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 또 카페인 떨어졌네
난 커피 중독자다. 하루에도 두세 잔씩 커피를 마시고 그렇지 못하면 채워지지 못한 카페인으로 머리가 지끈거린다. 새로운 동네, 도시, 나라에 가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제일 맛있는 커피를 찾는 거다. 그게 곧 기쁨인 대한민국 커피 헤비 드링커.
여행을 가면 특히나 '커피, 커피' 노래를 부른다. 커피 맛있기로 소문난 유럽에선 두말할 것도 없다. 조식과 함께 아침에 마시는 따뜻한 커피도 좋고, 더위에 지친 몸으로 마시는 시원한 커피도(얼음 두세 개 만을 띄워 줄지라도) 너무 좋다. 커피는 내 삶의 활력소다.
남편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언제나 나의 카페인 양을 체크한다. 내가 말이 없어지면 오빠에겐 주의보가 발령된다. 카페인 부족으로 모든 일에 까칠, 예민을 떨기 전에 오빤 재빨리 커피를 살 수 있는 곳을 물색한다. "얘 또 카페인 떨어졌네"
나의 카페인이 완전히 바닥나는 건 오빠에겐 비상사태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서도 오빤 내 카페인 양을 체크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특히 한국보다 더웠던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날씨에 자주 시무룩해지는 나의 표정을 보며 오빤 전전긍긍했다.
누군가 그랬던 거 같다. 인생이 뜻대로만 된다면 그건 인생이 아니라고. 카페인 노예의 공격을 나름 잘 방어하던 오빠의 인생은 블레드에 도착해 뜻대로 흘러가지 않기 시작했다. 슬로베니아 여행의 정점이자 알프스의 진주라 불리는 블레드는 정말이지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수식어를 다 가져다 붙여도 부족할 것 같은, 아름답고 또 아름다운 블레드에서 오빠는 진상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 진상은 바로 커피 마시고 싶다며 오만상을 구기고 있는 나였다.
그날은 또 그렇게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마시고 싶었다. 구차한 변명을 해보자면 그날은 정말이지 더웠다. 게다가 블레드 성에 가기 위해 등산(은 오버지만)도 해야 했고, 성모승천 성당에 가기 위해 플레트나(Pletna)라고 부르는 나룻배도 타야 하는데 이 배를 한참이나 기다려야 했다. "덥다. 더워", "얘 또 카페인 떨어졌네"
점점 바닥나던 인내심도 천국 같던 블레드 호수에선 기적적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에메랄드 빛 아름다움이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던 천국. 하지만 커피 진상은 어디 가지 않았다. 블레드 섬에 도착했더니 또 99개의 계단이 우리 부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계단을 올라 성모승천 성당에 있는 소원의 종을 치면 소원이 이뤄지거나 행복해진다고 한다. 근데 오빠 나는 커피 마시면 행복해져. 그게 내 소원이야. 그것도 아이스로!
유럽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이라면 익히 잘 알겠지만 우리가 즐겨마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찾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아이스커피를 달라고 하면 카페라테에 얼음을 넣은 뒤 휘핑크림을 잔뜩 올려 주곤 했다. 하지만 이날 내가 원한 건 그게 아니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그 시원하고도 깔끔한 맛이 간절했다.
남편의 근심은 늘어만 갔다. 대게 카페인이 떨어지면 급격히 말수가 줄어드는데 이 단계가 지나면 커피 마시고 싶다고 커피 송을 외쳐대기 때문이다. 블레드섬에 도착하자마자 커피 송을 불러대는 내덕에 오빤 천국에서 지옥을 경험했을 거라 추측해 본다. 다행히도 블레드섬에 포티치니차(Poticnica)라는 카페가 있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딱 40분이었다. 다시 플레트나를 타고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카페를 가려면 성당 내부 구경을 포기해야 했다. 오빤 기꺼이 성당 구경을 포기하고 카페로 향했다. 더욱이 포티치니차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만들어 줄 수 있다니 이 얼마나 완벽한가.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건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뜨거운 라테였다. 다시 한번 오빤 얼음이 됐다. 그런데 커피만 주면 순해지는 나는 다 오케이다. 그 순간 오빤 내가 얼마나 얄미웠을까. "아이스 아메리카노 마시고 싶다며!!!"
포티치니차 카페에 요청하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이렇게 만들어 주십니다! 블레드 섬에 가시는 분들 참고하세요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