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개월] 그들의신입 교육이시작됐다.
정체불명의 낙하산남과 경우씨를 비롯한 채용형 인턴들이 입사했다. 그들이 인턴을 하면서 당분간 근무하게 될 팀도 정해졌지만, 본격적인 배치 전 4주 정도 인턴 대상 교육이 진행됐다.
당시 내가 전략팀에서 맡고 있던 많은 일 중에 하나는 ‘CSR 사회공헌’ 업무였다. 회사 차원에서 사회공헌을 추진하고 그 사회공헌을 통해 대외적 이미지를 제고하는 전략이라서 전략팀이 맡는다나 어쩐다나?
아무튼, 회사에서 사회공헌 담당자는 딱 한 명, 바로 나였지만, 내가 사회공헌 업무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은 전체 20% 정도에 불과했다. 그만큼 사회공헌이 내 메인 업무는 아니었지만, 쓸데없이 업무에 열정이 있는 편이었던 나는, 인턴과 함께하는 사회공헌 프로그램을 기획해서 권팀장에게 보고했다.
“김현수. 근데 이런 걸 왜 기획한 거지?”
“신입직원이랑 함께하는 사회공헌 프로그램 기획해보면...”
“아니. 우리 이미 실적 다 채운 거 아니었어? 너 다른 것도 바쁜데 이런 걸 또 하고 싶냐?”
“(열심히 한다고 해도 지랄이네.) 네. 그럼 안 하겠습니다.”
뭐 좋은 소리 듣는 것도 아니고, 권팀장 반응도 좋지 않아서 그렇게 프로그램을 접었는데, 어느 날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사장이,
“권팀장. 지금 신입 들어와서 교육받는데 그동안 봉사활동이라도 하면 좋지 않나?”
이 한 마디 했다고, 갑자기 권팀장은 나에게 ASAP으로(AS SOON AS POSSIBLE, 최대한 빨리) 사회공헌 활동을 진행해 달라고 했다. 근데 내가 처음 보고했을 때부터 준비했으면 정상적으로 공헌 활동을 할 수 있었겠지만, 시간이 지나고 갑자기 하라고 하니 할 수 있는 활동도 제한적이고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하지만 나는 커리어우먼! 언제나처럼 다시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알아봤다.
“팀장님. 제가 처음 보고할 때보다 상황이 급박해서(=그때는 하지 말라고 했었잖아. 기억하지?) 할 수 있는 활동이 제한적인데요. 근처 복지관에서 활동 지원이랑, 미화, 조리 지원 등등 할 수 있습니다.”
“굿. 좋아. 지금 그냥 하는 거 자체가 중요한 거야. 기사는?”
“기사는 미리 써뒀어요. 혹시나 해서 팀장님 메일로도 보내 놨어요. 그 날 기사 나갈 거예요.”
“굿.”
“팀장님, 그리고 계획안에 쓰여있지만 복지관 위치가 회사랑 가까워요. 예산도 없고 회사에도 사용할 수 있는 버스가 없어서 당일 버스 대절은 못해요. 집결이랑 해산을 복지관에서 하려고 합니다. 괜찮을까요?”
“복지관 위치가 뭐 가까운데 괜찮지 뭐. 근데 난 이날 여기 못 갈 거 같네?”
“네. 사실 저만 가도 괜찮을 것 같아요.”
“그래. 수고.”
이렇게 보고를 끝냈고, 하루 이틀쯤 시간이 지나, 봉사활동하기 전 날이 다가왔다. 퇴근을 한 상태였는데, 밤 11시가 다 되어서 경우씨에게 전화가 왔다. 그와 나는 사적인 전화를 전혀 하지 않는 사이였기에, 그리고 경우씨가 하는 업무가 거의 없어서 업무 전화도 해본 적이 거의 없기에. 내 전화기에 그의 이름이 뜬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네.”
“선임님. 저 이경운데요.”
“네.”
“지금 저희 동기들한테 사과 문자 보내셔야 할 것 같은데요?”
뭐? 사과? 내가 제대로 된 대화도 나눠 본 적 없는 경우씨의 인턴 동기에게 왜 갑자기 사과 문자를 보내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사과할 일이 있더라도 지금 이 시간에 갑자기 두서없이 이런 식으로 말을 한다고?
“사과 문자요?”
“권팀장님이 지금 사과 문자 당장 보내라고 하시는데요?”
“그러니까 뭐에 대한 사과 문자냐고요.”
“봉사활동 가는 장소까지 제대로 안내도 안 했고 버스도 대여 안 했으니까 사과 문자 보내라고 하시는데요?”
“지금까지 문자로 계속 약도 사진이랑 링크 보냈고, 아까는 프린트까지 나눠줬는데 무슨 안내가 안됐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걸 왜 경우씨가 저한테 말하는 거죠?”
“전 모르겠고. 이건 제가 하는 말이 아니라 팀장님이 말씀하시는 건데요?”
“...(후...)”
“아무튼 저는 팀장님 지시 사항 전달드렸습니다. 제대로 업무 처리하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문자 보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느닷없이 밤 11시에 저런 전화를 받고 난 온몸이 부들거렸고, 권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팀장님. 김현수입니다.”
“어. 전달받았지? 사과 문자 보내야 할 것 같은데?”
“도대체 어떤 것 때문에 사과 문자를 보내라는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아니 안내도 조금 부족했고, 그리고 그 버스? 왜 버스 대절을 안 했어?”
“네? 안내는 수없이 했고, 버스도 대여 못한다고 말씀 이미 드렸잖아요.”
“그랬나?”
‘어 18 그랬다.’라고 말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네.”
