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사과녀 탄생

[32~3개월] 빌런에게도 이유가 있긴 있다.

by 하이히니

권팀장이 오자, 김지수는 돌연 눈물을 짜내기 시작했다.

“팀장님...제가 부족해서...너무 죄송합니다. 옥...선임님...선임님께도 너무 죄송해요...흡...”


정말, 저 순간 나는 내가 드라마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솔직히 옛날 드라마에서나 악녀들이 저렇게 돌변해서 눈물을 짜내고, 주인공 엿 먹이는 거 아니었나? 여긴 현실세계, 그것도 학교도 아닌 회사에서 어떻게 저럴 수 있단 말인가?


팀장은 그녀를 달래기 위해 그녀를 데리고 나갔고, 나와 옥반지는 잠시 벙쪄 있다가 다시 업무에 매진했다. (물론, 친한 동기들에게 이 상황에 대해 전달하며 욕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다음 날, 김지수 주임은 엄청난 양의 사과를 들고 왔다.

“제가, 어제 팀에 누를 끼친 것 같아서 사과의 의미로, 사과 가지고 왔어요. 맛있는 사과 드세요오~"


그러더니 그녀는, 권팀장 자리에 가서 “헿. 맛있게 드세요.”라는 말과 함께 사과를 건넸고, 하수석님에게도...경우씨에게도...그리고 주변의 다른 팀 사람들, 본부장님에게도 사과를 건넸다. 근데, 나와 옥반지에게는 사과를 주지 않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사과를 하고 싶다면, 최소한 옥반지에게는 사과를 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 많은 사과를 본부 전체에 돌리고, 인사를 하면서, 심지어 자리에 없는 사람들 책상에도 사과를 두고 포스트잇에 메시지를 남기면서 나와 옥반지를 빼놓다니? (안타깝게도 다른 사람들은 파티션 때문에 누가 사과를 받고 안 받았는지는 잘 모르는 눈치였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유치할 수 있는 건가?


빙그레 샹년(웃으면서 나쁜 말 하는 여자)처럼, ‘주임니임~저희는 사과 왜 안주세요오~ 저희 미워하지마세요오~ 저희도 사과 좋아하는 데에~ 속상해요~’라고 하고 싶었지만, 성격상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이렇게 유치한 상황에 대응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때부터 우리는 김지수를 사과녀, 아니 솔직히 말하면 사과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까지 사람이 이상할까? 우린 늘 궁금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린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어느 날 밤, 전에 같은 본부에서 일했던 어떤 오빠에게 전화가 왔다. 사과녀와 비슷한 시기에 파견직이나 계약직으로 입사한 사람들 중 업무 실적이 괜찮은 사람들 몇 명이 무기계약직이 되었는데, 무기계약직이 되면서 그들은 서로 동기를 하기로 했단다. 그들 중 저 오빠는 나와 같은 본부에서 일했기 때문에, 사적으로는 사과녀보다 나와 훨씬 가깝게 지내던 사람이었다.


“어, 오빠. 왜?”

“야, 오늘 그... 동기 모임 있었거든?”

“어.”

“근데, 김지수 좀 짠하더라. 좀 잘해줘.”

“오빠, 상황 다 알면서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어이없네ㅋㅋ 갑자기 동기 됐다고 챙기는 거야? 와...”

“이상한 건 나도 아는데, 김지수 좀 취해서 별 얘기 다했거든. 근데 좀 짠해.”


그의 설명에 의하면, 취해버린 김지수가 갑자기 본인의 개인사를 공유했단다. 현재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아 거의 별거 중이라나? 사실은 예전부터 이혼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늘 피임약을 먹는다나? (이런 얘기까지? 정말 많이 취했구나.)


“오빠, 이게 일 안 하고 울고 우리 엿 먹이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김지수가, 너희한테 열등감이 엄청 심한가 봐. 김지수 너희 학교 캠퍼스 졸업한 거 알아?”

“아니, 말 한 적 한 번도 없는데.”

