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40개월] 후배가 선배가 되는 순간?
그렇게 우리팀에는 두 명의 채용형 인턴이 들어왔다. 인력이 충원되면 기뻐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 두 명이 소위 말해서 ‘낙하산’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둘은 앞으로 몇 개월 동안 우리팀에 있으면서 업무를 수행할 예정이었고, 그 뒤에는 조별 발표, 문서 작성 등 정규직 전환 심사를 받아야 했다. (그들에게 이런 것들이 큰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경우씨는 파견직 시절부터 해오던 업무만을 고수하고 있었고, 윤주씨는(남자인데 이름이 윤주였다. 성이 윤이고 이름이 주였음.) 하수석님이 하는 국회 관련 업무를 지원하게 되었다. 사실상, 그 둘의 등장이 나나 옥반지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고, 우린 여전히 힘들고 바쁘게 지냈다.
경우씨야 원래부터 버리는 카드였지만, 윤주씨에게는 실낱같은 희망을 걸었는데... 그는 아무리 일이 바빠도 9시부터 6시까지 근무 후 정시 퇴근에, 6시 1분에 업무 카톡을 보내면 절대 답장하지 않다가 그다음 날 9시 1분이 돼서야 답변을 했다. 그 어떤 일이 있어도 6시 1분부터는 일하지 않았다. (나도 저렇게 살고 싶은데, 왜 난 저렇게 살 수 없는 걸까?)
그의 방어적인 업무태도가 신경 쓰였지만, 점점 더 그를 볼 기회는 줄어들었다. 국회 관련 업무가 점점 더 바빠질수록, 권팀장, 하수석님, 윤주씨는 출장비를 받으며 거의 매일 서울에 붙박이로 지내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나는 그런 식의 장기 출장 보다, 온갖 지역을 왔다 갔다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고, 아마 그날도, 기차역을 가던 길이었던 것 같다. 갑작스럽게 권팀장에게 전화가 왔다.
“현수~ 지금 뭐 하고 있나?”
“네. 팀장님. 지금 일 끝나서 기차역 가고 있어요. 가능하면 실장님한테 오늘 보고하려고요.”
“어. 근데 혹시 내일 하루만 더 서울에 있을 수 있나? 서울 좋아하잖아.”
“네...근데 제가 준비하는 행사가 바로 코앞이라 오늘 보고하고 괜찮으면 세팅을 시작해야...”
“알지. 근데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하루만 더 있는 걸로.”
“어떤 일인데요?”
“지금 윤주가 좀 바빠. 국회 일 지원하는 걸 좀 도와줘야 할 것 같아.”
띠용??????? 네???? 뭐라고요???????
“근데, 윤주씨 국회 업무 지원하는 것만 하는데...뭐가 바빠요?”
“국회 업무가 지금 포화 상태라...윤주가 너무 바쁘다. 좀 도와줘야 할 게 있어.”
“근데, 하루 더 쓰면 제가 하는 일이 너무 빠듯한데...지금도 빠듯하고.”
“쉬운 일이다. 그냥 노가다니까 부탁한다.”
그래. 누가 엄청나게 바쁘면 팀원으로서 도와줄 수도 있지. 근데 내 발등에 불 떨어진 상황에서, 내가 총괄인 행사가 코앞인 상황에서, 내가 윤주씨의 일을, 그것도 노가다인걸 지원해야 한다니 조금 웃겼다. 게다가 사무실에서 근무할 때 그는 6시 1분만 되어도 자리에 없었던 직원이었기에, 진짜로 그가 바빠서 그런 건지 그에게 일을 시키기가 껄끄러워서 나한테 시키는 건지 의구심이 들었다.
이제 선배 뒤치다꺼리하는 것도 모자라서 후배 뒤치다꺼리도 하게 되었구나!
어쨌든,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니 나는 결국 서울에 남아서 국회 관련 업무를 돕기로 했고, 내 행사는 내가 밤을 새워서라도 준비를 해야겠다는 노예 마인드를 세팅했다.
그렇게 다음날, 난 서울에 있는 사무실에 출근을 했고, 어쩐지...바빠 죽겠다던 윤주씨는 회사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 현수 왔네.”
“팀장님. 안녕하세요.”
“어, 오늘 하수석님이랑 국회에 기관 소개 자료 돌리면 되거든? 몇 백권 될 거야. 의원실마다 돌아다니면서 나눠주면 되는 거야. 쉬워.”
쉽다고? 내가 알기로 이 일은, 체력적으로 개빡세기로 유명해서 보통 나이가 있는 남직원 1명과 젊은 남자 직원 2~3명이 함께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나이 많은 하수석님과 저질 체력의 여자 직원 나 한 명. 이렇게 두 명을 보낸다고? 이런 일은 나보다 남자인 윤주씨에게 시키는 게 더 나은데도?
