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구관이 명관인가, 아닌가?_(1)

[25~31개월] 명관이다.

by 하이히니

난 그렇게 전략팀에 가게 되었다. 권팀장, 하수석, 옥반지, 나, 박상호 주임, 김지수 주임, 경우씨는 나름 합이 좋았다. 물론, 예상대로 김지수 주임이나 경우씨는 그다지 좋은 사람은 아니었고, 개인적으로 만났다면 절대로 가깝게 지냈을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곧 떠날 사람이라는 생각에 참을 수 있었다.


이 팀에 오기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김지수 주임은 밑도 끝도 없이 헤헤거리면서 애교를 부리는 타입이었다. 나에게도, ‘선임님~헤헤. 이거 너무 어려워요오~.’처럼 말을 걸었고, 남자 팀장들에게는 팔짱을 끼고 앙탈을 부렸다. 자신의 애교가 잘 먹히는 부류의 사람들을 귀신같이 골라내서, 그런 타입의 남자들에게는 더욱더 적극적인 애교 공세를 펼쳤는데, 그건 정말 내 입장에서는 현기증 나는 행동이었다.


본인이 해야 할 일도 은근히 박상호 주임에게 떠미는 것 같았다. 박상호 주임이 너무 바쁠 때만, 꼭 해야하는 일을 꾸역꾸역 하는 타입이었다. 그녀의 업무는 간단한 영수증 처리 정도였는데, 그것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김현수 선임니임...저 이거 모르겠어서요오...이거 엑셀이 너무 이상해요오...이거 봐주시면 안될까요오?”

“엑셀 어떤 게 이상한데요?”

“이거 갑자기 숫자가 1.23E+ 막 이렇게 나와요오...제가 뭐 잘못했나봐요오...도와주세요.”


1.23E+? 설마 싶었다. 엑셀 칸에 비해 숫자의 단위가 커지다 보면, 저런 식으로 숫자가 표기되는 경우는 매우 흔했다. 이건 칸을 조금 넓혀주기만 하면 해결되는 간단한 상황이었다.

“혹시 엑셀 칸 넓혀봤어요?”

“네? 칸을 넓히라구요? 왜요오?”

“그럼 숫자 제대로 보일 거예요. 간단한 건데...”

“선임님...저 무서워서 그런데 와서 해주시면 안될까요오? 제가 하면 괜히 망칠까봐...무서워서...”


휴...난 손수 그녀의 자리에 가서 엑셀 칸을 넓혀주었고, 숫자는 정상적으로 표기되었다. 그녀의 자리의 키보드, 마우스, 물컵, 필통, 연필꽂이 등 모든 것들은 헬로키티와 분홍색으로 도배되어 있었고 그녀가 40대라는 사실이 새삼 낯설게 느껴졌다.


한편, 경우씨는 생각보다 훨씬 더 겉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행사장에 가서 촬영만 하면 되는데 그 일정을 숙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행사 일정보다 권팀장의 대리기사 일정이 더 깊게 자리 잡은 것 같았다.


가끔 김지수 주임과 경우씨가 거슬린 적은 있었지만 업무에서는 거의 배제되어 있는 사람이었고, 정말 ‘곧’ 떠날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그들과도 잘 지낼 수 있었다.


물론, 팀장을 제외하고 실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하수석, 옥반지, 나, 박주임 이렇게 네 명뿐이라는 것이 좀 버겁기는 했다. 하지만 좋은 사람들과 함께 일한다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이었다.


특히 하수석님에게는 고마움이 컸다. 보직자를 하다가, 심지어 본부장님을 하다가 실무를 하게 되었는데도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업무에 임했기 때문이다. 전략팀에 오기 전에 일할 때는 정말 가끔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그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래서, 이때 내가 참 바보 같은 선택을 하나 했다. 내가 일하고 있던 B 기관은 내가 3년 차에 접어들면서 지방이전을 한 상태였고, 서울에서 근무하고 싶었던 나는 꾸준히 이직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략팀에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회사에 최종 합격하게 된 것이다. 그 회사에서는 원래 받던 연봉보다 500만 원 정도 더 높은 연봉을 받을 수 있었고, 평생 서울 근무가 보장되었다. 대외적인 위상도 비슷했다. (혹은 좀 더 나은 곳이었다.) 그래서 엄청 고민이 되었지만, 내가 언제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랑 일을 해볼까 하는 생각에, 최종 합격한 곳을 포기했다.


