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마아빠 Sep 12. 2021

‘랜덤타워디펜스’ 살아남기

임신 제14주

임신 1분기는 ‘랜덤타워디펜스’ 게임과 비슷하다. 라운드가 거듭될수록 더 많고 더 무시무시한 몬스터들이 떼 지어 몰려온다. 이 중 한 놈이라도 내 기지 안으로 들여보내면 게임은 끝난다. 미친 듯이 한 놈 한 놈 다 죽이고 나서 이제 숨 좀 고르나 싶으면 다음 놈들이 벌써 기지 앞까지 와 있다. 채 다 못 죽인 놈들은 다음 라운드 놈들과 합세하여 끈질기게 날 공격한다. 임신과 게임이 다른 점은 몬스터의 생김새이다. 게임처럼 몽둥이를 든 반인반수들은 없다. 대신 빨래 널기, 입덧약 타 오기, 저녁 레시피 정하기, 설거지 세제 사 오기, 아내랑 싸우기, 아내랑 화해하기 등의 몬스터들이 끊임없이 몰려온다.


지난 두 달을 꼬박 몬스터들을 쳐내며 살아 온 우리에게 드디어 봄날이 왔다. 놀랍게도 2분기 문턱인 13주 주말부터 아내는 눈에 띄게 좋아졌다. 환자처럼 누워만 있던 사람이 배가 고프면 알아서 냉장고를 뒤졌고, 산책하러 가자고 날 조르기에 이르렀다. 아내 친구들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1분기만 지나면 대체로 괜찮아진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근데 평소대로 출근도 하고 취미 생활도 즐기며 1분기를 지낸 그들이 하는 말이 과연 아내에게도 해당될지 의심스러웠다. 더군다나 사람 몸이 두부모 자르는 것도 아니고 1분기 지났다고 땡 하고 좋아질까 했는데, 웬걸, 정말 땡 하고 좋아졌다. 과학은 역시 과학이구나 싶었다. 그렇다고 그 뒤로 좋은 날만 있었던 건 아니다. 하루 몸이 괜찮으면 다음 날 어김없이 토하고 눕는 익숙한 패턴으로 돌아갔다. 다만 14주인 이번 주부터 좋은 날과 힘든 날의 비율이 서서히 좋은 날 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건 확실하다.


임신 후 아내가 매일 집 밖으로 나간 것은 이번 주가 처음이다. 일주일에 한 번 나갈까 말까 했던 몇 주 전에 비해 몰라볼 정도로 좋아졌다. 요 며칠 유난히 날씨가 좋아, 내가 일하는 동안 아내 혼자 집 근처 성북천으로 나가 개울에 발을 담그며 시간을 보냈다. 일을 일찍 마친 날엔 아내를 찾아가 나란히 물가에 앉아 햇볕을 쬈다. 아내가 한창 입덧으로 사경을 헤맬 때, 내가 무엇보다 견디기 힘들어했던 건 가장 친한 친구를 하루아침에 잃는 상실감과 외로움이었다. 마치 유유히 밟고 서 있던 세상을 누가 뒤에서 잡아채는 느낌이랄까. 그래서인지 친구와 2달 만에 나누는 일상이 너무나도 소중했다. 같이 하는 산책, 같이 먹는 밥, 같이 하는 설거지가 이렇게나 소중한 일인지 임신 전엔 몰랐다. 영화 <노트북>에서 치매를 앓는 앨리가 잠깐잠깐 기억을 되찾을 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곁을 지켜 온 노아의 기분을 조금 알 것 같았다. 아내는 다시 사람처럼 살 수 있어 좋고, 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조잘조잘 나눌 사람이 다시 생겨 좋다.


인간을 망각의 동물이라 하는데, 그런 점에서 나는 우월종자다. 나라는 인간이 크게 변하지 않는 이상, 머지않아 지금 느끼는 애틋함을 당연하게 여길 것이다. 아내가 산책하러 가자고 조르는 데도 뻗대고, 사사로운 일에 성내는 나로 되돌아갈 즈음, 다시 이 글을 꺼내 읽어봐야겠다. 그런 의미에서 이건 미래의 내게 보내는 편지인 셈이다. 제발 좀 까먹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는 편지 말이다. 아내와 팔짱을 끼고 동네 한 바퀴를 걷는 것이, 저녁 먹고 내가 설거지한 접시를 아내가 옆에서 닦는 것이, 아내와 함께하는 잔잔한 일상이 선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달라.

이전 08화 옥수수술빵을 사며 어른이 된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