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1개월] 명관이다.
정말 이상한 건 그녀의 책상 위에 있는 달력이었다. 출장 가야 하는 일이 그렇게 많은데도, 그녀의 달력은 온통 개인적인 일정으로 빼곡했다. 가령, 자녀들과 뽀로로 공연 보는 날, 백화점 문화센터 원데이 클래스 같은 것들?
‘저 때는 분명 김지수가 출장 갔던 날들인데...저런 개인적인 일을 모두 취소하고 업무를 본건가? 아니면...’
그녀의 달력을 보며, 한참 생각에 몰두해 있는 나를 보며 권팀장은 약간 ‘어쩔 줄 몰라'했다. 그의 반응을 보니 뭔가 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왜? 왜? 지수 달력에 뭐 문제가 있...나?”
“아, 지금 제 자리에 있던 달력이 안 보여서...잠깐 보는데 여기에 뽀로로 공연, 문센 향수 원데이 클래스 이거 다 김지수 주임 출장 갔던 날 아닌가요?”
“아닐걸?”
“아, 그래요? 출장 신청서 확인해볼까...”
내가 출장 신청서라는 말을 내뱉자, 권팀장은 당황한 듯이 나를 붙잡아 세웠다.
“아, 잠깐. 잠깐. 잠깐. 그게 아니고. 내가 그날 출장으로 처리하고 그냥 다녀오게 했어.”
“네? 그럼 휴가를 안 내고 공연 보고 원데이 클래스를 갔다고요?”
“아니...요즘 지수가 스트레스가 많아. 정규직 될지 안 될지 여부도 걱정 많은 것 같고. 그게 사람 생사가 달린 문제인데 얼마나 스트레스 받겠냐? 근데 휴가도 없다고 하니까 그냥 팀장 권한으로 다녀오라고 했다.”
“근데, 출장 가면 돈 받잖아요. 교통비, 일비, 식비 다 나오는데 그 돈을 다 받고 휴가를 간다고요?”
“네 돈도 아닌데 왜 그래? 너도 보내줄까? 힘들지?”
“아니, 보내달라는 게 아니라. 어쨌든 휴가를 쓰고 가야죠. 출장비는 업무용으로 출장 가라고 편성해둔 예산인데...그리고 병원 가고 이런 급한 것도 아니고, 문센 원데이 클래스, 공연 같은 건 급한 것도 아니잖아요.”
이런 대화를 나누고, 권팀장은 괜히 뻘쭘했는지 팀 회의에서 “혹시 피곤하고 힘든데 휴가 없으신 분 있으면, 팀장 권한으로 그냥 출장으로 해드립니다~”등의 말을 남발했다. 이게 규정에 어긋나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하수석님, 나, 옥반지의 표정은 어두워졌고, 그런 건 알 바 없는 김지수 주임은 “꺄! 팀장님 최고오!!” 라고 소리쳤다.
개인적으로 부조리함에 대한 분노를 많이 느끼는 타입이었던 나는, 이런 권팀장의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그의 꽁지머리를 자르고 싶었던 것과 동시에 최종 합격했던 그 기관에 이직하지 않은 것을 미친 듯이 후회했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그때 어리석었던 나를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결정을 내린 다음에야 권팀장의 몰랐던 모습을 알게 된 것은 운명의 장난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김지수 주임은 종이기록물과 전산 장치를 옮긴다는 명목으로 출장인지 힐링인지 알 수 없는 나들이를 계속했다. 그러다 결국 대형사고가 터졌다. 전산 장치는 잘 왔는데... 10년 치 종이기록물이 아예 분실된 것이다! 심지어 이걸 알아낸 것도 김지수 주임이 아니라, 기록물 담당자로 새로 입사하게 된 직원이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되자, 김지수에게 언제나 든든한 나무 같았던 권팀장도 버럭 화를 냈다.
“아니, 김지수. 예전 담당자가 다 정리해둔 거, 그냥 업체가 제대로 옮기는지 확인하는 건데, 옮긴 다음에, 여기에서 보관실에 제대로 넣는지 그것만 보면 되는데. 이걸 제대로 확인 안 하면 어떡하냐? 어? 이거 어떻게 된 일이냐? 판을 다 깔아줘도 이걸 이렇게 망치냐? 어?”
