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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히니 Jun 22. 2021

따뜻한 위로가 화근이었다.

퇴사자의 변명

 누가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따뜻한 위로를 건네지 않았어야 했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난 그에게 위로를 건네지 않았을 것이다.


 "대리님, 저녁에 식사라도 하실래요? 회사 근처에서?"

 

 큰 업무 실수에 낙담한 문대리에게, 난 저녁 식사를 제안했다. 평소 일처리가 깔끔한 편이었던 문대리는 업무를 하면서 그렇게 큰 실수를 한 적이 처음인 것 같았다.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절망하고 괴로워하고 자책하고 있었다.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사람은 아니었지만, 열심히 일하던 동료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힘들었다.


 "그래도 괜찮겠어요? 저녁 시간에는 김대리도 쉬어야 될 텐데..."

 "저녁 먹고 가도 그렇게 늦지는 않을 거예요."

 "김대리, 고마워요. 나 진짜 지금 누구 붙잡고라도 말을 해야 될 것 같아요. 정말 미치겠어."


 회사 근처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헤어질 생각이었지만, 회사 근처에서 식사를 하면 기분이 더 안 좋을 것 같다는 문대리의 말에, 우린 택시를 타고 한 15분쯤 걸리는 어떤 맛집을 찾아갔다.


 이렇게 되면, 집에 가는 시간이 좀 더 늦어질 것 같은데?

 예상보다 늦어질 귀가 시간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날은 문대리를 위로하는 데에 힘쓰겠다고 다짐했다.


 평소 약간 차가워 보였던 문대리는, 택시에서부터 본인의 이야기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사실 그거 딱 하나만 확인했으면 이렇게 안 될 일인데.", "그거 그 팀에서 자료만 더 빨리 줬어도 내가 제대로 했을 텐데.", "김대리도 그 팀에서 늦게 준 거 알죠?", "그거 뒷수습할 생각 하니까 미치겠다.", "일이 이렇게 되니까 일하는 게 무서워요." 등등...


 내가 봐도 문대리의 업무 실수는 문대리만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 팀에서 조금만 더 자료를 빨리 줬어도 문대리 그 완벽한 인간은 일을 제대로 해냈을 것이었다. 이게 내 솔직한 심정이었으므로, 그저 그 생각을 표현했다.


 "문대리님, 근데 제 생각에도 그 팀에서 좀 늦게 준 것 같아요. 솔직히 문대리님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요. 대리님이 최종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라서 뒤집어쓰고 죄다 수습해야 되는 거지. 솔직히 이건 문대리님 잘못 아니에요. 저라도 진짜 억울하고 화나고 그럴 것 같아요."


 이런 패턴의 대화가 몇 번 더 오고 간 다음에, 문대리는 마음이 조금 풀어졌는지 더 이상 힘들고 분한 얘기를 하지 않기 시작했다. 


 "근데, 김대리님이 말씀을 잘 들어주셔서 마음이 많이 좋아진 것 같아요. 진짜 감사해요. 이렇게 또 사람 하나 알아가는 것 같아요."

 "아니에요. 문대리님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아니까 저도."

 "근데, 김대리님이 저보다 몇 살 어리시죠?" 

 "두 살이요."

 "그럼 우리, 말 놓을까요?"


 문대리가 나한테 말을 놓자고 한다고? 오히려 내가 선배인 문대리에게 말을 놓아도 괜찮다고 한 적이 있었지만, 그는 이를 한사코 거절했다. 동료로서 나에게 마음을 연걸까?


 "아, 좋아요. 저는 근데 후배니까 그냥 이렇게 말하고 문대리님은 편하게 말씀하세요."

 "그래! 좋다. 오늘 밥 내가 살게."


 그날, 그 식사에서는 더 이상 문대리의 억울한 업무 실수 이야기가 언급되지 않았다. 개인적이고 사적인 대화들이 오고 갔다. 문대리의 마음이 나아진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그게 아니었다. 


 "현수야, 내가 오늘 집에 데려다줄게."

 "네? 대리님 집 이 근처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어. 그렇긴 한데, 너 혼자 집에 가게 하기 싫어서."

 "아... 괜찮은데요?"

 "아니야. 내가 안 괜찮아."

 "(아니요. 대리님이 저 데려다주는 게 제가 안 괜찮은데요.) 아 저 정말 괜찮은데."

 "같이 택시 타고 가자. 진짜 내가 고마워서 그래."


