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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마아빠 Aug 22. 2021

혼인관계증명서는 내 필수템

임신 제11주

“디클렉틴 한 알 남았는데?”
약봉지를 손에 든 아내가 실망 반 좌절 반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디클렉틴은 항히스타민제와 비타민B6 성분으로 이루어진 입덧약이다. 이 약의 효능에 대해 국제의료계에선 말이 많지만, 한국에선 다른 선택지가 없어 군말 없이 타 먹고 있다. 매일 저녁 디클렉틴 두 알을 먹어야 잠을 이루는 아내는 내게 약이 떨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신신당부했었는데, 그만 홀딱 까먹고 말았다.
“아…미안... 나 내일 산부인과 쪽 갈 일 있는데 내일 타다 주면 안 될까?”
아내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아파서 잠을 못 자는 게 너였어도 그 말이 나오겠냐, 이 ㅅㄲ야’를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녀의 비언어적 메시지를 단번에 알아차리고 후다닥 말을 바꿨다.
“아니면 지금 여기 근처에 다른 산부인과 열었는지 알아볼게.”


당시 우리는 2주 동안 비어있는 용산구의 부모님 집에 머물고 있었다. 거처가 성북구에서 용산구로 옮겨지면서 다니던 산부인과와도 그만큼 멀어졌다. 마침 다음날 외출할 일이 있어 나간 김에 산부인과에도 들를 참이었으나, 이는 아픈 아내는 안중에도 없고 전적으로 내 편리만을 고려한 계획이었다. 잘못을 만회하기 위해 무조건 약을 구해 와 ‘내가 나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놈이지만 그래도 잘못은 뉘우칠 줄 안다’를 보여줘야 했다. 일단 근처 산부인과 한 곳에 전화를 걸어 대리처방 가능여부와 진료시간을 확인했다. 문 닫는 시간은 저녁 6시 반이고, 대리처방이 가능하나 약간의 준비물이 필요했다. 환자 신분증, 대리인 신분증, 그리고 가족관계증명서(또는 혼인관계증명서)가 필요하단다. 문제는 오늘이 대체공휴일이라 동사무소가 논다는 사실이었다. 만만치 않은 미션이 될 조짐이 다분했다. 최악의 경우를 생각했다. 약을 못 구하면 아내는 통증 때문에 잠을 설칠 것이고, 잠을 설치면 이튿날 아침부터 기분이 안 좋을 것이고, 기분이 안 좋으면 날 싫어할 것이고, 날 싫어하면 전원주택에서 세 식구가 오순도순 살 계획에도 차질이 생길 것이다. 안돼. 그것만은 막아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약을 구해 와야 해. 근데 공휴일에 증명서를 어디서 떼지? 아, 무인민원발급기!


평소엔 발에 챌 정도로 많다가도 막상 필요하면 눈에 안 띄는 것들이 있다. 무인민원발급기도 단연코 그중 하나이다. 네이버지도를 열어 검색해보니 근처 동사무소에 한 대가 있단다. 동사무소는 닫았지만, 간혹 무인민원발급기는 건물 외부에 있는 경우도 있으니 일단 가보기로 했다. 따릉이를 빌려 동사무소를 향해 냅따 달렸다. 역시 요행을 바라면 안 되는 걸까? 무인민원발급기는 건물 밖 어디에도 없었다. 시계를 보니 병원 문 닫을 시간까지 한 시간가량 남았다. 아 어떡하지. 동사무소 말고 또 있을 만한 데가 있나… 코르티솔 분비가 왕성해지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그때 어렴풋한 기억 한 줄기가 머리를 스쳤다. 예전에 지하철 역사 안에서 무인민원발급기를 본 적이 있다! 아니나다를까, 다시 네이버지도를 열어 찾아보니 근처 용산역 안에 한 대가 있단다. 제아무리 공휴일이라도 지하철이 안 하고 배겨? 대한민국 대중교통에 무한한 감사를 보내며 따릉이를 용산역으로 몰았다.


용산역 계단을 전력질주해 올라가 역사 안에 들어섰다. 기차역이라 그런지 안은 광활했다. 매의 눈으로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대합실 중간쯤까지 왔는데도 무인민원발급기는 보이지 않았다. 저만치에 안내데스크가 있어 물어보러 갔더니, 둥그스름한 안내데스크 너머로는 아무도 없었다. 아 맞다. 오늘 노는 날이지. 다시 돌아서 걸음을 떼려던 찰나, 저 멀리 후미진 구석의 호두가게 입구에 초라하게 서 있는 녀석을 보았다. 공문서가 절박하지 않은 이에겐 ATM 기계로 오인될 수 있으나 내 눈엔 어림도 없었다. 그것은 오늘 나를 지옥의 구렁텅이에서 꺼내줄, 대한민국 행정력의 정수, 무인민원발급기가 틀림없었다. 거의 춤을 추다시피 하며 발급기 앞으로 다가갔다. 발급기 화면의 글씨들이 눈에 들어올 때 즈음 불길한 기운이 엄습했다. 등본, 토지, 건축, 차량, 지방세, 건강보험, 여권… 하등 쓸데없는 단어들만 반짝거리고 정작 내게 필요한 ‘가족’이나 ‘혼인’과 같은 단어는 보이지 않았다. 좌절했다. 설마. 무인민원발급기마다 기능이 다른 거야?


