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40개월] 사이다
"제가 작성한 기획안에는, 본인이 쓴 글귀를 내야 한다고 단서가 달려 있습니다. 그 기획안 기준으로 최종 안내 맡은 것은 경우씨고, 그걸 컨펌한 건 팀장님이었으니까 두 분이 얘기해보시면 되겠네요."
그래. 이거지. 옥반지는 맞는 말만 골라했다.
물론, 맞는 말을 한다고 권팀장이 그걸 다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아무리 경우가 담당했다고 해도, 우리 일인데 왜 챙기지 못한 거지? 이거 팀 내 실수로 괜히 선한 의도로 공모전 참여한 사람들이 피해를 보게 생겨서...내가 얼굴을 들기가 힘드네. 미안해서..."
권팀장이 미안하다는 말을 꺼내자, 드라마 강남미인의 현수아 같은 타입의 여자 인턴이 훌쩍거리며,
"네...저희는 그저 좋은 글들이 많았고, 그걸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에...근데 한 사람이 한 개만 낼 수 있으니까...함께 보고 싶어서..." 라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너희들이 좋은 마음으로 공모전에 참가한 건 알지. 그래서 여기 있는 분들이 수상했다고 했을 때, 나도 진심으로 기뻤고...근데 사람들 생각이 그게 아닌 거 같다. 동기 중에 신고자가 나온 거 보면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그렇지가 않아. 그지? 이렇게 인생을 배운다고 생각하고. 응? 힘내고? 응?"
"네...저희도 너무 속상하고...저희는 사실 수상해서 돈이나 이런 거엔 전혀 관심도 없었어요...그저 제가 열심히 일하고 있는 회사가 좋아서...흡.."
똑같은 별명을 늘어놓던 그녀는 결국 눈물을 몇 방울 떨어 트렸다.
그녀의 눈물에 힘입어 학벌남은 다시 말을 시작했다.
"팀장님, 저희는 그저 선한 동기를 가진 어리석은 인턴이었을 뿐입니다. 공모전을 보고 좋은 글귀를 나누고 싶었는데, 1인당 1개만 제출할 수 있어서, 나눠서 제출한 것이었고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을 제출해야 한다는 안내가 없어서, 그 부분은 전혀 상상도 못했습니다. '아!'라고 시작하는 글을 쓴 건, 정말 감탄일 뿐이었고요. 저는 상품에는 관심도 없었고요. 가능하다면 모두 기부하겠습니다."
솔직히 인턴들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들은 문제가 있는 인간들이었다. 나쁜 의도를 갖고 그랬으면 나빠서 문제가 있는 것이고, 정말 선한 의도로 저런 말도 안 되는 판단을 했다면 일을 할 수 있는 수준의 인간들이 아닌 것 아닌가?
나와 옥반지의 생각과는 다르게, 권팀장은 마음이 아파 죽겠다는 듯 한 표정이었다.(그럴거면 죽으..ㅅ...휴....아닙니다. 그리고 꽁지머리도 자르시고요.)
"나는 그 마음 충분히 안다. 감사실에도 내가 잘 얘기할게. 혹시 너희들도 따로 조사받아야 하면 지금 내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얘기해. 나머지는 내가 다 커버해보는 걸로. 알겠어? 다들?"
권팀장은 그들을 다독였고, 안심시키며 그들을 돌려보냈다.
그러더니,
"근데 말이야, 이건 정말 우리팀이 잘못한 것 같다. 안내할 때 좀 더 명확하게 본인 작품만 올려야 한다고 명시를 제대로 했어야 하는데...그래서 말인데...이건 팀 차원에서 잘못한 부분 인정한다고 공지도 하고 감사실에 소명도 진행하는 게 맞는 것 같다."
