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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마아빠 Aug 22. 2021

스스로, 더불어, 즐겁게

임신 제9주

오늘은 병원에서 1.8cm의 신체가 만들어내는 심장소리를 듣고 왔다. 누구는 이 소리에 감동의 파도가 밀려왔다고 하지만, 난 큰 감흥이 없었다. 근데 이런 생각은 들었다. 저 작디작은 심장이 앞으로 제 삶을 다하는 날까지 단 하루도 뛰기를 멈추지 않으리라는 것. 우리가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는 생각이 잇따랐다.


요즘 좋은 아빠란 무엇일지, 그리고 행복한 아이란 무엇일지에 대해 생각한다. 사실  질문은 아빠가 되기 전부터 이따금 해오던 것이었다. 미래에 아빠  나를 상상하며 마냥 느긋하게 하던 질문을 며칠  아이의 심장 소리를 듣고 나서부터는  진지하게 한다. 실전이 코앞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오연호 작가의 <우리도 행복할  있을까> <우리도 사랑할  있을까> 도서관에서 빌려  것도  질문에 대한 힌트를 얻기 위해서였다. <우리도 행복할  있을까> 오연호 작가가 자타공인 지구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회인 덴마크를 여러 차례 방문하여 그들의 행복 비결을 관찰하여 기록한 책이다. 자신의 삶에 만족하냐는 질문에 열쇠 수리공부터 택시기사까지, 심지어 죄수까지 인구의 90%  치의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답하는 나라가 덴마크다. “얘네 뭐지?”라는 말이 튀어나올 만한 이곳의 행복 비결을  단어로 요약한다면 ‘스스로, 더불어, 즐겁게 것이라고 오연호 작가는 말한다. 덴마크인들은 스스로 선택한 삶을 살되, 이웃과 더불어 살며, 자신이 즐거움을 느끼는 일들로 삶을 채운다. 그리고 4  출간한 후속편 <우리도 사랑할  있을까> 덴마크에서 보고 배운 바를 한국에 돌아와 강연을 통해 사람들에게 알리고, 한국에서 덴마크식 행복 추구를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내용이다.  그래도 요즘 행복이란 단어를 요리조리 매만지던 내게   권은 너무나도 소중한  줄기 방향을 제시해주었다.


덴마크인들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설계한다. 덴마크의 학교란 지식을 습득하는 장소라기보다, 학생 개개인이 자기 자신의 소질과 개성을 탐구하는 곳이다. 7학년까지 시험도 등수도 없는 이곳에서, 학생들은 자신의 등고선을 뚜렷하게 하는 일에 매진한다. 한국으로 치면 혁신학교와 비슷한데, 국내 혁신학교처럼 비주류의 전유물이 아닌 정부에서 빵빵하게 지원하는 어엿한 제도권 교육이라는 차이가 있다. 또 하나는 혁신학교에서 공부한 것들이 실제로 사회에서 통한다는 점이다. 책에 등장한 이들은 졸업 후 사회에 나가 평등, 사랑, 행복 등을 운운해도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지 않는다고 입을 모았다. 혁신학교 졸업 후 서열화된 경쟁사회를 다시금 마주해야 하는 한국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덴마크인들은 학벌, 직업, 사회적 지위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지표들 대신, 자의로 선택하여 일군 삶을 살고 있는지, 지금 삶에 만족하는지와 같은 ‘나’만 알 수 있는 내적 지표들에 귀기울이는 듯했다.


덴마크인들은 '스스로' 선택한 삶을 사는 것만큼이나 '더불어' 사는 것을 중요시한다.  혼자만 잘사는 삶이 주는 행복엔 한계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예전에 즐겨 듣는  팟캐스트에서 소득 불평등에 대해 다루던  이런 얘기가 나왔다. 무장 경비와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최호화 저택, 이른바 게이티드 커뮤니티에 살아도,  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거리에 나앉은 수많은 노숙자들을 마주해야 한다면, 과연 온전한 행복을 느낄  있을까?  말을 듣고  근처 지하철 역사 안의 노숙자들이 떠올랐다. 한여름에 너덜너덜한 겨울 잠바를 입고, 출처불명의 대형마트 카트를 끌고 다니는 그들이 시야에 나타나는 순간 마음 한편이 찝찝해진다. 우린 안다. 지금  상황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무리 능력주의 논리를 끌어다  불평등을 정당화한들, 내가 이렇게 멀쩡하고 그가 이토록  멀쩡한 현실은 가슴 깊은 곳을 뒤틀리게 한다. 덴마크인들도 이걸 안다. 내가 ‘ 동시에 ‘우리 일부라는 사실을. 그리고 '우리' 온전치 않다면 '' 또한 온전할  없다는 사실 말이다. 이걸 알기에 수입의 50% 이상을 세금으로 내도 불평불만이 없다. 물론 납세자 자신이 수혜자였던 적이 있었기에 가능한 신뢰인 것도 맞다. 반면 한국은 각자도생의 사회다. 천문학적인 치킨집 숫자와 10년째 OECD 1위를 지키는 노후빈곤율이 말해준다. 하지만 각자도생의 길은 행복에 닿을  없다. ‘ ‘ 서로의 행복을 좌우하는 함수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이를 일찍이 받아들인 덴마크인들은 공생과 상생,  '더불어' 삶을 택한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은 '즐거워'야 마땅하다. 내 삶이 즐겁고, 또 우리의 삶이 즐거워야 한다. 우리는 모두 제각기 다른 것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서로 다른 우리가 함께하기 위해선 어울리는 방법 또한 사람 수만큼이나 다양해야 한다. 즉 즐거움의 전제조건은 다양성이다.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 시내엔 천연잔디구장 50개가 모여 있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축구단지가 있다. 재밌는 사실은 이 중에서 1/3만 정규 규격이고, 나머지는 크기가 제각각이라는 점이다. 7:7 게임을 위한 축구장, 5:5 게임을 위한 축구장, 심지어 단 4명이 쫄래쫄래 와서 2:2 게임을 할 수 있는 미니축구장도 있다. 가벼운 예시지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 어떤 다양성도 수용할 준비가 되어있단 뜻이다. 나라가 작정하고 '혹시 몰라 다 준비하면' 이런 모습이겠구나 싶다. 소수라고 배제하지 않고, 모든 다양성을 철저하게 보장하는 나라에서 덴마크인들은 큰 어려움 없이 자신만의 즐거움을 찾는다.


아이가 태어나면 ‘콘크리트보다는 잔디’, ‘경쟁보다는 여유’, ‘성적보다는 배움’, 이런 가치들을 길라잡이 삼아야겠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던 차에 오연호 작가의 ‘스스로, 더불어, 즐겁게’를 만났다. 이 간단명료함이 너무 좋다. 역시 진리는 단순한가 보다. 이 세 단어를 알게 된 이상, 이제는 실천의 문제다. 사실 덴마크와는 너무나도 다른 한국에서 이런 삶을 사는 게 가능하기나 한지, 가능하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지 당장은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다. 하지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으니, 이 세 단어가 가르키는 방향으로 하루하루를 살다 보면 자연스레 이런 삶이 살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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