망연자실하여 우두커니 역사 안의 사람들을 바라봤다. 저들은 지금 내 기분을 알까? 그때 어딘가에서 깔깔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중학생 정도 돼 보이는 친구 셋이 어깨동무를 한 채 개찰구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저들 중 한 명이고 싶었다.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고뇌했다. 지금이라도 아내에게 전화해 이실직고하면 내 죄를 사하여 주실까? 약은 내일 꼭 구해주겠다고, 오늘은 도저히 방법이 없다고, 미안하다고… 좌절의 늪에서 마냥 허우적대던 중, 아까 발급기 화면에서 본 단어 하나가 기억의 실타래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건강보험… 건강보험… 아, 건강보험! 몇 달 전, 아내를 내 피부양자로 등록하면서 제출했던 혼인관계증명서가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을 거라는 사실이 불현듯 떠올랐다. 바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문자 메시지 내역을 확인했다. 검색란에 ‘혼인’이라고 쳤다. 없다. ‘가족’. 없다. ‘보험’. 있다! 건강보험공단에 보낸 문자 메시지에 내 이름 석 자와 아내 이름 11자가 명시된 혼인증명서 JPEG 이미지 파일이 첨부되어 있었다. 벅차오르는 감격을 누르며 이미지를 살펴보다 한 가지 문제점을 발견했다. 발급날짜가 1월 28일로 되어 있던 것이다. 무려 반년이 지난 날짜였다. 병원에서 이걸 인정해줄까? 잠시 고민했다. 전화해서 7개월 된 증명서도 받아주냐고 물어봐? 당연히 안 된다고 하겠지… 아 몰라 일단 가보자. 얼굴 보면 안 될 일도 될 때가 있으니까. 난 평소에 숲을 못 보고 눈앞의 나무만 보는 편이다. 그래서 아내와 장기 계획을 세울 때, 아니면 회사에서 프로젝트를 기획할 때 도통 쓸모가 없는 인간으로 전락한다. 하지만 짧은 가시거리가 가끔 이런 절체절명의 순간에 용감한 결단력으로 발휘되기도 한다.


용산역을 나가 타고 온 따릉이를 반납하고 택시에 올랐다. 현재 시각 6시. 병원 문 닫기 30분 전이다. 가는 내내 발급일을 문제 삼았을 때 어떤 메소드 연기를 펼칠 것인가를 고민했다. 첫째, 측은지심 캐릭터. “오늘 대체공휴일이라 동사무소가 다 닫아서요… 집에 아내가 몸져누워 있어요…흑흑.” 아니면 둘째, 너 죽고 나 죽자 캐릭터. “아니, 전화했을 땐 발급일 얘기 없으셨잖아요. 이제 와서 그러시면 안 되죠.” 선뜻 한쪽으로 마음이 기울지 않은 채 병원에 도착했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병원 문을 열었다. 접수창구에 앉아 있던 직원이 황급히 마스크를 쓰며 날 맞았다.
“아까 전화로 입덧약 대리처방…”
“아, 네네. 일로 앉으세요. 저희 병원 처음이시죠?”
“네.”
“여기 아내분 신상정보 좀 써주세요.”
접수증을 건네받은 그녀는 그것을 쓱 훑어보고 컴퓨터로 눈길을 돌렸다.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더니 알려주지도 않은 내 이름을 찾아 아내 이름 옆에 적었다. 그 순간 왠지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들면서 조마조마한 마음이 진정되었다. 왠지 저 낡은 컴퓨터가 나를 구원해줄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희망이 차올랐다.
“두 분 신분증 좀 보여주세요.”
신분증만큼은 자신 있었다. 느긋하게 신분증 두 장을 꺼내 그녀가 보기 편한 방향으로 나란히 놓았다. 그녀는 대충 이름 정도만 확인하더니, “디클렉틴 드리면 되죠?”라고 말했다. “앗싸! 혼인증명서는 안 보려나 보다!”를 속으로 외치며, “네. 2주 치 주세요.”라고 담담히 말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원장 방으로 잠시 들어가더니, 이내 처방전을 손에 쥐고 돌아왔다. “수납 도와드릴게요.”


병원을 나오면서 약을 구했다는 엄청난 성취감과, 필요도 없는 혼인증명서를 떼기 위해 따릉이를 타고 용산구 일대를 쓸데없이 누볐다는 허탈감이 교차했다. 분명히 전화로 물어봤을 땐 가족관계증명서나 혼인증명서를 가져와야 대리인 신분 확인이 가능하다고 했는데, 그녀가 잘못 알았던 건지, 아니면 내가 운이 좋았던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처방전을 손에 쥔 이상,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오늘 아내가 잠을 편히 잘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과, 내가 남편으로서 내 똥을 말끔히 치웠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병원을 나와 약국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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