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40개월] 후배가 선배일 때
계획대로라면, 윤주씨와 경우씨는 몇 개월 동안 우리팀에서 근무하며, 근무 마지막 시점쯤에 정규직 전환 심사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회사 차원에서 변동사항이 생겼다.
일부에서 ‘인턴들이 배정받은 팀 간에 업무 강도 차이가 심하다’, ‘팀장별로 인턴을 지원해주는 정도가 다르다.’ 등 불만의 목소리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인턴 기간 전체의 절반(전반부)은 처음 배정받은 팀에서, 그리고 나머지(후반부) 기간에 대해서는 새로운 팀에 배정하여 근무를 하는 것으로 정책이 변경되었다. 그리고 각각 전반부와 후반부가 끝났을 때 인턴들이 조별 발표를 진행해야 했다.
조별 발표를 위해 인턴들은 3~5인 내로 조를 자유롭게 구성할 수 있었다. 이렇게 정책이 변경되자, 인턴들은 본인과 친한 인턴, 능력 있어 보이는 인턴 등과 컨택하며 활발하게 자신들의 조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경우야, 인턴들이 뭐 발표인가 뭔가 하느라고 조를 짠다는데, 잘하고 있나?”
“아직 조를 못 찾았습니다.”
“빨리 해야지. 연락 온 사람들 없나? 아무도?”
“네... 아직.”
“걱정마라. 내가 어떻게든 조 구해줄 테니까.”
권팀장이 뭔데 조를 구해준다는 거지? 학과장이 학생들 팀플 과제 조 구성에도 개입하는 꼴 아닌가?
사실 이미 인턴들 사이에서는 ‘경우형 권팀장님 백으로 들어온 거래.’, ‘일은 아무것도 못한대.’, ‘낙하산이래.’ 같은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상태였다. 안 그래도 나이도 많은데, 본인이 적극적으로 조를 구해도 될까 말까 한 상황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니, 조를 구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권팀장은 은근히 윤주씨가 경우씨와 같은 조를 하길 바라는 눈치였다.
“윤주, 발표 준비는 잘 진행되고 있나?”
“네. 저는 이미 세 명이서 조를 구성했습니다.”
“그거 3~5명 정도로 구성하는 거 아니었나? 경우는 어때?”
“저희는 세 명이서 이미 계획도 다 세워둔 상태라서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인원이 늘어나면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을 텐데?”
“아니요. 괜찮을 거 같아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대화를 듣고 있는데 웃음이 터질뻔했다. 윤주씨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로 끝까지 철벽을 쳤고, 같은 공간에 있는 권팀장은 약간 충격받은 눈치였다. 경우씨는 본인 자리에서 모니터만 직시하고 있긴 했지만 뒤통수에 ‘무안함’이 느껴졌고, 나와 옥반지는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윤주씨는 워낙 욕심이 많고 앞뒤가 다른 스타일이었다. 통통하고 인자해 보이는 인상 안에 적재적소에 얼굴을 바꿔가며 본인이 원하는 것들을 얻어내고 가능하면 표면적인 갈등을 만들지 않는 사람이었다. 나처럼, ‘전 경우씨랑 같이 하기 싫은대요.’라고 말하진 않아도, 얼핏 보면 예의 있는 말들로 본인의 속마음을 표현했다. 그런 능구렁이 같은 사람이 누가 봐도 무능력한 경우씨랑 조를 하고 싶어 할 리가 없었다.
만약 나나 옥반지가 윤주씨처럼 행동했다면, 권팀장이 우리에게 저주를 퍼부었겠지만 더 대단한 낙하산을 타고 온 윤주씨에게는 별다른 말을 하진 못 했다. 그 대신, 경우씨에게, “내가 어떻게든 조 만들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 아직 발표까지 기간 여유 있잖아.”는 말을 남겼다.