“팀장니임...전 진짜 몰라요오...죄송해요...업체가 잘못한 것 같아요...전 최선을 다했는데...”
선즙필승이라는 말을 들어봤는가? 먼저 즙(눈물)을 짜내면 반드시 승리한다는 뜻이다. 김지수가 짜낸 즙을 보고 마음이 약해진 권팀장은, 기록물을 옮긴 업체를 쥐 잡듯이 잡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알게 된 사실! 알고 보니, 김지수는 당연히 그 업체들이 알아서 기록물을 잘 이관해줄 거라고 생각하고 출장이 있던 날은 아예 출근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업체가 짐을 잘 옮기는지 확인하지 않았고, 이전 지역에 기록물이 잘 도착했는지도 확인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고선 그냥 ‘업체가 알아서 잘했겠지.’ 하는 마음으로 어떤 검수도 없이 계약 완료 사인을 하고, 심지어 그 업체에 대해 ‘매우 만족’으로 만족도 조사까지 마쳤던 것이다.
종이기록물 10년 치가 분실되었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뭔진 몰라도 중요하니까 종이로 보관하고 있었을 것이고, 그 안에는 어쩌면 수많은 기밀사항과 개인정보가 들어있을 것이다. 그 종이기록물이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떠돌아다니고 있을 걸 상상하면 아찔했다. 물론 김지수의 무기계약직 혹은 정규직 전환은 물 건너간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이에, 그 자리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내고 있었던 박상호 주임의 계약 만료가 다가왔다. 권팀장은 박상호 주임의 송별 회식 자리를 마련하긴 했으나, 김지수 주임을 지원하는 것처럼 계약 연장을 알아봐주거나 하지는 않았다.
"박상호 주임님... 퇴사하면 당분간은 쉬는거에요? 우리랑 같이 일하면 좋을텐데..."
"선임님,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진짜 너무 아쉬워요."
"근데, 어차피 2년 계약인 거 알고 왔으니까. 저는 괜찮아요. 여기서 더 일하고 싶지도 않고요..."
그 간 본인의 속마음을 통 이야기 하지 않던 박주임은 송별회 자리에서야 나와 반지 언니에게 그간 회사를 다니며 권팀장, 김지수 주임, 경우씨 등등 때문에 힘들었던 일들을 털어놓았다. 김주임과 경우씨에 비해 권팀장에게 아부를 적극적으로 떨지는 못했으나, 지금까지 여러 부분에 있어 차별 받는다는 생각을 많이 해왔고, 이번에 김지수 주임의 계약 연장을 밀어주는 것을 보고 없는 정까지 몽땅 다 떨어졌단다...
솔직히 나같아도 그럴 것 같아서, 그의 행복을 빌어주며 그와 작별했다. 박주임이 퇴사했다는 것은, 김지수 주임의 계약 만료도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아직, 그녀가 친 사고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김지수는 거의 매일 권팀장 앞에서 눈물을 질질 흘리며 ‘제가 죽어야 될 것 같아요.’, ‘전 바보인 것 같아요. 최선을 다했는데...’와 같은 말들을 쏟아냈고, 그녀의 ‘즙’에 또다시 권팀장은 패배하고 말았다.
결국! 권팀장은 종이기록물 10년 치가 분실되었다는 것을 은폐했고, 정말로 그녀는 무기계약직이 되었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김지수가 나와 옥반지에게 반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분명 무기계약직이 되기 전에는, ‘선임니임~헤헤!’ 하던 사람이었는데...그녀가 변했다.
“현수, 이거 할래? 괜찮지?”
“네?”
“왜? 놀랐어? 내가 더 어른이잖아. 기분 나빠?”
놀랐냐고? 말이라고 하나? 진짜 놀랐다. 솔직히 정규직과 계약직끼리 선후배 기수를 따지진 않지만, 내가 입사일도 먼저였고 서로 사적으로 친한 것도 아니었는데, 갑자기 반말을? 당황스러웠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들 앞에선 또다시, ‘선임니임~’ 모드였다.
