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개월] 그들의신입 교육이시작됐다.
잠시 후, 동기들이 조달해준 휴지 덕분에 큰 일을 제대로 마무리 한 한기영씨가 편한 얼굴로 나타났다.
“한기영씨까지 왔으니, 오늘 봉사활동 간단하게 안내할게요. 4~5명이 한 조로 활동할 건데 조별로 조리 지원, 배달, 환경 미화 등 배정된 활동을 수행할 예정입니다. 지금 나눠드린 종이에 적혀 있는 조원들과 활동해주시면 됩니다.”
나는 남자 인턴 3명과 한 조가 되어, 환경 미화 활동을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나보다 나이가 많았는데도 깍듯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런 그들을 보면서, ‘이게 바로 신입이지!’라는 꼰대 같은 생각을 하다가, 이런 생각을 한 스스로에게 놀라기도 했다.
어쨌든, 그렇게 몇 시간 동안 봉사활동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러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선임님, 근데 선임님은 엄청 일찍 입사하셨죠?”
“진짜 선임님 입사 엄청 일찍 하신 것 같아요. 엄청 어려 보이시는데...바로 정규직 입사하셨죠? 지방이전하기 전에? 경쟁률 진짜 높을 때 입사하셨을 것 같아요.”
어려 보인다고? 녀석들... 정말 내 마음을 움직이는 방법을 아는구나! 흐뭇한 대화를 이어가는데, 갑자기 인턴 중 한 명이 경우씨가 부럽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저희는 불안해요. 이게 몇 퍼센트만 정규직 전환이니까... 그래서 경우씨가 많이 부럽기도 하고...”
“네? 경우씨가 왜 부러워요?”
“경우씨는 자동으로 정규직이라고 들었는데... 엄청 부럽죠.”
“왜 자동으로 정규직이에요?”
“네? 기술 전문직이라고 하던데... 원래 프리랜서라 정규직 할 생각 전혀 없었는데 기관에서 너무 필요해서 정규직 전환 바로 하는 거라고... 근데 절차가 필요하니까 이렇게 인턴 같이 하는 거라고...”
“누가 그래요?”
“아 어제, 권팀장님이 시간 되는 인턴들은 회식하자고 그래서... 죄다 회식하러 갔었거든요. 그때 권팀장님이 말씀해주셨어요. 경우 형님은 사실상 정규직이고, 동기이지만 선배라고 생각하고 잘 모시고 지내라고...”
“아... 회식을 했었어요?”
“선임님도 어제 오셨으면 좋았을텐데...권팀장님 말씀으로는 선임님은 시간이 안돼서 못 오신다고 했었는데... 김지수 주임님도 오셨었어요.”
물론 권팀장은 나에게 회식을 할 수 있는지 물어본 적도 없다. 물어본 적도 없이 내가 시간이 안돼서 못온다느니 말하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고, 저런 자리를 만들어서 회식을 하고, 그 자리에서 경우씨가 사실상 정규직이고 선배라느니 하는 소리를 했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전문직? 사진 찍는 것이 전문적인 일일 수는 있지만, 그는 국어국문학과 출신에다가 이 회사에 와서 처음으로 사진 찍는 일을 해보는 것이었는데...
그리고, 정규직 생각이 없었다고? 그럼 지금까지 권팀장이 자소서 첨삭하고, 모의 면접 보고, 정보 빼돌리면서 필기 유형 알려준 건 뭘까?
활동을 몇 시간 하다 보니 점심 먹을 시간이 되었고, 우리는 복지관에서 함께 식사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팀장님, 식사는 여기 복지관에서 하면 됩니다. 식사하고 오후 시간에 몇 시간 더 하다가...”
“아니, 근데 여기 식사는 맛이 없지 않나?”
“네?”
“그냥 근처 식당에서 먹지. 내가 경우한테 맛집 알아보라고 했어.”
“네? 근데 저희 법카 이렇게 긁을 상황도 아니고, 또 여기에서 점심 제공해주기로 했어요. 그래서 복지관에서도 평소보다 더 밥도 많이 했는데, 그냥 가버리면 복지관 입장이 뭐가 되겠어요.”
“애들 봉사활동도 열심히 했는데 굳이 이런 맛없는 걸 먹여야겠어? 그냥 나가서 먹지?”
“지금 12시 다 됐고, 우리 때문에 몇십 인분을 더 준비했는데... 이러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리고 어차피 오후에 계속 봉사활동할 거니까...”
“아, 근데 말이 나와서 그런데, 어차피 사진 찍을 것들은 다 찍었지?”
“네... 기사도 아마 지금 나갔을 거예요.”
“그럼 봉사활동 여기서 접자. 다 했잖아.”
“오후까지 하기로 했...”
“솔직히 봉사잖아. 복지관 입장에선 우리가 온 거 자체가 감사한 일 아닌가? 그리고 경우도 그렇고 경우 동기들도 다 고생했는데 이런 복지관 맛없는 음식 먹게 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아...권팀장 꽁지머리 짜르고 싶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권팀장 본인이야 저렇게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꾸면 그만이지만, 나는 복지관 실무 담당자랑 스케줄 조정하면서 채워주기로 했던 시간이 있고, 식사도 여기서 하기로 해서 식사 준비까지 더 부탁했는데, 이게 무슨 일이람?
