임이 있었다. 난 아무것도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고, 또 다른 방선임도 내 옆을 지나 뒤로 갔다. 나는 동기들에게 뛰어갔다.
"오빠! 오빠, 지금 방금 지나가는 사람 누구야? 저기 파란색 입고 있는 사람! 지금 엘베 앞에 서 있는 사람? 그리고 저기 저 뒤에 화장실 쪽에 서 있는 사람은?"
"야, 왜 그래? 저 엘베 앞에 있는 사람? 이책임님?"
"어? 이책임님? 저 화장실 쪽은?"
"저 사람은...너랑 친하잖아. 방선임!"
"뭐라고? 두 사람이 지금 다른 사람인 거지?"
"뭔 소리 하는거야...너 아까 방선임이랑은 인사하지 않았어?"
동기의 설명에 의하면, 내가 익살스러운 인사를 나눴던 사람은 방선임이고, 내 앞에 두 번째로 나타난 방선임은 방선임이 아니라 이책임이었다.
"오빠, 저 둘 좀 닮지 않았어? 저 둘이 무슨 사이야?"
"아니야. 무슨 소리야? 그리고 저 둘 나이 차이 꽤 많이 나. 방선임보다 이책임이 훨씬 나이 많아."
"진짜? 나 저 둘이 다른 사람인 거... 지금 알았어...!"
입사 3년 차에 알게 된 대반전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방선임과 이책임이라는 사람이 동일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지냈던 것이다. 그제야 미스터리했던 방선임의 감정 기복의 이유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실제로 이책임은, 나보다 훨씬 나이도 많고 입사 시기도 차이가 많이 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와 제대로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 내가 지금까지 방선임이라고 생각하고 했던 어떤 행동들 중 일부는, 아마도 이책임 앞에서 한 행동들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내가 요란스러운 인사를 할 때 목례를 하고 지나갔던 사람은 방선임이 아니라 이책임이었을 것이다...!
난 이 사실을 알자마자, 방선임에게 뛰어갔다. (한편으로, 방선임이 실제로 감정 기복이 심한 것이 아니라 정말 편하고 좋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기쁘기도 했다.) 난 방선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지금까지 내가 했던 행동들을 맞춰보기 시작했다.
"방선임님, 혹시 저랑 치킨 먹은 건 방선임님 맞죠?"
"치킨은 나 맞아요. 그건 내가 아닌 건 말도 안 되잖아요."
"그럼 혹시...내가 아이언티 닮았다고 한 적 있어요?"
"아니...그건 그런 적 었는데..."
"뭐라고요? 헐...어떻게 해....이책임이라는 사람한테 했나 봐...."
"근데 잠깐, 김선임님. 내가 아이언티 닮았어요?"
"네. 왜요?"
"진짜? 말도 안 돼..."
"뭐가 말도 안 돼요? 어떻게 보면 옆모습만 살짝~ 닮았는데...아이언티 노래 정말 좋은데."
"지금 노래 닮았다고 한 게 아니잖아요..."
"아 됐고요. 혹시 내가 로또 당첨됐다고 자랑한 적은 있어요?"
"아, 그건 나 맞아요. 그때 오천 원 됐다고 자랑했잖아요."
"아...다행이다."
방선임과 이야기를 나눠본 결과, 자잘한 인사 실수 같은 것들은 알아내기가 어려웠고, 마음에 걸리는 실수는 딱 하나였다. 뜬금없이 이책임에게 아이언티 닮았다고 얘기한 것. 나는 이책임에게 이 사실을 말하고 사과할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결국 그에게 어떤 사과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방선임은, "아 근데, 내가 이책임님보다 훨씬 나이도 어리고, 자세히 보면 훨씬 나을 텐데... 2년 넘게 헷갈리고 있다는 게...그리고 아이언티를 진짜 닮았어요?"라며 섭섭함을 표했다. 이 날, 동시에 같은 장소에서 방선임과 이책임을 목격한 뒤로는, 신기하게도 그 둘이 전혀 헷갈리지 않았다. 이렇게 단번에 알게 될 거였으면, 진작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미안합니다. 이 책임님!(그래도 그다음부터는 마주칠 때마다 엄청 깍듯하게 인사하며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