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40개월] 약 사이다
권팀장이 조별 발표와 관련해서 건넨 자료가 그다지 별로였는지, 윤주씨는 조별 발표와 관련한 경우씨의 역할을 대폭 축소하였다. 애초에 경우씨 역할이랄 것이 없어 대폭 축소라는 말이 좀 민망하긴 하지만, 어쨌든 윤주씨는 경우씨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경우씨가 보통의 인간이었다면, 이 상황에 대해 불안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발표에서 내가 이 역할을 하겠다.’ 혹은 ‘이 부분은 나에게 맡겨달라.’ 같은 말들을 했겠지만, 그는 스스로 어떤 위기에 처했는지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권팀장은 경우씨가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쨌든 채용형 인턴까지는 만들어놨지만, 어쩌면 그 이상은 무리일 수도 있겠다는? 그러자, 권팀장은 다시 윤주씨에게 조별 과제에 대해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근데 이 정도면 권팀장이 경우씨 짝사랑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한 것 아님?)
“윤주, 경우. 발표는 잘 준비되고 있나? 윤주. 보니까 내가 준 자료는 특별히 사용하는 것 같지는 않네?”
“아...네. 감사한데, 저희가 기존에 준비하고 생각해왔던 내용 위주로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 뭐. 그렇게 할 수도 있지. 근데 경우 롤이 조금 적은 것 같은데...도움이 필요한 부분이 없는 건가?”
“네. 아무래도 기존 인원들끼리 많이 진행해왔던 내용이라서 특별히 도움 필요한 부분이 없는 것 같아요.”
“그래도 조별과제면 조금 분배를 하는 게 좋지 않나 해서. 아! 꼭 그러라는 건 아니고 그냥 개인적인 의견!”
“저희는 괜찮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경우씨가 원하면 다른 조에 가도 되고요.”
물론, 경우씨가 갈 수 있는 다른 조는 없었다.
권팀장의 바람과 다르게, 윤주씨는 경우씨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윤주씨가 아닌 내가 조장이었다면, 권팀장은 이것저것 훈수를 뒀겠지만 윤주씨에게는 그 이상의 압박을 가하진 못했다.
결국 이 상황을 다른 식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 나머지 권팀장은, 또다시 무리수를 둔다. 그건 바로, 사내 감성대회를 개최하는 것이었다. 경우씨가 뭔가 티가 나는 업무를 해서, 정규직 전환이 되길 바라는 눈치였다.
“조직문화를 개선을 목표로 전사 글짓기 대회를 생각하고 있는데...회사와 관련된 글짓기를 하는 거야. 100자 이내로? 재미있는 컨셉이든 뭐든. 결과물은 사내 매거진에 넣고...어쨌든 기획은 옥반지가 했으면 하고, 심사나 안내, 발표하는 건 아무래도 국어국문학과 출신인 경우가 맡았으면 하는데?”
그 말인즉슨, 티 안나는 고생은 옥반지가. 앞에서 티 내는 건 경우씨가 했으면 좋겠다는 뜻이었다.
“기획을 제가 하는 거면, 그냥 발표, 심사도 제가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아니면 처음부터 경우씨가 기획하도록 하는 게 좋을 것 같고요. 회사 내부 행사니까 그렇게 기획이 어려울 것 같지는 않은데요.”
옥반지는 반기를 들었지만, 팀장이 찍어 누르면 방법은 없었다. 결국 옥반지는 대회를 기획했고, 대회에 대한 안내, 심사는 경우씨가 맡게 되었다. 대회를 기획하면서 생각보다 상금 규모도 커졌고, 상금 규모가 커지면서 직원들의 관심도 매우 높아졌다.
우리팀은 주최 역할이기도 했고, 심사에도 개입하기 때문에, 우리팀은 전원 대회에 참여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한동안 사람들은 모이면, 글짓이 대회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시간은 지났고, 난 대회에 대한 것들은 많이 잊고 지냈다. 사실상 내가 참여도 할 수 없었고 업무적으로 담당하고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고, 게시판에 대회의 수상자가 발표되었다.
그런데...???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지?
수상자에 경우씨 이름이 있는 게 아닌가?
분명히 우리팀은 참여할 수 없는 대회였는데, 경우씨 이름이 왜 여기에?
게다가 수상자들 중 경우씨의 인턴 동기들이 너무도 많았다.
난 바로 옥반지에게 카톡 했다.
‘언니, 이거 수상자 봤어? 우리팀은 이거 못하는 거 아니었음?’
‘내가 기획할 때까지만 해도 그랬는데, 나도 심사 결과는 처음 봄.’
‘경우씨 동기가 왜 이렇게 많아? 얘네들이 가져가는 상품만 100만 원어치가 넘는데?’
‘근데 그건 둘째치고 이경우는 왜 참여했음? 회의 때도 우리팀 참여하지 말자고 했는데, 그리고 쟤는 심사위원으로 들어갔잖아.’
‘언니, 이거 몰랐어?’
‘어. 기획만 한 다음에 권팀장이 손 아예 떼라고 했잖아. 이러려고 그랬네. 미친’
수상자 명단에 경우씨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심사위원이었던 경우씨의 동기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었다.
수상자가 발표된 뒤 몇 분 후, 수상작들이 공개되었다.
그런데... 띠용????