“조심히 다녀오시고, 두세 시간 정도면 끝날 겁니다.”
어쩐지 하수석님과 나를 국회로 보내는 권팀장의 표현은 더없이 밝아 보였다. 두세 시간 정도 걸릴 거라는 그의 말과는 다르게, 그날 우리는 7시간 정도 소개자료를 돌렸다. 나는 구두를 신고 가방에 수십 권, 손에 수십 권의 소개 자료를 계속 들고 다니느라 팔 쪽 살이 다 터져서 멍까지 들었다. 쉴 곳도 마땅치 않았다.
“김선임, 몇 권 더 나한테 줘요. 이러다 쓰러지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수석님...괜찮아요...이미 수석님도 너무 많은데...”
“괜찮으니까...좀 더 넘겨요.”
괜찮다는 하수석님 얼굴도 실신 직전이었지만, 나도 체면을 차릴 상황은 아니었다.
서로를 다독여가며 7시간의 대장정을 마친 끝에, 우리는 겨우 회사로 돌아가는 택시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그때, 옥반지에게 전화가 왔다.
“야, 너 괜찮아? 지금까지 한 거야? 왜 전화를 안 받아?”
“나 지금 끝났어. 진짜 죽을 거 같아.”
“이거 권팀장이 엿 먹이려고 시킨 거 같아. 이거 원래 매년 남자애들 몇 명씩 달고 갔었는데.. 권팀장은 팀장 되기 전에도 다른 팀에 요청해서 남자애들 착출 해서 데려갔었어.”
“그랬다고? 미친...”
“그리고 이번에는 권팀장이 착출 할 필요 없다고 했대. 시킬 사람들 있다고. 그게 하수석님이랑 너라니까? 지금 윤주씨는 뭐해?”
그랬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권팀장은 소개자료 돌리는 일을 할 때마다 다른 팀에 착출 요청까지 하면서 젊은 남자 직원들을 대동했었다. 이 정도면 일부러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언니의 질문대로 도대체 지금 윤주씨는 뭘 하고 있는 걸까? 언니와 통화하면서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하수석님, 근데 윤주씨는 오늘 왜 바쁜 건데요?”
“윤주씨? 오늘 웨딩 촬영 갔는데?”
웨딩...뭐?
“네?”
“윤주씨 몇 달 있으면 결혼하잖아. 오늘 촬영 있다는데 권팀장이 얘기 안 했어?”
웨딩...촬영?
“권팀장님이...윤주씨 업무가 너무 바빠서 지원이 필요하다고 해서 온건데...지금 웨딩 촬영이라고 하셨어요?개인적인 웨딩 촬영이요? 지금 휴가가 아니라 출장 처리인 상태죠?”
“어...맞어. 몰랐구나..."
정말 저 순간 미치는 줄 알았다. 눈 앞이 정말 잘 안 보일 정도로 피가 머리로 쏠리는 느낌이었다.
"그건 휴가 내고 가야 되는 거 아니에요? 휴가가 없으면 주말에 가든가?"
"걔가 금요일이랑 토요일엔 대학원 간댔나...금요일에 대학원도 거의 매주 갔어. 웃긴 거지 뭐. 출장비도 받고 수업도 듣고...권팀장은 이걸 또 용인해주고.”
왜 이렇게 윤주씨의 편의를 봐주는 걸까? 전화 한 통이면 윤주씨를 채용해야 할 정도로 대단한 낙하산을 타고 온 사람이어서? 이유가 어떻든, 이건 아니다. 이건 너무한 일이었다.
“나도 권팀장한테 김선임이 지금 업무 바빠서 이런 식으로 동원하는 거 안 좋을 거라고 여러 번 말했어. 윤주씨는 출장비까지 쥐어줘 가면서 대학원 계속 가게 하는 것도 그렇고. 지금은 웨딩 촬영까지... 근데 권팀장 말로는 현수랑 얘기 잘했다고 해서...김선임이 또 다 이해해준 줄 알았는데...지금 기분이 좀 그렇겠네.”
하수석님 말대로, 정말 기분이 그랬다. 아니. 이 정도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빡이 치다 못해 피가 머리로 솟구치는 느낌이었다.
이 대화를 끝으로 택시에는 침묵이 흘렀다.
나와 하수석님이 서울 지사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 여전히 윤주씨는 없었다. 권 팀장뿐이었다.
“두 분 고생 많으셨네요.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네요?”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려? 다 알고 있었으면서 놀고 있네. 난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분위기는 약간 어색하고 불편했고, 저 질문에 대한 답은 하수석님이 이어갔다.