지들끼리 드라마 찍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이런 말은 둘이 비밀 메시지를 주고받거나 따로 어디 나가서 하면 안 될까? 어쨌든, 경우씨가 낙동강 오리알처럼 지내는 것을 본 권팀장은 위기의식을 느꼈고, 그는 그날부터 경우씨의 조를 편성해주기 위해 고심하게 된다. 결국...그의 선택은?
“윤주, 잠깐 여기 좀.”
“네. 팀장님.”
“너랑 같이 조 짰다는 그 인턴들. 지금 여기로 좀 다 오라고 할 수 있나?”
“네?”
“할 말이 있어서. 잠깐이면 되는데, 아니면 내가 거기 팀장들한테 따로 연락할까?”
“아닙니다. 제가 연락할게요.”
나랑 상관도 없는 일인데, 그 대화를 들으며 나도 두근거렸다. 과연 권팀장이 경우씨를 위해 어떤 무리수를 둘 것인지 기대됐다. 한 10분쯤 지났을까? 윤주씨의 조원들이 모여들었다.
“안녕하십니까!”
“무슨 부담스럽게 큰 소리는! 편하게 앉아. 윤주네 팀원이 박형석이랑 유정현? 맞나? 이름?”
“네! 맞습니다.”
“팀에는 다들 적응 좀 하셨고? 조별로 발표하는 것도 있다던데, 그건 준비 중이고?”
조별 발표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갑자기 가만히 있던 윤주씨가 나섰다.
“네, 팀장님. 셋이 역할 분담도 했고 주제 접근에 대해서도 몇 번 회의도 했습니다.”
난, 여기서 윤주씨가 다시 한번 경우씨에 대해서 선을 긋는다는 느낌이었다. ‘이경우씨는 절대 받을 수 없다고요!!!’ 이런 느낌?
갑작스러운 윤주씨의 개입에 권팀장은 약간 움찔했지만, 다시 말을 이어갔다.
“아니, 뭐. 사실 여기 있는 인원들은 꼭 정규직으로 전환이 됐으면 좋겠어서...그냥 내가 좀 도와줄까 하고. 생각보다 팀장이 해줄 수 있는 일들이 많잖아?”
띠용? 이건 또 무슨 무리수지? 실시간으로 무리수를 목격하는 건 흥미진진했다. 윤주씨는 다시 한번 철벽을 치기 시작했다.
“이 과제는 인턴들이 스스로 준비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무슨 말씀이신지...”
“스스로 하는 게 맞는데...팀장이 도움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규정이 있나? 도움이라는 게 어디까지가 안 되는 거고 되는 건지 근거가 있나? 그런 건 아니잖아? 그리고 뭐가 잘못이다, 잘못이 아니다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오래 걸리는 법이고.”
“네?”
이번엔 다른 인턴들까지도 “네?”라는 말로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의문을 표했다. (저 때 내 심정도 똑같긴 했다. 네? 도대체 뭔 소리 하시는 거죠?)
“내가 듣기로 이번 주제가...우리팀이 하는 일이랑 관련이 많던데... 원한다면 얼마든지 도움을 줄 수 있지. 근데...지금 경우가 조를 못 찾은 것 같아. 근데 아니 뭐 꼭 경우를 받아주면 도움을 주겠다 이런 건 아니고...그냥 개별적으로 경우는 경우대로 아직 조를 못 찾은 것 같고, 그냥 이 조에는 윤주가 있으니까 도움을 주고 싶다는 거지. 근데 이왕이면...안 그래?”
그렇게..경우씨는 조를 찾게 되었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는 것은 진절머리가 나도록 싫었지만 권팀장에 대해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던 상태라, 그냥 일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데...왜 권팀장이 갑자기 나랑 옥반지를 회의실로 부르는 걸까?
“요즘 바쁘지? 정신없겠지만 하나 더 부탁하려고 불렀다. 우리 사장이 회사 비전이나 계획 관련해서 인터뷰한 거나 사전 자료 조사한 것들 전반적으로 정리했으면 하는데?”
“그런 자료라면 지금까지 계속 정리하던 것들이 있고, 팀장님도 파일 있지 않으세요?”