이게 수상작이라고?
내가 놀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퀄리티가 너무 안 좋아서? 아니.
글귀가 너무 쩔어서? 아니.
모두 아니다.
내가 예민한 건지 모르겠지만, 수상작 중 경우씨 동기들의 글은 태반이 '아!'로 시작했다. 뭔가 수상해 보였다. 나와 반지 언니 눈에는 좀 수상해 보이긴 했지만, 사람들은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은 100만 원 이상의 수상품을 타갔다. 권팀장도 마찬가지였다. “우리팀은 출품하면 안 된다.”라고 하더니, “국문학과 출신이라 그런지 경우 글이 정말 최고다."면서 태도를 바꿨다.
경우씨가 작품을 출품했다는 것 자체가 좀 이상하긴 했지만, 문제 삼고 권팀장과 반대 입장에 서는 것 자체가 너무 지쳤던 우리는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근데, 일은 이상한 데서 터졌다.
경우씨의 동기들 중에 누군가가 이번에 경우씨를 비롯해서 (글짓기 대회에 입상한) 경우씨의 동기들이, 작품 출품에 대해 미리 사전 모의를 한 정황에 대해 감사실에 신고한 것이다.(내가 그 신고한 녀석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만나면 밥이라도 사주고 식당까지 업고 갈 것.. 장한 것 착한 것...넌 크게 될 거다.. 사랑한다! 넌 최고야!)
듣자 하니, 경우씨와 경우씨 동기들은 공모전에 모두 참가하기로 했다고 한다. 거기서 수상을 하게 되면 수상 받은 것들을 모두 현금화해서 단체로 엠티를 가자고 얘기가 나왔던 모양이다. 감사실에 따르면, 메신저에서 경우씨가 먼저 이런 제안을 했던 것 같다.
경우씨 : 이거 공모전 하는 거 아시죠? 이거 제가 심사위원으로 들어가는데, 여기서 공모전에 내시는 분들은 가급적 제가 다 뽑을게요.
동기1 : 오! 근데 심사는 이름 가리고 하는 거 아니에요?
경우씨 : 아. 그럼 지금까지 저희끼리 정해요. 글 맨 앞 부분을 '아!'로 시작해주세요. 그럼 제가 알아보기 편하니까. 아니면, 제가 그냥 대충 써논 것들 열 댓개 있거든요. 파일 보낼테니까, 이거 겹치지만 않게 정해서 제출해주세요. 제껀 제가 알아보니까. 이거 내면 '아!'로 시작한 거나 제꺼나 이건 다 제가 수상하게 할게요!
동기1 : 형, 근데 그럼 좀 이상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남에 꺼 내도 괜찮아요?
경우씨 : 그걸 누가 어떻게 알겠어요.
동기2 : 맞아. 그걸 누가 알아. 그냥 우리 이거 되면 돈으로 바꿔서 다 같이 엠티 가요!
동기3 : 오 대박. 근데 사람들이 알아보면 어떻게 해요?
경우씨 : 근데 사람들 이거 그렇게 관심 없을 걸요?
경우씨를 비롯해서 경우씨와 가깝게 지내는 동기들은 이런 이야기를 동기 단톡방에서 나누었고, 실제로 거의 10명 가까운 동기들이 '아!'로 시작하거나, 경우씨가 보내 준 파일에서 고른 글귀로 공모전에 참가한다. 그런데 이 일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동기 중 누군가가 이걸 신고해버렸다!
감사실은 신고를 접수하고 우리팀과 그들의 동기에게 들어닥친다! 이번만큼은 정의가 승리하길! JUSTICE!!
그들은 아직 인턴 신분이었기 때문에, 정규직 전환에 혹시 악영향이 있지 않을까 초조해했다. 신기한 것은, 윤주씨는 아예 본인 돈을 내고 엠티에 같이 간다고 했지, 공모전에는 아예 참가하지 않았다고 한다. 뭔가 이 일이 본인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을 것이란 걸 미리 알고 한 행동인 것 같았다.
그때, ‘거의’ 경우씨의 양아버지로 살아가고 있는 권팀장이 나, 옥반지, 경우씨, 경우씨 동기들(동기들 중에 경우씨 글을 내서 공모전에 당선된 사람들)을 불렀다.
"어째, 이런 일이 터져서 다들 속상들 하시겠네. 경우, 특히 속상하겠네."
"저희 동기들은 좋은 마음으로 한 건데..."
"알지. 좋은 마음이지..."
좋은 마음? 좋은 마음으로 남의 글을 내서 당선시키고 상품을 현금화해서 엠티를 간다고?
그때, 그 기수에서 학벌이 가장 좋다는 남자 하나가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제가 동기들 대표해서 말씀드리면, 일단 저희는 공모전에 본인이 작성한 글을 출품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몰랐습니다. 그리고 아!로 시작하는 글이 많은 건, 그냥 감탄의 의미였고요."
네? 뭘 몰랐다고요? 공모전에 본인의 작품을 내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 하지만 권팀장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아, 그럴 수도 있었겠네. 꼭 본인 작품을 출품해야 한다는 안내가 없긴 했었지? 반지야(옥반지를 부르며), 그걸 왜 미리 챙기지 못하고 안내를 못했던 거지?"
갑자기 화살은 옥반지를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