“이걸 두 명이서 가면 이 정도는 걸리죠. 다른 기관들은 거의 남자분들끼리 와서 하던데, 김선임 너무 고생 많이 했어요.”
김선임이 고생했다는 하수석님의 말에, 권팀장은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권팀장은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고 본인의 머리를 다시 묶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는데 나도 모르게 화가 더 치밀어 올랐다.
“팀장님, 근데 윤주씨 어딨어요? 오전에도 없더니 지금도 없네요?”
“어...어...시킬 게 있어서 잠깐 어디 보냈어.”
“아. 일 때문에 어디 갔다고요? 다시 한번만 여쭤볼게요. 윤주씨 어딨어요?”
“어. 일 때문에 어디 보냈다니까? 아침부터 정신없었을 거다. 걔도.”
최소한 내 질문에는 스스로 진실을 말해주길 기대했지만, 권팀장은 끝까지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했던가? 윤주씨가 메이크업이 되어 있는 쌩쌩한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다녀왔습니다. 어? 선임님도 여기 계셨네요? 여기 계신 줄 몰랐어요.”
윤주씨가 등장하자 권팀장은 약간 불안해 보였다.
“윤주씨,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요. 어디 다녀오셨어요?”
“저요? 오늘 웨딩 촬영 있는 날이어서... 지금 여자친구 집에 데려다 주고 오는 길이에요. 권팀장님이 회식 하자고 하셔서.”
“촬영이요? 아...그리고 요즘 대학원은 잘 다니고 있어요?...”
“네. 전 회사 다니면 대학원 못 다닐 줄 알았는데, 권팀장님이 이렇게 맨날 해주셔서 진짜 감사해요. 팀장님.”
저 질문들을 정말 심호흡을 하면서 물어봤던 것 같다. 결국 윤주씨가 웨딩 촬영을 끝마치고 회식을 하러 왔다는 것을 윤주씨 입을 통해서야 듣게 되었고, 난 눈앞에 있는 책상을 쓸어버릴 수 있을 것 같은 분노의 에너지가 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저기, 팀장님. 전 오늘 뭐 때문에 여기 온 거죠? 일도 많은데?”
“어...많이 바쁠텐데...지금이라도 기차 타고 가서...보고자료 만들래? 아니면 밥이라도 먹고...”
“지금 제가 여기서 밥 먹고 싶겠어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시는 거죠?”
평소 이상한 논리를 대며 나를 비꼬던 권팀장도, 지금 이 순간은 당황했는지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한층 더 싸늘해진 분위기에, 경우씨까지 나타났다. (도대체 경우씨는 어디서 나타난 거야?)
“다녀왔습니다!”
경우씨가 등장하자, 그제야 권팀장이 말을 꺼냈다.
“어, 경우. 고생했다. 지금 회식하러 가려고 하던 참인데...현수는 밥 안 땡긴다고 하니...어서 내려가 보고. 다들 가시죠.”
그때. 하수석님이,
“경우씨는 오늘 하루 종일 출장이었어?”
“넵!”
“무슨 일 했어?”
“오늘 행사 촬영 요청이 있어서 다녀왔습니다.”
“그 행사 규모 커서 경우씨 아니어도 업체가 따로 나와서 사진 찍었을 거고. 행사 2~3시간 정도였지?”
“네...”
하수석님의 뼈 있는 질문에 경우씨도, 권팀장도 당황한 눈치였다. 그리고 권팀장은 서둘러 본인이 아끼는 경우씨를 보호하고자 했다.
“그래도, 직원이 행사에서 딱 버티고 있으면...”
“권팀장님. 그 행사는 업체가 행사 내내 영상, 사진집 만들어주는 행사고. 굳이 경우씨가 필요하지 않은데...월권인 것 같아서 이렇게 말하고 싶지 않은데 우리팀에서 제일 바쁜 김선임이 굳이 이걸 했어야 싶네요.”
“하수석님. 죄송합니다. 그 부분까지는 제가 생각을 못했네요.”
“그래요? 오늘 있었던 행사, 권팀장님 예전 팀에서 하던 행사니까 잘 아실 거 같은데. 이 상황을 다 모르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전 김선임이랑 따로 식사하겠습니다.”
그날 나와 하수석님은 따로 식사를 하며, 이 부조리한 팀을 신나게 욕했다.
“수석님, 근데 역시 쩔던데요? 역시 예전부터 한 자리 하던 사람은 달라~”
“지금은 아무 자리도 없는데.. 나도 참 아까 너무 화가 나서...그래도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건데...에이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