그녀는 무기계약직이 된 이후에도 팀에서 간단한 영수증 처리 업무만 했다. 매일 뭔가 대단한 것을 구매하는 것도 아닌데, 근무시간 동안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건지, 그녀의 역할이 무엇인지 참 많이 궁금했다. 그런데, 그런 궁금증을 품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회사 내 많은 구성원이 그녀의 무기계약직 전환 사유에 대해 궁금해하는 분위기였고, 그 당시 지나가다 만나는 다른 팀 직원들은 나를 만날 때마다,
“근데, 김지수 주임은 도대체 무슨 일 하는 사람이야? 왜 무기계약직 된 거야? 박상호 주임은 그렇게 나가고?”
“글쎄요...”
“권팀장이랑 무슨 사이 아니야?”
라는 질문을 던지곤 했다. 이런 분위기를 감지한 건지, 권팀장은 나와 옥반지를 불러서, 당분간만이라도 김지수 주임도 하는 일이 많다고 얘기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이 버거워서 옥반지와 나는 매주 함께 로또를 사며 회사 탈출 기도를 드렸다. 얼마나 간절했는지, 로또에 당첨되는 꿈을 꾸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정말 꿈일 뿐이었고, 현실은 냉혹했다. 우리와 권팀장 사이는 점점 멀어졌다.
어느 날, 권팀장이 “야, 옥반지 나한테 삐진 거 있냐?”고 하는 게 아닌가?
“반지 언니요? 왜요?”
“아니, 금요일에 휴가 낸다길래, 그냥 출장 신청하고 가라고 했거든? 근데 규정에 맞게 하는 게 좋다니 뭐니 이러면서 내 호의를 거절하네? 쟤 분명 나한테 삐져서 시위하는 거 아니냐?”
“그렇다기보다 그게 맞다고 생각하니까 그렇겠죠.”
“하, 참나. 아무튼, 현수 너는 내가 시킨 건 잘 되고 있어?”
시킨 것? 사실 잘 되고 있지 않았다.
권팀장은 얼마 전, 내게 이상한 지시를 내렸다.
“아...근데...제가 그 때도 말씀 드렸는데...그게 좀...”
“왜? 또 안 된다고 하게?”
팀장이 시키는 건 가급적이면 하고 싶었지만, 그건 정말 안 되는 일이었다.
"네...안 되죠."
"업체가 그거 그냥 해 준다니까? 이번에 업체가 견적 준게 300만원 이었나? 그거 그냥 400만원으로 견적 내달라고 해. 어차피 그 금액이면 그냥 비교 견적만 있으면 되니까. 그렇게 해도 업체가 이득이야."
"업체가 그냥 해주긴 하겠죠...근데 그게 하면 안되는 일이잖아요..."
내가 또 안 된다고 하자, 권팀장은, '그래, 이것까진 말하기 싫었는데, 이걸 말하면 납득을 하겠지.' 라는 표정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이번에 내가 정말 오랜만에 애들이랑 여행 가는거야. 숙소랑 숙소 근처 체험학습 하는 것도 다 해봐야 50만원? 이 쯤 되려나? 그러니까 업체한테도 이득이라니까?"
권팀장은 며칠 전, 업무 때문에 비용 처리 해야 할 업체가 있으면 업체가 보내준 견적서 보다 100만원 정도 더 높은 비용으로 견적서를 다시 받으라고 했다. 그리고 그 100만원 중 일부는 본인이 개인적으로 사용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난 이런 식으로 일하는 건 정말 회의적이었다.
“...팀장님, 근데...이거 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사실...”
“그러니까 너는 못하겠다? 아니. 안 하겠다?”
“안 하겠다가 아니라...이건 하면 안 되는 거니까...”
“이러니까 내가 너랑 옥반지를 편하게 생각할 수가 없는 거야. 사사건건 이런 식으로 태클에...그나마 지수가 무기계약직 돼서 내 편 되어 주니 다행이지. 무서워서 나도 내 편 더 만들어야겠다.”
권팀장은 ‘내 편’을 만들기 위해 또 어떤 무리수를 두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