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그들이 회사 빌런이 된 이유

[32개월] 빌런에게도 이유는 있다.

by 하이히니

본인의 요구 조건을 들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권팀장은 어느 순간부터 나와 옥반지에게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하는 것처럼 대놓고는 아니어도, 하수석님을 은근히 경계했다. 물론, 본인의 본부장이었던 사람을 팀원으로 두고 있는 것이 불편하긴 하겠지만, 뭔가 그 이상의 감정이 느껴졌다.


얼핏, 권팀장은 하수석님에게 열등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나와 옥반지가 하수석님을 따르는 듯한 모습을 상당히 싫어했다.

“현수, 너 하수석님한테 따로 고민 상담도 하고 그러냐?”, “너 혹시 이거 나한테 먼저 말한 거냐, 아니면 하수석님한테 먼저 말했냐?” 등등. 권팀장은 언제나 하수석을 의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권팀장은 김지수와 관련된 일로 점점 더 우리를 힘들게 했고, 나와 옥반지는 점점 더 하수석을 따르게 되었다.

“수석님, 요즘 권팀장님 진짜 심한 것 같아요. 김지수 주임 때문에 무리수 둔 것도 그렇고...그리고 수석님을 너무 심하게 경계하는 것 같아요. 이상하지 않으세요?”

“그냥, 권팀장이 보는 앞에서는 너무 나를 따르는 것처럼 행동하지 말고, 좀 이해해줍시다.”

“솔직히 권팀장이 왜 직권남용으로 신고당했는지 알 것 같아요.”


내 하소연을 들은 하수석님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몇 가지 이야기를 해주셨다.

“사실, 난 권팀장이 왜 저러는지 알긴 알겠어요.”

“왜요?”

“사실, 나랑 권팀장은 애초에 좀 다른 게 있어요. 나는 이 회사에 같은 대학 출신 선후배가 굉장히 많은데, 권팀장은 지방에 있는 작은 대학을 나와서...지지기반도 없고, 여러모로 힘들긴 했을 거예요. 뭘 하려고 해도 다 퇴짜 맞았을 거고, 그러다 보니 예전부터 본인 의견에 반하는 사람을 굉장히 싫어했죠. 권팀장은 선배가 자기 의견에 반대해도 못 참더라고요. 그래서 선배들한테도 많이 혼났어요. 자기랑 의견 다른 사람들이 말하면 듣지도 않고, 돌아 앉는다든가 풉풉거리면서 비웃거나...그랬거든.”


“네? 선배들한테도 그런다고요? 아니, 근데 불합리한 걸 시키잖아요. 제가 한 일을 김지수 주임이 했다고 거짓말해달라고 한다거나, 가족여행 비용으로 예산 쓰려고 하고...이건 다 말도 안 되는 거잖아요.”

“답답하긴 하죠. 근데 권팀장은 그게 서로 챙겨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자기랑 잘 통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든 끝까지 챙기려고 하고, 서로를 위해서라면 좀 문제 있는 것들도 별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죠. 좀 위험한 생각인데, 내가 여기에서 뭐라고 하는 거 자체가 월권인 것 같아서.”


그래. 뭐 사는게 다들 힘들었겠지. 근데 권팀장이 그런 아픔(?) 같지도 않은 아픔을 겪었다고 해서 나나 옥반지에게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을 이해할 순 없었다.


하수석님이 마지막으로 몇 가지 조언을 주었다.

“나도 권팀장이 좀 이상한 사람인 걸 알고 있어요. 나도 답답한 부분 많지만, 그냥 업무적으로 필요한 부분은 지원해주면서 지냅시다. 그리고, 가끔 회식에 참여해요.”

“회식이요? 근데...저희 회식을 일주일에 4번 정도 하잖아요. 너무 심한데...그것도 맨날 당일에 ‘오늘 고기나 먹을까?’ 이러면서...”

“사실 권팀장이 이혼을 해서...음...아이들은 엄마가 봐주고 있는 것 같고...집에 들어가는 걸 좀 싫어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회식을 좋아했고요. 아마 회식 불참도 본인에게 반대하는 거라고 생각할겁니다.”


