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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마아빠 Aug 29. 2021

‘산후’ 말고 ‘산전’ 우울증 얘기도 좀 합시다

임신 제12주

지난 4주 동안 아내를 보며 가장 많이 한 생각은 "인간이 저렇게 우울해할 수도 있구나"였다. 예컨대 아내는 이런 말들을 입에 달고 살았다.

“나 너무 슬퍼.”
“나 너무 불행해.”
“누가 내 몸을 빼앗아 간 것 같아.”
“애 떼버리고 싶어.”


'산후 우울증'이야 간간이 눈에 띄는 말이지만, '산전 우울증'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무방비 상태로, 그것도 임신 초반부터 이런 위기를 마주하니 당혹스러웠다. 특히 아이를 떼고 싶다는 말은 내 마음에 깊은 생채기를 남겼다. 아내가 힘들고 괴로워한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지만, 넋이 나간 사람처럼 한탄만 주구장창 내뱉는 아내가 답답하고 미웠다. 가끔은 삶의 의욕을 쪽쪽 빨아가는 아내의 말을 되받아치고 싶은 욱한 마음이 들었다. 그때마다 내가 발휘할 수 있는 모든 인내심을 끌어모아 입을 봉했다. 당시 내가 아내의 말에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았던 것은 정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때의 내가 너무 기특해서 뽀뽀라도 해주고 싶을 정도다. 비슷한 상황에 처한 남편분들께 꼭 말하고 싶다. 당신의 아내는 지금 많이 아프다. 그녀가 하는 말을 액면가로 받아들이지 말라. “나 지금 너무 아프고 힘들고 외로워”로 듣는 게 더 정확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의 감기’라고도 불리는 우울증은 전 세계 인구의 4.4%가 겪는 정신질환이다(WHO). 특히 여성이 남성보다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1.7배 높다고 한다(NCS). 하지만 전문가들은 실제 우울증 환자수는 이보다 더 높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우울증은 환자의 자가진단과 의사의 주관적 평가에 의존하기 때문에, 진단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되는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임신과 함께 찾아오는 산전 우울증 역시 진단과 치료 없이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여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무엇보다도 산전 우울증에 대한 이해와 연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정신질환계의 ‘수학의 정석' 급으로 널리 읽히는 <DSM-IV-TR>(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에서조차 산전 우울증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아직 임부를 대상으로 한 큰 규모의 의학연구가 없었기에, 산전 우울증에 관련된 데이터 역시 미흡한 수준이다. 산부인과는 이러한 실정을 여실히 반영한다. 임부가 가장 의지하는 이곳에서도 ‘산전 우울증’이란 단어를 마주할 일은 없다. 설상가상으로 산부인과 의사들의 높은 업무량 때문에 환자 개개인에게 할애되는 진료시간마저 턱없이 짧다. 따라서 임부의 신체적 건강을 측정하는 소변검사, 피검사, 초음파검사 등은 있지만, 임부의 정신적 건강을 측정하는 검사는 없다. 임부가 먼저 얘기를 꺼내면 다행이지만, 우울증 환자가 자발적으로 자신의 병세를 털어놓을 가능성은 작다. 이 모든 요소가 산전 우울증의 조기 진단을 방해한다.


<임신 우울>(Pregnancy Blues)의 저자 샤일라 미스리는 임신을 긍정적으로만 조명하는 사회적 통념도 산전 우울증을 키우는 데 한몫한다고 일침을 가했다. 미스리가 말하는 사회적 통념이란 임신을 무조건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것으로 미화하고, 임신 자체가 임부를 괴로움이나 아픔으로부터 보호해주리라 여기는 것을 말한다. 이 그릇된 믿음이 오히려 임부의 죄의식과 고립감을 키우고 우울증을 악화시킨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통념은 어디에서 왔을까? 미스리는 임신 중 높아진 여성호르몬, 즉 에스트로겐 분비가 ‘행복 호르몬’이라고 불리는 세로토닌 분비로 이어져 임부가 시종일관 ‘행복감’을 느낄 것이라는 오해가 그 첫 번째 원인이라고 말한다. 두 번째로는 엄마가 된다는 사실을 임부가 무조건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것이라는 착각이다. 임신을 괴로워하거나 우울감을 표출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사회에서, 임부의 우울증은 진단과 치료 없이 곪아간다. 이는 결국 임부뿐만 아니라, 배 속에 있는 태아, 배우자, 주변 가족들의 안위까지 위협한다.


'산전 우울증' 대한 사회적 인식과 대비는 이처럼 열악하다. 당사자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무런 예고 없이 찾아오는  병은 아내와 남편 모두를 아프게 한다. 그렇다면 이에 맞서 남편이   있는 일은 무엇일까? 일단 병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것이다. 병에 대한 이해 없이는 자칫 아내에 대한 미움만 깊어지고 무기력에 빠질  있다.  역시 우울증이라는 병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나니, 아내와 내가 처한 상황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우선 아내에 대한 억하심정이 사그라들었다. 아내가  이상   투정쟁이가 아닌, 애정과 치료가 필요한 가엾은 환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관점의 전환은 내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아내를 향해 불만을 품고 있을 때와, 아픈 그녀에게 힘이 되고 싶은 측은지심 사이엔 극명한 온도차가 있었다. 이는 내가 건네는  한마디와 손길 하나에서 느껴지기 마련이었다. 물론 남편이 마음만 달리 먹어서 문제가 해결되면 좋겠지만, 증세가 심할 경우 상담과 약물치료가 필요할  있다. 그럼에도 아내의 1 방어선인 남편의 역할을 무시할  없다. 올바른 지식을 토대로, 명료하게 상황을 판단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만일의 사태에 아내에게 도움을   있기 때문이다. 이토록 막중한 책임을 온전히 남편 개인에게 지우는 것은 무책임할 뿐만 아니라 효과적이지 못하다. 사회가 나서서 필요한 교육과 안전망을 제공해야 한다. 산부인과에 비치된 각종 책자 아름다운 미소의 임산부만 보여줄  아니라, 다소 불편하고 어색할지라도, 우울증 얘기를  해야 한다. 산전, 산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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