당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난 어리고 능력 있고, 내 능력으로 언제든 이직할 수 있지만 이렇게 좋은 팀을 만나는 건 어려운 일이야. 이런 팀을 만났으니 이 순간을 즐기며 일하자!’


지금 생각해보면, 이때의 나의 멱살이라도 잡고 정신 차리게 뺨이라도 올려치고 싶지만, 정말 저 때 팀 분위기가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문득 권팀장이 도대체 왜 직권남용으로 신고를 당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정말, 권팀장이 많이 억울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뀌게 되었다.


어느 날, 권팀장은 회의실로 나와 옥반지를 불렀다.

“이렇게 둘 만 회의 소집한 건, 부탁할 게 있어서 그래”

“부탁이요?”

“어. 지수 있잖아? 몇 달 있으면 지수가 2년 근무 다 끝나거든.”


난 이때까지, 2년 지나면 김지수 주임이 퇴사해야 하니까 함께 선물이나 해주자는 건 줄 알았다.

“아, 2년 다 끝났구나. 나가셔야겠네요 곧.”

“어. 그래서 회사 쪽에 김지수 주임을 무기계약직이나 정규직으로 전환해달라고 부탁해볼까 하거든? 몇 달 동안 좀 눈에 띄는 업무들 시키고, 나랑 인사팀장이랑 친하기도 하니까.”

“근데, 저희 회사는 일 잘하는 계약직도 2년 있다가 나갔는데, 김주임은 업무라는 걸 거의 안 했잖아요. 가능할까요?”

“그러니까 너희한테 부탁하려고...너희가 하던 업무 중에 중요했던 거 몇 개는 지수가 했다고 하면 안 될까?”


나와 옥반지는 당황한 나머지 동시에 “네???”라는 말을 내뱉었다.


“너흰 워낙 업무 많으니까, 몇 개 정도 너희가 안 했다고 해도 괜찮잖아. 내가 하수석님한테는 이런 부탁드리기 좀 뭐하잖냐...내가 몇 개 리스트 뽑아왔는데, 너희들이 한 것 중에 이것들만 지수가 했다고 하면 안 될까? 그리고 몇 달 동안은 실제로 너희가 그 업무 하더라도 지수가 했다고 말해주고, 또 지수가 메일도 제대로 못 쓰니까 너희가 메일 써주면 실제로 메일은 지수가 보내고. 어때?”


나와 옥반지는 서로를 바라봤다. 눈으로 이야기했다. ‘하...18...’


권팀장이 오랫동안 길러온 장발의 꽁지머리를 잘라버리고 싶을 정도로, 아니 그 이상으로 화가 났지만, 이런 속마음을 솔직하게 얘기할 수는 없었다.


“팀장님, 근데 이런 식은 좀 아닌 것 같아요. 그리고 박상호 주임이 먼저 계약 끝나지 않아요? 차라리 박주임님이 무기 되면 좋을 것 같은데…”

내가 운을 띄웠다.

“저도 현수랑 같은 생각이에요. 그리고 회사에도 절차라는 게 있는데...불공평하고요. 저희가 했던 일을 김지수 주임이 했다고 거짓말하면서까지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실제로 김주임 일도 못하잖아요.”


우리의 반응을 본 권팀장은 허탈하다는 듯이 ‘픽’ 하고 조소를 날렸다.

“미안한 부탁이었지만, 내 입장에서는 참 섭섭하네? 부족하고 일 못해도 팀원인데, 기뻐해 주면서 도와줄 거라고 생각했던 내가 안일했던 거였나? 지금까지 내가 너희를 잘못 봤네. 가봐라.”


정당한 거절 의사를 밝혔음에도, 권팀장은 우리에게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챙기려면 박주임도 같이 챙겨야지 김지수 주임만 챙기면서 팀원이니 뭐니 운운하는 건 뭐지?


회의실을 나온 나와 옥반지는 다시 업무를 시작했다.


근데, 갑자기 다른 층에서 근무하는 동기가 단체 채팅방에서 다급하게 메시지를 보냈다.


<단체 채팅>

동기: 야, 너희 팀 무슨 일 있어?

나: 왜?