“네가 본캠이니까 말하기 싫었겠지. 암튼, 너희 학교 지방 캠 나와서 그냥 널 보면 좀 신경 쓰이나 봐. 또 너랑 반지가 훨씬 어린데 정규직으로 먼저 입사한 선배잖아. 그런 것도 힘들었나 봐. 능력으로 인정받고 싶어도 그게 되지도 않으니까 너희 보면서 짜증 나고.”

“이 얘기 들으니까 더 짜증 나는 데? 내가 본캠 나오고 어린 정규직이라서 저런다는 거잖아. 누군 날로 먹고사는 줄 아나...”


그의 설명에 의하면, 김지수가 우리에게 못되게 구는 이유는 몇 가지 더 있었다. 우리 성격 자체가 싫단다. 사실, 우리는 회식을 잘 가지 않아서 그렇지 한 번 회식을 가면 (조금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회식자리를 주름잡는 스타일이었다. 둘 다 술 한 모금도 마시지 않지만, 상사에게 편하게 장난도 치고, 목소리도 큰 편이었다.


“본부장님, 근데 어깨가 좀 이상한 것 같은데요?”

“내 어깨? 왜?”

“본부장님 어깨가 좀 처진 것 같아요. 하...이제 어깨 위에서 회사의 미래와 우리들에 대한 책임감은 좀 내려두시라고요. 회식을 즐기셔야죠!”

“하! 참! 난 또 뭐라고! 진짜, 현수 정말.”

“여러분! 회사의 미래와 우리를 걱정하느라 쳐진 본부장님의 어깨 보이시나요? 다들 손가마를 만듭시다! 본부장님 타세요!!”


이러면서 옥반지와 손가마를 만들어서 너스레를 떨었다. 근데,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정말 애초에 친한 보직자들에게만 장난으로 저렇게 하는 것이지, 권팀장처럼 사이 안 좋은 사람에게 아부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걱정된다. 이런 얘기를 쓰면, 회사일기를 보면서 나를 응원해주고 공감해주던 사람들이, ‘아...김현수도 병신이었네.’라고 생각할까 봐 두렵다. 그저, 회사생활이 지속되면서 조금 능글맞게 변했다고, 그리고 정말 친한 사람들에게만 저런다고 생각해주시길)


반면 사과녀는 애초부터 목소리도 좀 작고, 재미도 없는 타입이었는데 우리 모습이 부러웠는지 우리 몇 번 따라 했었다. 하지만 같은 행동이라도 어떤 사람이 하면 어색하고 이상하듯이, 그녀가 그런 농담을 시도하면 오히려 분위기가 어색해지고, 그녀가 한 말이 다 묻히곤 했다. 그런 본인의 모습에 비해 우리가 너무 뭔가 다르니까 그 부분이 싫었던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과녀는 우리가 그녀의 무기계약직화를 막고 싶었다고 생각한단다. 권팀장이 그녀를 무기계약직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가 했던 일은 사과녀가 한 일로 바꿔달라고 했는데 그걸 거절했던 적이 있다. 사실, 이건 우리 입장에서 너무 당연한 거절이었지만, 사과녀는 이 일이 무척이나 섭섭했던 것 같다.

“현수야, 네가 더 많이 가진 사람이니까 그냥 김지수한테 조금만 더 잘해줘. 다 너희가 부럽고 질투 나서 이렇게 된 것 같아.”


통화를 하면서 나도 많은 생각을 했다. 물론, 사과녀를 이해할 순 없었지만 같은 팀 안에서 서로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피로감이 컸다. 가능하면 이 상황을 정리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사과녀에게 조금 더 친절하게, 업무를 가르쳐준다거나 먹을 걸 나눠준다거나 하는 화해의 제스처를 취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 김현수. 내일부턴 조금 노력해주자. 그래, 내가 노력한다!!!’


그렇게 그다음 날, 지난밤의 통화를 옥반지와 공유했다. 옥반지도, “그래, 우리가 좀 더 잘해주자.”라고 했다. 근데...


9시가 거의 다 되어, 사과녀는 여러 잔의 커피가 담긴 커피 캐리어를 들고 웃으며 출근했다. 그녀는 우리팀 쪽으로 오면서 “좋은 아침입니다아~ 커피 드세요!” 했다.