“아. 근데 좀 더 구체적이었으면 좋겠어. 각각의 건들에 대해서 몇 페이지씩 더 덧붙여서 좀 자료를 풍성하게? 앞으로의 방향성도 좀 더 정리해서 간략하게 볼 수 있으면 좋겠는데?"
이때부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원래 우리팀 일과 관련되어 있어서 업무라고 생각했는데, 별다른 이슈도 없는 이 타이밍에 갑자기 그런 걸 준비하라는 것도, 하필 인턴들 발표 주제가 비전 그 비슷한 거였던 것 같기도 하고...찜찜했다. 어쩌면 일이 아니라 경우씨를 위한 것일 수도?
"팀장님, 혹시 이거 인턴들 발표 때문에 이러시나요?"
내가 말을 꺼냈고, 옥반지는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나를 지지해주었다.
"현수야, 설마~ 아니겠지. 일하는 사람들한테 사적으로 인턴 챙기느라 이런 것 까지 시키겠어? 우리 팀장님 그 정도는 아니다."
"그지, 언니? 팀장님. 도대체 왜 이런 걸 시키시는 거죠?"
나와 옥반지의 반응에 권팀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희들, 말 나온 김에 솔직히 이거 걔네들이 처음부터 다 조사하려면 시간 엄청 걸리는데, 너희들은 이거 너희들이 쓴 거니까 조금 보고 다듬기는 쉽잖아. 팀원으로서 도와줄 수 있는 거 아니야?"
옥: "팀장님, 이거 정규직 전환 평가예요. 팀장님이 이러는 거 좀 이상한 거라고요."
나: "경우씨 생각해서 필기시험 힌트 주고, 면접관 알려주고 그러신 거 알겠는데 그런 나쁜 짓에 저랑 언니까지 협조하길 바라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하고 싶으면 혼자 하세요."
권팀장은 기분 나쁘다는 듯이 이죽거리면서 피식 댔다.
"너희들이 이런 애들인 거 잠시 잊었다. 내가 미안하네. 정말 대단하다. 팀원 잘 되는 걸 이렇게 배 아파하는 애들이랑 한 팀인 것도 지치네? 사실 경우가 조원 못 구한 거 너희들 때문 아니야? 너희들이 인턴들한테 경우 능력 없다느니, 뭐니 소문낸 거 아니야? 이 정도로 앞길 막았으면 도움은 줘야 되는 거 아닌가?"
진짜 웃겼다. 인턴들 사이에 경우씨 소문이 그렇게 난 게 우리 때문이라고? 한숨을 쉬고 있는 우리에게 권팀장은 한 마디를 더 퍼부었다.
"너희. 내가 한 마디만 더 할까? 경우가 정규직이 아니어서 지금 가장으로서 얼마나 힘들게 지내는지는 아냐? 팀원이 어떤 고통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 알고 있어? 다들? 이상한 소문이나 내고 말이야!"
"팀장님, 그게 우리 때문에 소문났다고 생각하세요? 저랑 언니랑 인턴들 잘 알지도 못해요. 인턴들한테 한 번 물어보세요. 누구한테 들었는지. 다 자기네 팀 선배들한테 들었을걸요? 지금 회사에서 다들 떠들어요.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저랑 언니한테 맨날 물어봐요. 팀장님이랑 경우씨 무슨 사이인지. 우리도 피해자라고요. 제발 팀장님이야 말로 조심해주세요."
그렇게 그 회의실의 분위기는 냉각되었다. 나는 또다시 권팀장이 오랫동안 애지중지 길러온 꽁지머리를 자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결국 권팀장은 본인이 해야 할 일을 뒤로한 채 직접 자료를 정리해서 윤주씨와 경우씨가 있는 조에 자료를 넘겼다. 후문에, 윤주씨는 조원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남들도 찾을 수 있는 자료로 발표하면 좋은 평가를 못 받을 거 같아요. 인턴한테 이런 걸 원할 것 같진 않은데...경우씨가 굳이 여기에 올 필요가 없었네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