 그는 한사코 택시로 나를 데려다준다고 했다. 솔직히 우리가 술을 마셨던 것도 아니어서, 정 그렇게 미친듯이 고마우면 택시비만 줘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는 기어코 내가 사는 집까지 나를 데려다주었다. 


 "아, 여기가 집이구나."

 "네. 감사합니다..."

 "혼자 산다고 했지?"

 "아...왜요?"

 "아, 아니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존댓말 하던 사이였던 동료가, 갑자기 나에게 필요 이상으로 마음의 문을 연 것이 조금 찝찝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날이 시작이었다.


 그는 그 뒤로 나에게 하루에 몇 번씩이나 전화를 걸고, 하루에 수십 통의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다. 전화를 너무 많이 걸어서, 퇴근한 다음에는 비행기 모드를 설정해둬야 할 지경이었다. 비행기 모드를 하고 있으면 카카오톡으로 전화를 걸어댔다.


 '집 앞으로 갈 테니까 잠깐 얼굴만 보자.', '오늘 퇴근하고 내가 찾은 맛집 갈래?', '내가 그때 너무 고마워서 그런데 좋아하는 브랜드 있어? 사줄게.', '이번 주말에 시간 괜찮아?',  '전화가 비행기 모드네? 무슨 일 있어?', '지금 많이 바쁜가 보네? 뭐해?', '나 지금 집 근처 카페에 왔는데 너 생각난다.' 등등...


 답장을 하지 않아도 혼자 미친 듯이 카톡을 했다. 매일 회사에서 얼굴을 봐야 하는 사람이, 심지어 나보다 선배인 사람이 저렇게 연락을 해대는 통에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다. 게다가, 문대리는 회사에서 꽤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선배였고 옷차림도 굉장히 깔끔한 스타일이었다. (사실, 평소에 굉장히 스마트하고 이성적인 느낌을 많이 받았던 터라, 그런 사람이 갑자기 저런 식으로 돌변하는 것이 너무 이해되지 않았다.)


 바쁘다는 핑계를 대는 것도 한계였다.


 그렇게 이리저리 핑계를 대며 약속을 거절하는 나날들이 지나갔다. 그러다 어느 날엔가, 나는 오랜만에 다른 지역에서 살고 있는 부모님 댁에서 주말을 보내게 되었다. 


 "현수야, 이번 주말에는 시간 괜찮아?" 

 "아, 죄송해요. 저 이번에 부모님 댁에 갈 거라서."

 "아...그래..."

 "네~ 좋은 주말 보내세요!"


 그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할 수 있다는 것. 굉장히 상쾌했다. 


 근데 토요일 밤, 또다시 그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지 않았다. 또 전화가 왔다. 또 전화를 받지 않았다. 또 한 번 전화가 왔다. 이번에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카카오톡 메시지가 왔다. (안 그래도 카카오톡 메시지가 올 것 같아서, 미리보기를 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그의 메시지를 읽고 싶지는 않고, 내용은 확인하고 싶어서 그의 전화를 씹은 후에는, 늘 이런 식으로 준비를 했다.) 


 도대체 그는 어떤 메시지를 보낼까? 이 주말에?


 '나 지금 너희 집 앞이야. 잠깐 얼굴만 보자.', 'oo아파트 앞이야.'


 oo아파트? 우리 부모님이 살고 있는 아파트였다. 씹고 싶어도 너무 놀라서 답장을 보냈다.


 '여기 도대체 어떻게 오셨어요?'

 '아, 어차피 이거 다 사내 시스템으로 조회 되잖아. 이 주소가 나오더라고. 근데 예전에 듣기로 너희 부모님이 이 지역 사는 것 같아가지고...'

 '여길 왜 오셨냐고요.'

 '아, 나 하나도 안 힘들었어. 차도 있고 운전도 별로 안 걸렸고.'


 그래. 당연히 차 타고 왔겠지. 근데 내가 물어보는 건 그게 아니잖아. 도대체 여길 왜 왔냐고... 왜!


 그가 우리 부모님의 아파트 이름은 물론, 몇 동 몇 호에 사는 것까지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이걸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해봐도 답이 없었다. 이 회사의 분위기, 회사 내에서 문대리의 입지를 고려했을 때 내가 그를 신고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몇 년 전의 일이지만, 문대리는 최근까지도 나에게 연락을 주고 있다.


 내가 찾은 맛집에 가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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