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36개월]경우씨는권팀장의아들인가?
얼마 뒤, 회사에는 채용형 인턴 공고가 나왔다. 인턴으로 채용해서 몇 개월 근무 후에, 그중 일정 비율을 정규직으로 전환해주는 자리였다. 그 즈음, 권팀장은 경우씨를 다시 호출했다.
“경우. 와 봐라.”
“넵!”
“이번에 공고 봤지?”
“넵!”
“이거 써.”
“아...근데 이게 될까요?”
사실 이 문제에 대해서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는 건 오히려 권팀장보다 경우씨인듯 했다.
“이번에는 너 혼자 하지 말고. 같이 한다. 일단 자소서는 바로 나한테 보여줘. 어떻게든 되게 만들어준다.”
"그래도...제가 선임님들처럼 정규직이 될 수 있을까요?"
"네가 쓰는 건 쟤네가 들어온 것보다 훨씬 경쟁률이 낮은 전형이야. 할 수 있을테니까, 이번엔 나랑 모든걸 다 상의한다. 알겠어?"
제발! 이런 얘기 할 거면 사적으로 사적인 공간에서 하라고! 사무실에서 버젓이 하지 말고!
팀장이 자소서 첨삭해주는 것도 웃겼지만, 그것보다 심각한 문제는 우리가 인사팀과 같은 본부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인사와 관련된 정보를 다른 직원들보다 쉽게 접할 수 있었고 심지어 팀장의 경우 어느 팀에 어느 정도 TO가 있는지, 누굴 선호하는지 등등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다.
이쯤 되자 나와 옥반지는 불합리한 것을 목격하는 것에 대한 피로감이 쌓여갔다. 경우씨가 일을 잘하는 사람이었다면, 정말 100번 양보해서...아니, 이것도 참을 순 없었다. 일을 아무리 잘하는 사람이어도 공정한 절차를 거쳐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근데 심지어 일이라는 것을 하지도 못하는 사람이 수작을 부리는 것을 보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어쨌든 그 날부터 경우씨는 일찍 퇴근하며 정규직이 되기 위한 준비에 돌입했다. 권팀장은 그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래도 정말 서류 합격이 되진 않겠지 하는 생각 뒤편에 평소 인사팀장과 가까이 지내는 권팀장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리고, 경우씨는 정말 서류전형을 통과했다.
“경우, 내가 뭐랬냐? 된다고 했지?”
“팀장님. 정말 믿기지가 않습니다. 팀장님은 정말 제 은인이십니다.”
“이런 말 하긴 이르고. 이 책들 받아.”
“네? 이게 뭡니까?”
“지금 인사팀 갔다 왔는데, 업체에 이거랑 유형 비슷하게 내달라고 했단다. 이것들 위주로 공부하고. 당분간은 회사에서도 그냥 공부하고.”
“그래도 됩니까?”
“어차피 일도 없잖아. 그리고 내가 여기 팀장인데 여기선 내 말이 법이야. 알겠어?”
부조리한 대화는 제발 사적으로 나누길 바랐지만, 언제나 내 작은 바람은 무참히 짓밟혔다. 저런 상황에서 경우씨는 거의 울먹거리며 본인의 감동을 표현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팀장님...전, 정말 팀장님 아니었으면...”
“야! 너 아끼니까 그러는 거야. 그럴만한 사람이니까. 고맙다는 말은 정규직 된 다음에 하는 걸로.”
팀에서 일하는 사람은 여전히 하수석님, 나, 옥반지뿐이었다. 경우씨와 사과녀는 권팀장 비위를 맞추느라 여념이 없었고, 간신들 속에서 권팀장의 판단력은 흐려질 대로 흐려진 상태였다. 우린 점점 권팀장과 멀어지고 어색해졌다.
권팀장의 전폭적인 지지와 응원 속에, 경우씨는 필기시험을 치렀고, 그 뒤로는 바로 면접 준비에 들어갔다.
“그래. 필기는 그걸로 봤으니까 거의 됐을 거다. 이제 면접 준비 같이 하자. 당분간 오후에는 나랑 모의 면접 진행하는 걸로. 너도 틈틈이 회사 업무에 대한 내용 살펴보고.”
‘그래...나는 내 힘으로 정규직이 된 거니까, 내가 맞는 거야. 내가 정상이지.’라며, 나를 위로해봐도 마음이 쉽게 위로되지 않았다. 도대체 난 여기에서 왜 천덕꾸러기 취급받으며 노예처럼 일만 하고 있는 걸까? 경우씨는 무슨 운을 타고났길래, 돈 받으면서 필기시험도 준비하고, 자소서 첨삭도 받는 걸까?
(참고로, 난 사람에게 평생 찾아오는 운의 양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다. 경우씨는 정규직 되는 데에 그 운을 사용했겠지만, 나는 그건 내 힘으로 했으니 다른 곳에서 운이 터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 뒤로 나는 내 평생의 운은 어디에 쓰일지 알아보기 위해 주기적으로 로또를 샀지만, 내 평생의 운의 포텐은 얼마 전 컵라면에서 터졌다. 역대급 많은 햄이 나옴..)
경우씨가 면접 준비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 필기 합격자 발표가 있었다. 솔직히, 난 그가 탈락하길 바랐다. 그러나 지금까지를 돌이켜 보면 회사생활에서 내 뜻대로 된 것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아등바등해도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었고, 넋 놓고 있다 보면 호구가 되어 있어서 내가 가지고 있던 것도 빼앗기기 일쑤였다.