동기: 지금 여기 회사 카페거든? 근데 김지수가 권팀장 앞에서 울고 있어.

옥반지: 뭐? 뭐라고 하는지 계속 들어봐.

동기: 권팀장 말로는, 너네가 일 양보 안 해줬대. 그래서 김지수가 울면서 ‘제가 괜한...욕심을 부린거죠오? 제가 너무 바보 같아서...저는 선임님들 너무 좋아했는데...흑흑’ 이러고 있어. 계속 울면서 자기는 이 회사를 너무 사랑하고 여기서 계속 일하고 싶다는데? 팀장님만 믿고 있겠대. 그리고 너네들이 너무 무섭다는데? 뭔 일이야?


김지수 같은 캐릭터. 정말 오랜만이었다. 생각해보면, 어릴 때는 저런 식으로 행동하는 여자들을 꽤 보긴 했다. 하지만 여자들의 사회에서 저런 캐릭터는 거의 매장되기 마련이었고, 나이가 들면서 저런 성격의 사람들도 사라지기 마련이었는데, 불혹에도 저런 스타일을 고수하는 사람을 목격하다니...!


김지수 주임이 권팀장 앞에서 한바탕 눈물을 쏟아낸 후, (박상호 주임과 경우씨를 제외하고) 급히 팀 회의가 소집되었다.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 고생한 지수가 곧 계약 만료입니다. 제가 인사팀에 공식적으로 건의해서 무기계약직 혹은 정규직으로 전환 요청을 할 예정입니다. 그러려면 몇 달 동안 눈에 띄는 업무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지수가 하던 영수증 처리는 당분간 현수가 맡아줬으면 합니다. 팀원으로서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네...”


난 대답을 하면서 기분 나쁜 것은 둘째치고, 박상호 주임이 너무 신경쓰였다.


솔직히, 팀장이 일도 못하는 김지수를 저 정도로 싸고도는 것을 보면서, 둘이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 대답을 들은 김지수는 또다시 회의 중에 눈물을 쏟았다.

“선임니임...저 때문에 괜히...일도 더 생기고...정말...제가 꼭 정규직 돼서 더 열심히 할게요오...”


예전에, 권팀장을 보면서 ‘왜 권팀장 주변엔 (특히 일 못하는) 계약직이나 파견직들만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실제로 권팀장 주변에는 계약직과 파견직 직원들이 많았고, 가깝게 지내는 정규직들도 알고 보면 애초에 계약직이나 파견직으로 입사했던 경우가 많았다. 이쯤 되니,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참고로 이 회사는 비정규직과 정규직 모두 급여가 같았다. 김지수 주임이 꽤 많은 돈을 받아가면서도 영수증 처리만 하는 것을 지금까지 감내했던 것은 어차피 2년 후에 떠날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답답했다.


어쨌든, 그녀는 몇 달 동안 중요한 업무를 맡게 되었는데 사실상 능력의 한계 때문에 중요한 업무를 주지도 못했다. 내가 봤을 때는 그냥 본인이 하던 간단한 업무를 모두 내게 넘긴 후, 남들이 차려놓은 밥상에 수저를 놓는 그런 형국이었다.


그녀의 새로운 업무 중 하나는, 아직 다른 지역에 있는 종이기록물과 일부 주요 전산 장치를 지방이전 지역으로 모두 옮기는 것이었다. 전산 장치를 옮기는 일은 전문 업체가 지원을 해준다고 했고, 기록물의 경우도, 기록물 담당자가 연도, 내용별로 정리해놓고 퇴사를 한 터라, 그냥 그 종이기록물을 옮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냥 업체가 제대로 옮기는지 확인만 하는 작업이었다.


근데 이런 식으로 정말 정규직 전환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애초에 저 두 가지 일 모두 전략팀이 하는 일도 아니었는데 어쩌다 이 일을 김지수 주임이 맡게 되었는지도 모르겠고, IT나 기록물 관련한 전공을 한 것도 아닌 사람이 이런 일을 맡는 것도 찝찝했다. (그녀의 전공은 철학이었음)


아무튼 그녀는 그 일 때문에 출장 가는 일이 잦았다. 근데 그 출장에 조금 이상한 점이 있었다. 가도 가도 너무 출장을 자주 간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진짜 이상한 점들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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