그리고, 나와 옥반지의 다짐은 바로 무너져 버렸다. 사과녀는 우리팀 전체에 커피를 돌렸고, 이번에도 나와 옥반지에게는 커피를 주지 않았다. 무슨 애도 아니고, 이게 무슨 미친 짓이야!!!


그렇게 사과녀에게 조금 더 잘해주겠다는 우리의 다짐은 물거품이 되었다. 오히려, 그녀에 대한 마음은 더 악화되었다. 한 번 잘해주겠다고 다짐한 상태에서 저렇게 재를 뿌리다니.


그러다 그 주, 금요일.

“안녕하십니까. 안내 말씀드립니다. 오늘 오후 4시경, 팀별 인원에 맞게 피자 1~2판을 간식으로 드릴 예정입니다. 해당 간식은 사장님이 직접 준비해 주셨습니다. 팀별로 간식을 드시며 좋은 시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나도 회사를 다니며 처음 겪는 일이었는데, 뜬금없이 사장님이 피자를 구매했으니 팀별로 피자를 나눠먹으라는 것이었다. 당일 팀장과 하수석님은 출장 중이었고, 나와 옥반지, 사과녀, 경우씨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쨌든, 우리 본부에서는 팀 별로 한 명씩 데리고 피자며 콜라며 소스 등등을 받으러 갔었다. 나랑 옥반지가 피자를 받으러 가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본부에서 팀 별로 한 명씩 데리고 갔으니 우리팀에서도 누군가가 피자를 받으러 갔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 기회에 사과녀랑 조금 더 가까워져서 이런 소모적인 갈등을 없애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팀에서 그 누구도 피자를 먹자는 얘기를 꺼내지 않았고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사과녀와 경우씨 모두 자리에 있지 않았다.)


4시 10분쯤 되자, 다른 팀에서는 모여서 피자를 먹기 시작했고 냄새를 맡고 배가 고파진 우리가 옆 팀에 껴서 피자를 먹었다.


그러자,

“선임님들, 선임님네 피자 먹지, 왜 여기서 먹어?”

“몰라. 주임님...우리팀 피자 안 받았나 봐.”

“에? 선임님네 팀, 김지수 주임이 피자 받았는데?”

“아 진짜? 피자 받으러 갈 때 김지수 주임 데리고 갔어?”

“아니, 나는 선임님들이랑 같이 가려고 했는데, 김지수 주임이 자기가 가지러 가야 된다고 그래서...”

“뭐? 우리한테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그렇게 찝찝하게 대화가 끝났었다.


그 팀과 함께 피자를 먹은 후에, 옆 팀 주임이 다시 말을 걸었다.

“선임님, 아까 사람들 있어서 말은 안 했는데, 그 피자 그거 김지수 주임이 집에 가져간 것 같기도 해.”

“왜?”

“피자 받고 주차장으로 갔거든. 근데, 선임님들이 김지수한테 막 피자 가지고 오라고 시켰어? 후배라고?”


여기까지만 듣고 뭔가 시나리오가 예상되서인지, 옥반지는 벌써 약간 격앙된 듯했다.

“아니? 왜? 뭐라고 했는데?”

“김지수 주임이, 옥선임이 가지고 오라고 시켰다고, 후배니까 알아서 하라고 그랬다고 하고, 또 김선임님도 자기 싫어한다고 그러고...난 선임님들이 그런 스타일 아닌 거 아니까...그러면서 자기가 피자 받아 가도 자기랑 먹기 싫어할 텐데, 그냥 집에 가져갈까 고민 중이라고...”

“미친 거 아니야?”


우린 결국 끝까지 우리팀이 받아 갔다는 피자 구경을 할 수 없었다. 다른 목격자들에 따르면, 그 피자는 사과녀가 경우씨만 데리고 가서 둘이 먹었단다. 이 일을 계기로 나는 사과녀를 갱생불가라고 판단했고, 우린 그렇게 영원히 멀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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