“그래? 근데 어쨌든 우리가 확실히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한 건 맞잖아. 그리고 다들 이쪽 지리에 어둡고 애들인데 복지관 위치 제대로 모를 수도 있는데 우리가 버스는 대절했어야 하는 것 같고.”
“저는 보고 드렸고, 팀장님도 동의하셨고, 복지관 위치는 여러 차례 안내했습니다. 사과 문자 보낼 이유 없고, 그리고 이런 거 말씀하실 거면 저한테 직접 말씀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왜 이런 식으로...”
“어어어...근데 경우한테는 뭐라 하지 마. 그냥 내가 시켜서 그래.”
결국 나는 사과 문자는 아니지만, 똑같은 내용의 안내문자를 인턴들에게 또 보내게 되었다. 이미 봉사활동 전날 이렇게 기분을 잡쳤지만, 그래도 봉사활동하는 날에는 권팀장이 못 온다고 했으니 최소한 하루는 권팀장 얼굴 안 봐도 되겠지, 하며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복지관으로 바로 출근했고 거의 도착할 때쯤, 옥반지에게 전화가 왔다.
“어, 언니.”
“잘 가고 있어?”
“어. 왜? 무슨 일 있어?”
“지금 이경우랑 권팀장이랑 파*메라 타고 복지관으로 출발했는데, 혹시 전화받았어?”
“권팀장 오늘 못 온다고 했는데?”
“어. 근데 지금 둘이 그쪽 출발해서 조금 있으면 도착할 거 같아. 너 늦지 않고 도착하지?”
“어. 나 이 앞이야.”
“늦지 않게 가서 잘하고 와. 지금 이경우가 현수 선임이 너무 어려서 잘 통솔할 수 있을지 모르겠고, 아무래도 버스가 없어서 동기들이 조금 당황한 것 같고, 사과도 안 했으니까 팀장님이 가서 동기들 격려해주면 좋을 것 같다고 해서 지금 출발한 거니까.”
“그럼 지금 나 테스트? 그런거 하는 거야?”
“너한테는 안 간다고 하고 가는 거 보면 그런 것 같은데?”
난 왜 이 인간들보다 일도 많이 하고 유능한데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지? 현기증이 날 정도로 화가났지만 이를 악물고 복지관에 도착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우씨와 권팀장도 복지관에 도착했다. 권팀장이 언제 인턴들이랑 친해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들과 꽤 가까운 듯 인사를 나눴다. 일부만 정규직이 될 수 있는 그 채용형 인턴들은 권팀장의 한마디 한마디를 귀담아들으며 엄청난 리액션을 퍼부었고 그 안에서 권팀장은 거의 왕과 같이 행동하고 있었다.
그 꼴도 보기 싫었는데, 내가 인턴들의 출석을 확인하고 있을 때, 권팀장이
“아무튼, 우리 직원의 불찰로 불편을 겪게 해서 팀장인 제가 대신 사과드립니다.”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그 앞에서 나를 병신으로 만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팀장이 나를 무시하는 것을 인턴들도 은연 중에 다 느끼는 것 같아서 매우 수치스러웠다.
회사 옆에 있는 복지관까지의 이동에 버스 대여를 하지 않은 것이 그렇게 큰 일인 것인지, 안내를 100번쯤은 해야 되는 것이었는지, 그리고 이걸 다 보고했는데도 왜 갑자기 저 난리인지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그때. 갑자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네. 김현수입니다.”
“네...저...저 지금 화장실이거든요?”
“누구시죠?”
“저....저...지금 화장실인데...2층에 있는 화장실...또...똥을 쌌는데 휴지가 없어요. 휴지 좀...”
난 귀를 의심했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누구시죠?”
“저 한기영이라고 합니다.”
“한기영이요?”
“네. 이번에 들어온 인턴인데 저 지금 2층 남자 화장실인데 똥 쌌는데 휴지가 없어요. 휴지 좀...빨리 좀...”
똥? 똥? 똥이라고? 지금 내 귀가 저 'ㄸ'로 시작하는 단어를 잘 들은게 맞는거지? 현기증이 났다. 한기영 씨는 남자였고, 게다가 여기에는 온통 지들 동기들 뿐인데 굳이 선배이면서 본인의 인솔자인 여성인 나에게 전화해서 저런 부탁을?
“그걸 왜 저한테 전화하세요?”
“아. 어제 문자 많이 보냈잖아요! 전화번호가 있으니까 그랬죠. 여기 지금 사람 없다고요! 그리고 동기들이랑은 아직 안 친해서 어색하다고요.”
“그럼 저랑은 친하세요?”
이때 겪은 일은 지금 쓰면서도 생각해보니 혈압이 올라서 터지려고 한다. 난 하도 어이가 없어서 전화를 끊어버렸고, 그러자 한기영씨에게 계속 문자가 왔다.
‘빨리요. 빨리’
그 문자를 보고 분노한 나는 소리쳤다.
“남자분들 중에 지금 화장실에 휴지 가져다주실 수 있으신 분????????????????? 한기영 씨 화장실인데 휴지가 없다고 합니다!!!!!!!!!!!!!!!"
그 얘기를 듣자 정상적인 인턴들.. 뭔가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분들은 휴지를 챙겨 한기영씨에게 휴지를 주러 화장실 쪽으로 뛰어갔다.
후...사실 한기영씨도, 이경우씨도 모두 이 회사에서 일하면서 본인 직속 상사에게만 잘 보여 인턴까지 된 사람들이었고, 이전 지역 대학을 나와서 가산점 버프까지 받고 입사한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의 행동 수준이 저 정도인 것을 겪다 보니, 이상한 편견이 생기고 ‘나 때는 안 이랬는데...’라는 말이 목구멍을 넘어오려고 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