“팀장님...근데 지금 이 내용 제가 이미 다 보고했던 내용인데 이렇게 하시면...”
“뭐? 또 나한테 뭐라고 하게? 나한테는 맨날 안 된다, 안 된다 소리 잘만 하면서, 복지관에도 안 된다고 하면 되잖아. 안 그래?”
너무 난감했지만, 이미 권팀장이 인턴들에게 예약한 식당으로 이동하라는 안내를 해버렸고, 난 복지관 담당자에게 봉사활동을 여기서 중단하고 외부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음을 알렸다.
“죄송합니다...”
“네...근데 봉사활동은 그렇다고 해도...식사는 저희가 이렇게 다 준비했는데... 지금 와서 이렇게 하시면... 정말 저희도 난감하네요.”
“너무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오셔서 사진 찍고 기분만 내고 가시면...”
죄스러운 마음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복지관 담당자는 답답해하면서도, 본인 표정보다 훨씬 더 침울한 내 표정을 보고, “선생님도 별다른 방법이 없으시겠죠... 알겠습니다.”라고 상황을 정리해주었다.
그 상황을 정리하고, 안내받은 식당으로 갔을 때 이미 식당은 거한 회식 자리 분위기였다.
“저희 권팀장님께서 간단하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답니다! 다들 술 말고 사이다로 가득 채워주세요!”
“아, 경우. 그냥 편하게 먹어. 어? 이런 거 하지 말고.”
“에이, 팀장님, 건배사 한 말씀해주세요!”
어차피 건배사 할 거면서 권팀장은 손사래를 쳤고, 결국 인턴들이 “팀장님! 팀장님!” 이렇게 환호를 보냈을 때야, 일어나서 건배사를 시작했다.
“식전인데 길게 말씀드릴 생각은 없고. 일단 너무 고생하셨고 술은 아쉽지만 다음에 하는 걸로. 그리고 다시 한번 저희 담당자의 불찰로 여러분이 여기까지 각자 오면서 불편 겪게 한 것 대신 사과합니다. 부디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는 걸로~ 담당자도 반성 많이 하고 있으니까~ 그럼 식사 맛있게 합시다! 혹시 김현수 선임, 하실 말씀 있나?”
내가 사과하길 바라는 듯했으나, 나는 “식사 맛있게 하세요.”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나만의 식사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렇게까지 내가 사과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권팀장을 보면서, 권팀장이 정말 알량한 권력에 취해있구나, 경우씨와 그 동기들 앞에서 그걸 보여주고 싶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나 빼고 모두 신난 분위기에서 식사를 하는데, 갑자기 식당에서 웅성거림이 느껴졌다.
“부사장님!”
“어, 안녕하십니까!”
근처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부사장님이, 인턴들이 근처 식당에서 식사 중이라는 얘기를 듣고 식당까지 방문한 것이다. 왕놀이에 취해있던 권팀장이 부사장님을 보고 화들짝 놀라더니 그의 곁으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부사장님, 어떻게 여기까지...”
“아, 권팀장. 기사 봤어. 근처에 있다가 그냥.”
부사장님을 보고 안절부절못하는 권 팀장의 모습이 약간 웃기기도 하고, 평소 꽤 친하게 지내던 부사장님이 반갑기도 해서, 일부러 더 보란 듯이 부사장님에게 인사했다.
“부사장님~”
“어, 김선임! 기사 보고 여기 김선임 있을 줄 알았어. 일도 많은데 급하게 꾸리느라고 고생했네.”
“아닙니다. 식사하셨어요?”
“응. 맛있게 먹고. 권팀장, 김선임한테 좀 잘해줘. 이런 직원 없어.”
갑자기 그 자리에서 부사장님은 내 칭찬을 하기 시작했고, 권팀장은 어색한 웃음으로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웃음을 보였다.
“권팀장, 이건 내가 계산하고 갈게. 그리고 인턴분들도 오늘 하루 고생 많으셨고,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우리 김선임처럼만 하면 아주 100점입니다. 100점!”
부사장님의 한 마디에, 인턴들은 식사를 중단하고 연신 직각 인사를 하며 "감사합니다!"를 외쳤다.
"감사는 무슨. 이게 내 일이지 뭐. 어쨌든 김선임, 고생했어~"
후...갑작스런 부사장님의 등장과 그의 지원사격이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그래도 어딘가에 내가 일하는 걸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니 그거면 되었다...! 그리고, 정말 웃긴 건. 권팀장이 담당자 불찰이니 뭐니 헛소리 할 때는 나를 은근히 깔보던 (일부)인턴들이, 부사장님이 내 칭찬을 하고 갔다고 눈에 띄게 깍듯하게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나도 인간인지라, 인턴들 중에서도 처음부터 나에게 인사도 잘하고 싹싹한 친구들에게 호감이 갔고, 싹싹한 친구들을 칭찬하는 내게, 선배들은 ‘현수 너도 이제 슬슬 꼰대가 돼가는구나.’라는 말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