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진짜 인턴이 왔다_(2)

[41~44개월] 후반전 돌입

by 하이히니

“아니에요. 말 안 할게요.”

“진짜요?”

“네. 말 안 할게요.”

“와...진짜 상혁씨 최고. 진짜 절대 말하면 안 됩니다. 진짜로.”


“네. 그 대신에 이번 주 금요일에 치킨 사주세요.”

“오. 치킨 얼마든지. 두 마리도 사 드림. 원경씨랑 반지 언니도 고고?”

“고고!”

“일단 새끼손가락부터 걸어주세요.”


그렇게, 우린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솔직히, 내가 상혁씨였다면 바로 친구에게 연락해서 이 상황을 전달해줬을 거라 상혁씨의 약속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상혁씨와의 약속을 믿어야만 했다. 그래야 내 맘이 조금이라도 더 편할 수 있었다.


그 주 금요일. 우리는 회사 휴게실에서 치킨을 먹기로 했고, 치킨을 배달시켰다.

“지금 회사 로비에 와있습니다. 이 위로는 올라갈 수가 없어서, 여기로 내려와 주세요.”


치킨을 기다리던 우리에게 걸려온 반가운 기사님의 전화.

나는 상혁씨, 반지 언니와 함께(원경씨는 약속이 있다고 했다.) 1층으로 뛰어내려갔다.

“치킨 왔대요! 내려갑시다! 휴게실에서 편하게 먹어요!”

"예에!!"


치킨이 왔다는 말에 흥분해서, 우리는 모두 1층으로 뛰어내려왔다. 근데...계산을 하려는데...

“어...왜...카드가 없지?”

카드가 없었다. 내가 카드를 어디에 둔 거지? 분명 핸드폰 케이스에 들어가 있어야 하는데...왜?

“기사님, 잠시만요...언니. 언니 혹시 지갑 있어? 카드 있어?”

“아니? 네가 쏜다고 해서 나도 그냥 같이 막 뛰어 왔는데...왜? 없어?”

“어...나 핸드폰에다가 껴두는데 뭐지? 아...”

“다시 갔다 올까?”


상혁씨는 답답한지 한숨을 내쉬었다.

“후...선임님들...저 돈 있어요. 제가 살게요...”

“아...상혁씨...계산만 해주세요. 제가 보내드릴게요...”

“아니에요. 그냥 제가 계산하고...창혁이 만나면 그냥 선임님 얘기하려고요... 이 회사에 네 구여친 다닌다고 말해주려고요...”

“상혁씨...제발...!”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나중에 사무실에 올라와보니 내 카드는 마우스 옆에 있었다. 아마도, 바로 계산을 하려고 잠깐 빼뒀다가, 그냥 치킨 소리 듣고 뛰어 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비밀을 유지하는 대가로 사주기로 했던 치킨은, 상혁씨가 사게 되었다. (지금처럼 카톡으로 돈을 주고받았다면 바로 쏴버렸을 텐데...)

상혁씨 말로는 창혁이 오빠에게 내 얘기를 절대 안 한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솔직히 나 같아도 '너 구남친 우리 회사 다니는데, 너한테 자기 얘기하지 말아 달라면서 치킨 사준다더니, 지갑 두고 와서 내가 계산했잖아. 뭐냐 이 인간?'이라고 내 친구한테 얘기했을 것 같다. 그래서 그냥 아예 관심을 끄고 살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야 수치심도, 괴로움도...덜 느낄 수 있을 테니까...

(참고로, 상혁씨랑 내가 만나자마자 이런 식으로 장난친 건 아니고, 일전에 회사에서 왔다 갔다 지나다니면서 인사를 몇 번 했던 사이다.)


이런 유쾌하지 않은 일이 있었지만, 인턴 두 분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들 덕분에 나와 언니도 오랜만에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둘 다 정상적인 채용 루트를 거친 사람들이어서 그런지 열심히 일하고 싶어 했고, 권팀장도 그 두 명에게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그래서인지 우리를 따로 불러내서 그 둘의 실적을 만들어주기 위해 대신 일할 것을 종용한다거나 하지 않았다. 이것만으로도 큰 소득이었다!


사과녀 김지수는, 처음에는 두 인턴과 잘 지내려고 말도 붙이고 먹을 것도 챙겨줬다. 그러다가 인턴들이 본인보다 나와 옥반지랑 친하게 지내는 것처럼 보이자, 별안간 그 둘에게도 텃세를 부리기 시작했다.

“상혁씨, 솔직히 저도 김지수 주임 싫어하긴 하는데, 괜히 우리랑 티 나게 친하게 지내면 지금보다 더 뭐라고 할걸요? 지난번에도 포스트잇 있는 곳도 안 알려주고 그러지 않았어요?”

“네. 그래서 선임님이 알려주셨잖아요. 전 괜찮아요. 솔직히 제가 여기 정규직 되더라도 제 선배님들은 선임님들이죠. 업무도 선임님들이 다 아시고...나이도 우리랑 더 비슷하니까 더 재밌고...그래서 김지수 주임님이 저래도 전 괜찮아요. 상관 없어요.”


생각보다 그들은 사과녀의 텃세에 대해 큰 타격감이 없는 듯했다. 오히려, 타격을 입은 건 권팀장과 사과녀였다.