생각해보니 김지수 주임과 경우씨는 단 한 번도 그의 회식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고, 언제나 그가 만족할 때까지 술자리를 함께했다. 그리고, 박상호 주임은 회식에 자주 참여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혹시 박상호 주임을 안 챙겼던 이유가 이런건가?


후... 이렇게 권팀장의 나름의 속사정 이야기를 듣다 보니 권팀장을 좀 더 이해할 수 이게 되긴 개뿔...오히려 더 찐따 같게 느껴졌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사람이 이상해지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이었다.


권팀장이 찐따가 된 이유를 생각하다가, 자연스럽게 내 의식은 '김지수'로 흘러갔다. 왜냐? 처음에는 김지수가 그저 단순히 멍청하고 교태 많은 여자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무기계약직이 된 이후에 그녀의 행동은 점점 이상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존댓말을 했던 그녀가 갑자기 내게 반말을 하는 것 까지는 그렇다고 쳐도 어느 순간 그녀의 행동은 이해의 범위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어느 날. 화장실에 갔는데, 그녀가 거울을 보고 있었다.


“어, 안녕하세요!”


난 반갑게 인사를 했지만, 그녀는 거울을 통해서 나를 흘끗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결국 인사를 하지 않더니 그냥 나가 버렸다. 뭐지? 약간 당황스러운 마음을 추스르고 화장실을 빠져나와 다시 내 자리로 돌아오는데, 바로 옆 팀에서 근무하는 한 책임님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김선임, 옷 예쁘다. 어디서 샀어?”

“아 이거요? 링크 보내드릴까요? 괜찮아요?”


그때. 갑자기 김지수 주임이 내 옆에 오더니 팔짱을 끼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맞아요오! 김선임님 이 옷 입으면 진짜 예뻐요오!” 라니?


아까 화장실에서는 날 못 본 건가? 긴가민가했다. 그때, 책임님에게 전화가 와서 자리를 뜨자, 김지수 주임은 팔짱을 푸르고 바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날을 기점으로, 제삼자가 없는 공간에서 김지수 주임은 내 인사(그리고 옥반지의 인사)를 절대 받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있는 공간에서는, 우리에게 웃으며 다가와서 애교를 부리고, 칭찬을 퍼붓는 탓에 도저히 적응할 수가 없었다.


정말 학창 시절에도 이 정도로 심한 여우를 본 적이 없는 나와 옥반지는,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지도 막막했다. 그러다가 몇 가지 사건을 더 겪으면서 우리들의 사이는 되돌릴 수 없이 멀어졌다. 당시 회사에서는 온갖 소모적인 일들을 많이 벌였는데, 그중 하나가 팀워크를 위해 팀끼리 사진을 찍고 사내 메거진에 게시하는 일이었다. 나를 비롯한 많은 직원들이 이런 이벤트에 치를 떨었다. 그렇게 촬영한 사진은 박제되어 영원히 어딘가에서 떠돌아 다닐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사진 촬영을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기 때문에 촬영 당일에는 좀 멀쩡한 모습으로 출근해야 했다. (참고로 평소에 나는, 거의 화장도 하지 않고 편한 옷차림으로 회사를 다녔다.)


근데, 사진 촬영 하루 전날, 갑자기 우리팀 사진 촬영 차례가 되었다는 안내가 왔다. 이게 뭐야? 이 꼴로? 촬영한다고? 그제야 팀원들을 둘러보았는데, 모두 단정한 옷차림에 김지수는 심지어 올림머리에 속눈썹까지 붙이고 있었다.


“팀장님, 오늘이 촬영이었어요? 내일 아닌가요?”

“어. 변경되가지고, 팀장한테만 연락이 왔길래 내가 지수한테 팀원 전체에 안내하라고 시켰는데, 다들 안내 못 받았나?”


그 사실을 안내받지 못한 건, 나와 옥반지 두 명뿐이었다.

“어머...전 다 말했던 것 같은데...제가 또 바보처럼 실수했나 봐요... 선임님들 화나셨죠? 어떡해요...하...저도 완전 까맣게 잊고 있어서 준비도 못했는데...”


속눈썹까지 붙이고 와서는 본인도 까먹어서 어떤 준비도 못했다고 울먹이는 꼴을 보니 또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이런 것들이 쌓여서 정말 상황은 일촉즉발이었다. 참고로, 난 이 날 화장도 제대로 하지 않은 천둥벌거숭이의 모습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러다가, 결국 그 일이 터졌다.