권팀장을 보면서, 절세미녀한테 홀려서 어리석은 판단을 하는 역사 속 권력자들 욕할 거 정말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권력도 별로 없는 권팀장도 자기한테 조금 잘해주는 경우씨한테 저렇게 홀리는데, 권력자들은 뭐...얼마나 주변에 사람이 많이 들러붙고 눈과 귀를 멀게 했겠는가...
"옥반지는 일단 전사에 사과 메일을 보내고, 이 상황에 대해 공지를 했으면 하는데? 정확하게 명시가 되어있었으면, 저 친구들이 이런 실수를 하진 않았을 텐데, 이건 우리가 책임져야 하는 부분 같은데?"
후...나한테 뭐라고 하는 건 아니지만, 나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팀장님, 언니가 사과할 일도 아니고, 우리가 책임져야 할 부분도 아닌 것 같은데요. 이건 상식 차원이고 팀 차원의 사과는 불필요하다고 봅니다.”
“네. 저도 현수 생각이랑 같고, 사과를 정 해야 한다면 경우씨랑 팀장님이 하세요.”
"아니, 지금 경우는 정규직 전환 앞두고 중요한 시기인데 이런 식으로 분란을 만들어야겠어? 너희는 이미 정규직인데 그 정도 아량은 베풀 수 있는 거 아닌가?"
"팀장님, 지금 제대로 생각하세요. 뭐가 문제인지 상식을 가지고 제대로 생각하시라고요."
"정말 끝까지 이럴래? 팀장의 권위에 왜 자꾸 도전하는 거지? 다들 남이 잘 되는 거 보기가 그렇게 짜증 나냐? 니들도 그렇고. 그 신고한 새끼도 웃긴 새끼야. 동기들이 상 받으면 축하해줄 일이지."
권팀장은 흥분했는지 얼굴이 욹그락붉그락했다. (꽁지머리 자르세요!!) 그러곤 그 길로 곧장 감사실로 향했다. 그리고 그가 감사실로 향하고 한 삼십 분쯤이 흘렀을까? 나와 옥반지도 감사실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옥선임이랑 김선임 두 분 다 잠깐 감사실로 와주세요. 지금 공모전 관련해서 신고 접수된 내용 때문에 두 분도 확인해주실 내용이 있습니다. 두 분이 함께 와주세요."
기꺼이! 어휴. 만약에 감사실에서 안 불러주면 이 원통함을 제대로 전달할 길이 없어서 답답할 뻔했는데, 정말 반가운 일이었다.
우리가 감사실에 도착했을 때, 권팀장은 감사실에서 거의 생떼를 쓰고 있었다.
"아니, 이거 수상 취소하는 거나 문제 삼는 건 진짜 말도 안 되는 일이라니까요? 이건 우리팀이 안내를 미숙하게 해서 그래요. 내가 잘못했다니까?"
그는 적극적으로 본인이 병신임을 광고하고 있었다. 감사실 직원들은 그에게 질린 표정이었다. 나와 옥반지가 도착하자 반가워하는 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우리가 도착한 것을 보고 감사실장은,
"권팀장, 이만 좀 가라고. 어? 진짜 왜 이래? 빨리 가고. 김현수 선임부터 들어와요."
감사실 안에 있는 작은 면담실에서 나와 감사실장은 독대를 하게 되었다.
"김선임, 예전에 감사실에서 음료수 마시고 기절한 적 있지 않나?"
"아...신입 때 그런 적 있어요."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얘기해."
"네."
"상황은 알고 있을 거야. 그냥 상황에 대한 생각을 편하게 얘기해주면 좋겠어."
이미 나는 감사실에서 처음 조사를 받았을 때의 내가 아니었다. 난 이제 이 회사에서 무서울 것도 없고 더 당할 일도 없었다. 여긴 나의 무대...시작한다.!!
