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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마아빠 Sep 05. 2021

옥수수술빵을 사며 어른이 된다

임신 제13주

임신 중인 아내를 옆에서 지켜봤을 때 임신과 함께 리셋되는 몇 가지가 있다. 첫 번째로는 임신 전까지 해왔던 모든 사회활동이 리셋되고, 그다음 기계처럼 지켜왔던 하루일과가 리셋되며, 마지막으로 음식에 대한 호불호, 즉 입맛이 리셋된다. 오늘은 입맛에 관해, 정확히는 입맛 리셋이 남편에게 미치는 영향에 관해 얘기해볼까 한다.


“Sweetheart, 나 그 노랑색 떡 위에 콩 올라간 거 먹고 싶어.”

그날도 어김없이 토하고 눕기를 반복하던 아내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콩이 올라간 노랑색 떡…? 내가 지금까지 먹어본 모든 떡을 떠올렸다. 무지개떡? 영양떡? 호박떡? 무슨 떡을 말하는 거지?

임신한 아내가 뭘 사 오라고 할 때 질문은 금물이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사 와야 한다. 하지만 이번엔 정말이지 감이 안 왔다.

“그 콩이랑 대추 올라간 영양떡 말하는 거야?”

“……”

“몰라…그냥 사와.”

“알았어. 가서 한번 볼게.”

자전거를 타고 돈암시장 초입의 떡집으로 갔다. 가게 앞 매대엔 익숙한 떡들이 진열돼 있었다. 그중 ‘노랑색’과 ‘콩’의 교집합에 속하는 떡을 찾았지만 그런 떡은 없었다.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기에 결단을 내려야 했다. 콩 없는 노란 호박떡을 사든지, 콩은 올라갔지만 노랑색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영양떡을 사든지, 뭐라도 사들고 가야 아내를 마주할 면목이 설 터였다. 결국 콩, 밤, 대추가 잔뜩 올라간 영양떡을 골라 집으로 향했다. 실패를 직감했는지 가는 길 내내 마음이 찝찝했다. 아니나 다를까, 떡을 가방에서 꺼내 보여주자 아내는 고개를 도리도리하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No…”

미안함과 답답함이 뒤엉키며 몸에 힘이 빠졌다. 그때 아내가 입을 열었다.

“우리 지난번 만두 파는 데서 샀던 거…”

만두…? 아, 그, 옥수수술빵 말하는 거였구나! 몇 달 전 집 근처 만두가게에서 샀던 옥수수술빵을 아내가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옥수수술빵은 아내가 말한 두 조건에 꼭 들어맞는 외모였다. 순간 왜 처음부터 만두가게 얘기를 안 했냐고 따지고 싶은 부아가 치밀었다. 하지만 이럴 때 몸이 시키는 대로 하면 어떤 사달이 나는지 익히 경험한 터라, 함구하고 자전거열쇠를 챙겨 다시 집 밖으로 나오는 편을 택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임신 전과 후의 내가 갈린다. 임신 전의 나였다면 분명 아내에게 따지고 들었을 것이다. 미리 말을 안 해줘서 내가 헛수고를 했으니, 이 부당함을 피력하고 넘어가야겠다는 심보다. (그리고 이 대화는 결국 나의 후회와 사과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임신과 함께 한 가지 변수가 생겼다. 바로 입맛이라는 건데, 그것의 주인은 더 이상 아내 자신이 아니다. 그저 우주가 명한 대로 맛있음과 맛없음을 느낄 뿐이다. 임신한 몸이 어떤 음식을 허락할지는 입에 넣기 전까지 모른다. 떡과 빵의 점이지대 어딘가에 있는 이 모호한 음식이 아내의 간택을 받게 될 줄은 그녀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그러니 아내에게 시비를 따지기도 애매하다. 웬만한 일은 그저 속으로 “ㅆㅂ” 한번 외치고, 빨리 적응하고 마는 게 상책이다. 신기하게도 이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아내와 불필요한 언쟁을 하는 일이 줄었다(고 난 생각한다). 여기서 불필요한 언쟁이란, 싸우고 어차피 15분 만에 화해할만한 말다툼을 뜻한다. 내 경험상 이런 타시락거림은 관계를 돈독히 하는 데 보탬이 되지 않는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이롭다. 예전 같았으면 눈을 부릅떴을 일도 이젠 우주 욕 한번 하고 넘어간다. 아내의 입맛 리셋 덕에 내가 어른이 돼간다.


위기의 순간을 잘 넘겼다는 뿌듯함 때문일까. 집을 나서자 모든 게 장밋빛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난데없이 엘리베이터 없는 빌라에 살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5층에 살아 계단을 오르내리는 게 수고스럽긴 하지만, 엘리베이터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보단 백배 천배 낫다. 여차하면 바로 집 밖으로 튀어 나가 아내의 주문을 이행할 수 있다는 점은 남편 노릇에 쏠쏠한 도움이 된다. 특히 오늘처럼 들락날락을 반복해야 하는 날엔 투박하고 기교 없는 계단이 최고다. 엘리베이터 없는 우리집에, 그리고 건강한 두 다리에 감사하며 만두가게를 향해 페달을 밟았다.


집에 돌아와 따끈따끈한 빵을 아내 머리맡에 살포시 놓았다. 고개를 돌려 노랑색 물체를 확인한 아내는 이불을 젖혀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한 손으로 스티로폼 접시를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로 비닐을 벗기며 말했다.

“Thanks, sweethe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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