권팀장은 팀 내 대부분의 업무가 나, 옥반지, 하수석님 등에 몰려 있는 것이 불안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우리를 내치고 싶어도 내칠 수 없는 구조이다 보니, 권력의 분산 같은 것을 위해서라도 우리가 하고 있었던 업무를 나머지 팀원들과 나누고자 했다. 그래서 나와 옥반지가 하던 일 중에 아주 간단한 업무를 김지수에게 넘겨주기로 했다. 우린 관련 파일들을 정리해서 그녀에게 메일로도 보내고, 그녀 옆에 가서 설명도 해줬다. 하지만 김지수는 우리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안 그래도 일 못하는 김지수인데 간단한 것도 뭐가 뭔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 김선임님, 인수인계 해 주신 파일들 중에 작년도 파일 부분만 다시 보내주실 수 있어요? 못 찾겠어서.”

“주신 파일 중에 내년도 계획도 있었나요? 그것만 다시 보내주실 수 있나요?”


넘겨받은 파일에서 찾아보면 되는 건데, 한 번을 찾아볼 생각을 안 하고 입만 나불거렸다. 솔직히 우리 입장에서는 겁나 짜증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권팀장은 사장실에서 업무 보고를 하고 있었는데,


<팀 채팅방>

권팀장: 여기 사장실. 지수야, 이번에 반지한테 인수인계 받은 거 작년에 총 몇 건이었는지 확인 좀?

김지수: 넵! 근데 아직 옥선임님께 인수인계를 받지 못해서,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권팀장: 뭐? 얘기한 지가 언젠데. 반지야, 이번엔 작년 건수 네가 좀 확인하고, 빨리 인수인계 부탁.

옥반지: 네? 이미 여러 차례 인수인계했고, 자료도 모두 넘겼습니다. 김주임님 확인 후 처리해주세요.

김지수: 아...제가 더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 옥선임님이 메일로만 자료 보내주시긴 했는데...그걸론 파악이 좀 어려웠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이게 참 아다르고 어다르다고, 내가 인수인계를 마친 이후에도, 옥반지가 김지수에게 몇 차례 설명을 해줬고, 그래서 그걸 듣고 있는 나도 그 업무가 뭔지 대충 파악이 되는 상황이었는데 (아주 간단한 것이었으므로), 그리고 심지어 작년 파일은 김지수가 몇 번이나 재요청해서 그 파일만 따로 전송해준 적도 몇 번이나 있는데...역시, 옥반지도 이 상황이 참기 어려웠던 것 같다.


<팀 채팅방>

옥반지: 주임님, 제가 설명도 몇 차례 드렸습니다. 제가 언제 메일만 보냈죠?

김지수: 네. 맞아요. 옥선임님은 최선을 다하셨는데...모두 제 잘못입니다.

권팀장: 반지가 좀 더 설명도 해주고 친절하게 부탁한다.

김지수: 아닙니다. 제가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너무 죄송합니다.

권팀장: 다들 그만. 팀원들끼리는 감정 상하는 일 없이 가까이 지냈으면 합니다.

김지수: 넵! 저는 옥선임님 너무 존경하고 좋아해요. 정말 우리팀 모두 죄송하고 사랑합니다~


김지수가 진짜 속 마음이 저랬다면, 팀 채팅방에서만 저럴 게 아니라 바로 같은 공간을 쓰고 있는 옥반지에게 와서 업무에 대해 물어보거나, 죄송하다고 하거나 그랬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는 텀블러를 들고 휴게실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본 옥반지도 결국 이성을 잃었다.


<팀 채팅방>

옥반지: 김지수 주임님, 참 대단하신 분이네요.

권팀장: 옥반지. 너도 그만. 지수가 먼저 미안하다고 하고 사과하는데 예민하게 하지 마.


결국, 권팀장이 요청한 자료는 옥반지가 확인해서 보냈고, 몇 분 뒤 사장 보고를 마친 권팀장이 사무실에 돌아왔다.


그러자, 갑자기 ‘선즙필승’ 김지수가 울기 시작하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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