그렇게 그날도 내 마음과는 반대로 경우씨는 필기합격자에 이름을 올렸다. 이쯤 되자, 난 정말 불안해졌다. 이런 부조리를 지켜보는 것을 떠나 진짜 문제는 우리팀에 경우씨가 채용형 인턴으로 오게 되는 것이었다.
우리팀은 업무에 비해 인원이 너무 적었고, 이번 공고를 통해서 한 명의 채용형 인턴이 팀에 배정되기로 되어 있던 상태였다. 하수석님이 하던 일을 서포트하고 나와 옥반지가 하던 일 중 잡무 일부를 수행할 사람을 받아야 했다. 채용형 인턴은 실질적으로 정규직 비슷한 정도로는 일을 해줘야 했고, 한 번 배정받으면 우리팀에서 계속 근무하게 될 확률이 높으므로 어떤 후배가 들어오는지가 우리에게는 굉장히 중요했다.
만약에, 이런 식으로 분위기가 흐른다면, 권팀장은 경우씨가 인턴이 되면 우리팀으로 무조건 그를 받고 싶어 할 것이고, 그는 팔다리가 있지만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조금 더 솔직하게 표현하면, 그냥 나랑 옥반지가 일 열심히 해서 경우씨 월급 더 주는 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고민을 하며 마음이 복잡한데, 권팀장은 이번이 확실한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이번 면접에 누구누구 들어가는지 내가 다 들어왔다. 일단 강 본부장은 아마 이번에 자기네 본부에서 하는 사업에 대해서 물어볼 거니까, 내가 보내준 그거 꼭 읽어보고 달달 외워 그냥. 그리고 너 지금 내가 하는 얘기는 받아 적어 그냥.”
경우씨는 권팀장이 하는 얘기가 마치 진리의 말씀인 양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하는 이야기들을 받아 적었다. 그러고선 그 둘은 면접날까지 계속 모의면접을 진행했다. 이 정도면, 권팀장이 고등학생 때 경우씨를 만났다면 서울대 의대라도 보낼 수 있지 않았을까?(물론 경우씨 상황상 어떻게 해도 설의는 절대 불가지만, 정말 권팀장이 스카이캐슬 급으로 그를 밀착 마크해줬다.)
누군 일하고, 누군 컨설팅받고. 제발 신께서 제대로 된 판결을 내려주길...! 기도했지만 역시, 회사생활에선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하나 없었다. 경우씨는 면접까지 통과해서, 채용형 인턴이 된다.
훗날, 이걸 내가 입수하는 것도 좀 웃기지만 채용형 인턴 합격자 명단과 그들의 필기시험 합격자 점수, 면접 점수 등이 정리된 자료를 본 적이 없다. 경우씨는 필기합격자이긴 하지만, 필기 합격자 중에 경우씨의 점수가 제일 낮았다. 이쯤 되면 모든 게 의심스러웠다. 정말 원래부터 경우씨 순위까지 합격을 시키려고 했던 건지 아니면 경우씨가 그 순위자여서 거기까지 합격자 처리가 된 건지 말이다. 혹시 권팀장이 손을 쓴 건 아닌지...
그리고 마지막. 정말 우리를 걱정하게 했던 한 가지가 남아있었다. 정말 경우씨가 우리팀 채용형 인턴으로 오는 건가?
“현수, 반지, 잠깐 나 좀 볼까?”
권팀장이 우릴 회의실로 불렀다.
“기쁜 소식은 다들 들었지? 경우가 정규직이 돼서 우리랑 계속 함께 갈 수 있게 됐다는 거?”
“아, 채용형 인턴 말씀하시는 거죠? 네 들었습니다.”
“어, 정말 잘된 일이지.”
권팀장은 세상 기뻐 보였다. 그리고 옥반지가 던진 한 마디에, 표정이 굳기 시작했다.
“근데 저희 팀 인턴은 누가 오나요? 확인해 보셨어요?”
“(굳은 표정으로 어이없다는 듯이) 무슨 소리야? 당연히 경우가 오지.”
“아 그럼, 하수석님 서포트 경우씨가 해요? 그럼 저희가 넘기려고 했던 것들은 경우씨한테 인수인계할까요?”
“아...근데 사실 나 너희들에게 부탁할 게 있어서 불렀어. 사실 경우는 계속 원래 하던 일을 시키려고 해. 워낙 그 일을 좋아하기도 하고. 그리고 당장 너희가 하는 것처럼 일 할 수 있는 역량은 없어. 앞으로도 어려울 거고.”
이건 데자뷔인가? 마치 사과녀를 무기계약직으로 만들려고 했을 때랑 비슷한 상황이 펼쳐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저렇게 경우씨가 아무 능력도 없는 사람인 것을 알고 있다는 것도, 그걸 우리 앞에서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것도 기가 찰 노릇이었다. 우린 말문이 막혔지만, 권팀장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무튼, 그래서 당분간 너희 둘 하던 일은 계속하고, 하수석님 필요한 부분은 너희들이 좀 나눠서 서포트해주면 어떨까?”
‘와...나 더 이상 못 참겠다.’
“팀장님. 근데 저희 일 많은 건 안 보이세요? 저희가 지금 여기 부양하러 온 것도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