"네. 일단 저는 기본적으로 공모전은 본인 작품으로 출품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글을 도용한 사람, 도용하도록 상황 조장한 사람들 모두가 철저한 불이익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권팀장이랑 인턴들 말은, 이경우씨 글을 나눠 낸 것은 좋은 의도였고, 공지사항에 본인 작품을 내야 한다는 언급이 없어서 실수한 것뿐이라는데, 이런 판단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아니요. 사실 공모전에 본인 작품을 내는 것은 상식적인 부분이고, 신고 접수된 카톡을 확인해보면, 인턴들이 그 부분 모두 인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 아닌가요? 특히, 경우씨는 본인이 심사위원임을 악용해서 더 문제가 심각하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옥선임이 작성한 기획안에는 본인 작품으로 출품해야 한다는 언급이 있었는데, 이걸 사내 안내 시에 의도적으로 누락한 건 아닌지도 조사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난 조사가 시작하자마자 급발진을 시작했다. 내 느낌에, 감사실장도 이 건은 문제가 있는 사안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중립을 유지하기 것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았다.
"네, 그렇군요."
"그리고 '아!'로 시작한 글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심사가 진행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 일을 정규직 전환 심사에도 정확하게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근데, 권팀장은 도대체 왜 그러는 것 같아요? 그냥 이건 정말 내가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그 점도 감사실에서 제대로 조사해주셨으면 해요. 누가 봐도 객관적으로 문제가 있는 상황을 덮으려고 오늘도 내내 옥반지에게 사과문을 올리라고 종용했어요. 이건 직권남용 아닌가요?”
감사실장이 원래 권팀장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난,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하고 나왔다. 옥반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며칠 뒤, 경우씨와 경우씨 동기들의 공모전 수상은 모두 취소되었다. 또한, 감사실 차원에서 공모전 수상이 모두 취소된 이유에 대해 조사한 바를 정리하여 사내 전체 공지를 하게 되었다.
그 공지에는, 경우씨가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면서 본인 작품을 출품한 것, 본인의 작품을 동기들에게 공유하고 제출하도록 한 것, '아!'라는 수신호를 만들어서 출품하게 한 것 등등이 아주 자세하게는 아니더라도 대략적으로 안내되어 있었다.
안 그래도 말 많은 조직에서, 이 공지가 올라가자마자 사람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인턴들을 (주로 뒷담으로) 심판했다.
“이경우가 걔 아니냐? 그 기*리랑 파*메라 타고 다니는 애?”
“애 아니야. 우리보다 나이도 많아. 진짜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인턴들이 대박이다. 진짜 무개념들 아니야?”
“얘네들 이거 정규직 되면 뇌물 받을 애들이라니까?”
나랑 옥반지는 오랜만에 감사실이 제대로 된 결정을 내렸다는 생각이 흐뭇했다. 하지만 이 결정에 격분한 사람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권팀장이었다. 권팀장은 나와 옥반지를 앉혀놓고 우릴 다시 압박하기 시작했다.
“하...진짜 너네 대단하다. 감사실에서 적당히 얘기할 수 없었나? 경우까지 수상 취소는 말이 안 되는 거 아닌가? 경우는 자기 글을 낸 거잖아.”
권팀장이 이 정도로 하자, 정말 병에 걸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까지 정신을 못 차릴 순 없는 노릇 아닌가...!
“팀장님. 정신 차리세요. 이거 주도한 주범이 경우씨잖아요.”
“주범? 아무리 그래도 지금 몇 개월 있으면 정규직 전환 심사인데...이게 맞는 처사인가?”
“네. 맞는 처사 같은데요?”
“너랑 옥반지랑 감사실에서 도대체 뭐라고 했냐? 어? 어?”
어휴. 한심한 인간아. 답답함을 느끼고 있을 때, 옥반지가 한 마디 했다.
“팀장님, 저희 사보 때문에 다른 팀이랑 회의 있어서. 계속 똑같은 얘기 하실 거면, 바빠서 그런데, 그냥 감사실 가서 얘기하세요. 다녀오겠습니다.”
ㅂㅇ~
이 사건을 기준으로, 권팀장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한 감사실은 그를 주목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