원래 이 팀의 구조는 아래와 같았다.

나, 옥반지 vs 권팀장, 사과녀, 경우씨

+ 중립이지만 우리 쪽에 더 가까운 하수석님

+ 중립이지만 권팀장 쪽에 더 많이 가까운 윤주씨


하지만, 이번 인사이동을 계기로, 이렇게 바뀌어 버린 것이다.

나와 옥반지 vs 권팀장, 사과녀

+ 중립이지만 나와 옥반지와 가깝게 지내는 상혁과 원경


이런 구도로 회의를 시작하면, 권팀장이 회의 중 말도 안 되는 것들을 요구할 때 수긍하는 사람이 사과녀 외에는 없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과녀가 업무 수행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그 일을 해낼 수는 없었고, 점점 더 권팀장은 코너에 몰렸다.


하수석님의 공석은 몇 주 동안 채워지지 않았다. 하수석님과 비슷한 역할을 해줄 수 있을만한 사람들 중에 권팀장과 사이가 나쁘지 않은 사람들이 거의 없기도 했고, 권팀장과 친하게 지내는 몇몇 사람들도 그와 함께 일하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권팀장은, 하수석님의 자리를 어떻게든 본인의 라인으로 채우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렇게, 권팀장이 고군분투한 끝에, 그가 오게 되었다.


그...‘그’는 누구인가?


그의 이름은 김성진. 까무잡잡한 피부에 운동을 열심히 할 것 같은 인상을 풍기는 사람이었다. 얼핏 보면 나쁘지 않은 느낌이었는데, 내가 그다지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권팀장과 같은 대학을 나온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사내에 지지기반도 없었고, 능력이 출중한 사람도 아니어서 회사에서 성공하긴 어려운 케이스였지만, 성공에 대한 열망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가 능력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보니 정치질이나 고생스러운 업무에 지원하는 것으로 본인을 어필했다. 그래서 굳이 고생길이 뻔한 파견 업무 지원도 많이 했었고, 그 당시에도 외부에 파견 나가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회사에 다시 들어와서 어느 팀으로 가야할지 물색 중이었던 사람이다.


어쨌든, 그의 정치질과 노력이 효과가 있었는지, 30대 후반이라는 어린 나이에 수석이라는 직함을 달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말했던 것처럼 난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정치질은 위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린 직원들에게는 약간 함부로 하는 사람이었다.


“선임님, 저 진짜 김성진 수석 미칠 거 같아요. 진짜 미쳤다니까요?”

“또 왜요? 뭐라고 했는데요?”

“아니...저 일하는지 안 하는지 감시한다고 제 자리에 카메라 설치해뒀다니까요?”

“뭐라고요?”

“진짜 신고할까요?”

“신고해요. 그건 진짜...”


진짜로, 하루에 일을 얼마나 하는지 확인하려고 자리에 소형 카메라를 설치했다고 한다. 카메라를 설치한다는 것을 대놓고 공표했으니 도촬은 아닌건가? 도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지금까지 들어왔던 그에 대한 평판 때문에 이미 그를 싫어하고 있었지만, 내가 그를 더 싫어하게 된 계기는 하나 더 있었다. 그는, 사과녀 김지수에 대해 이상한 애정, 어쩌면 애정 이상의 그 이상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김지수는 그런 것을 잘 이용했다. (참고로, 김수석은 30대 후반, 김지수는 40대. 김수석이 연하남이다.)


“아, 나 진짜 김지수 존나 좋다. 존나 예쁜 거 같아. 너네가 잘 모르겠지만, 여자는 유부녀가 진짜거든. 괜히 어린애들 건드리면? 탈 나. 아 진짜. 김지수가 딱 내 타입이야. 또 술 한 잔 해야 되는데.”


유부남인 김수석은, 예전에도 가끔씩 우리팀에 와서 저런 말을 날리고 갔다. 사과녀가 자리에 있든 없든 저런 류의 멘트를 꽤 자주 날렸고, 둘이 만나면 상황은 더 가관이었다. (늘 프로필 사진에 아이들 사진을 걸어놓고 저런 말을 하고 다니는 것이 더 별로였다.)


“어? 이게 누구야. 오늘은 있네?”

“수석니임~~아~진짜아~왜 이렇게 오랜만인거에요오~진짜 보고 싶었잖아요~”

“어? 어떻게 이렇게 늘 예뻐? 어? 나 진짜 믿을 수가 없다?”

“아~ 몰라요~”

“뭐 마실래? 사줄까?”

“네~수석니임~전, 수석님이 사주는 건 다 좋아요오~”

“진짜, 이러니까 안 예뻐할 수가 없어. 진짜, 난 너한테 사주는 건 하나도 안 아까워.”

(하지만 안 아깝다면서 법인카드 사용)


유부남과 유부녀는 그렇게 살가운 대화를 나누기 일수였다. 옆에서 보는 게 약간 역하기도 하고, 김수석이라는 인간 자체를 너무나 싫어했기에, 저 사람만큼은 우리팀에 오지 않길 바랐는데...그가 와버렸다.


나, 옥반지, 상혁씨, 원경씨, 권팀장, 사과녀. 그리고 김수석. 이렇게 후반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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