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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마아빠 Aug 22. 2021

그리스식 치킨구이

임신 제7주

“그리스식 치킨구이.”
입덧치레 3주 차인 아내가 먹고 싶은 게 생겼다며 말했다. 참고하라며 레시피 링크도 보내줬다. 레시피만 보면 그리 복잡해 보이진 않았다. 닭을 손질해야 한다는 점과 집에 없는 향신료 몇 가지를 구해야 한다는 점에서 성패가 갈릴 듯했다. 그래도 차라리 지금처럼 구체적인 메뉴를 정해주는 게 낫다. 배고프다는 말만 하고 아무런 힌트도 주지 않는 날엔 초능력을 발휘하여 아내의 마음을 읽어내야 한다. 그럴 땐 지금까지 아내가 호불호를 표한 음식을 데이터 삼아 선택지를 좁혀나가야 한다. 냄새도 맡기 싫다고 한 음식, 먹고 토한 음식, 먹고 싶다고 해놓고 막상 사 오니 안 먹었던 음식, 아무 기대도 안 했는데 의외로 잘 먹었던 음식. 데이터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그러나 아무리 데이터를 열심히 반영한 데도 오락가락한 입맛 때문에 실패할 가능성은 늘 있다. 결국 복불복이란 소리다. 그래도 지금 구미가 당기는 음식이 1시간 뒤에도 먹고 싶어할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높기 때문에, 그 한 줄기 희망을 위해 달려야 한다. 일단 주문이 들어오면 신속함이 생명이다.


손질된 닭과 감자를 올리브유, 레몬, 로즈마리 등에 버무려 재운  220도로 예열된 오븐에 넣고 45 동안 구우면 끝이다. 문제는 닭이다. 채식 지향 5 차인  닭요리는 둘째치고 닭을 사본지도 5년이 넘었다. 그런 내가 도전하기엔 너무 고난이도 요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1.5 원룸에 딸린 협소한 주방에서 이런 거사를 벌이는  아니다 싶어 바로 모친에게 SOS 쳤다. 레시피를  모친은 “이건 일도 아니다, 라며 흔쾌히 승낙했다. 모친은 자기 집에 오븐이 없으니 마지막에 굽는 것만 오븐이 있는 우리 집에서 하라고 했다.


저녁 때 즈음 모친 집에 들러 양념에 재워진 닭을 픽업할 계획이었으나, 오후 4시 정도가 되니 슬슬 피곤함이 몰려왔다. 더군다나 지금 출발하면 갔다 오는 길이 퇴근 시간과 겹칠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이미 한 시간 전에 아내의 즉흥 주문을 받들어 비건 크림치즈 배달을 다녀온 터라, 이 땡볕에 또다시 나갔다 오는 건 나 자신에게 너무 가혹한 행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머리를 굴리다 떠올린 게 배달대행앱이었다. 요샌 다 그걸로 배달도 시키고, 물건도 보내는 듯했다. 속으로 유레카를 외치며 앱을 다운받아 주소를 입력하니 예상 배달비 14000원이 나왔다. 단돈 14000원에 이 수고를 외주화할 수 있다는 생각에 절로 엉덩이가 들썩였다. 바로 이 계획을 모친에게 알린 후 배달 접수를 눌렀다. 10분 즈음 지나니 배차 사무실에서 전화가 왔다.
“배달 접수하셨죠?”
“네.”
“여기 음식이라고 쓰셨는데, 이게 정확히 뭐에요?”
“아 집에서 반찬을 좀 보내온다 해서…”
“아…저희가 원래 음식은 안 하는데… 그리고 지금 워낙 더워서 다른 데 못 들리고 바로 가야 되거든요. 20000원으로 올려 잡으셔야 할 것 같은데, 괜찮으세요?”
순간 고민했다. 20000원이면 적은 돈이 아닌데… 아 그렇다고 직접 갔다 오는 건 진짜 싫은데… 20000원이라… 잠깐, 지금 내 시급이 얼마지? 월 200이니까 주 50. 평균 근무시간 6x5=30, 그럼 시급이 50÷30=1만6천6백원. 대충 한 시간 일한 셈 치면 되겠다. 오케이.
“네, 그럼 20000원으로 해주세요.”
근데 20000원도 저렴했는지 내가 접수한 콜은 영 잡히지 않았다. 15분 정도 기다렸나. 내가 직접 갈 운명인가 보다 싶어 취소 버튼으로 엄지를 가져가던 찰나, 딩동! 콜이 잡혔다. 순간 머릿속에서 “앗싸! 안 가도 된다!”와 “아, 내 돈 20000원”이 교차했다. “아냐,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아내가 무사히 임신 1분기를 지낼 수 있게 물심양면으로 돕는 거야. 그따위 푼돈에 연연해하지 마!” 느닷없는 애처가 논리로 마음을 다잡고 일에나 집중하기로 했다. 배차가 되고 한 시간이 조금 안 돼서 중년의 기사님으로부터 다 와 간다는 전화가 왔다.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왠지 배달일을 막 시작하신 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 밑에 앉아 키보드나 두드리는 이 게으른 젊은이 대신 바퀴 달린 쇳덩이 위에서 고생하셨을 아버지뻘 기사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죄의식을 조금 덜고자, 500ml 생수 한 병을 냉동실에 넣었다. 10분 뒤 음식을 건네받으며 기사님께 적당히 차가워진 생수병을 건네드리니, 아이 같은 미소를 띠며 고맙다고 하셨다.


집으로 들어와 보냉가방 안의 지퍼백을 여니 상큼한 레몬향과 은은한 로즈마리향이 솔솔 올라왔다. 지퍼백 아랫부분 양쪽 귀퉁이를 잡고 그대로 오븐트레이에 쏟아부었다. 45 , 오븐 타이머의 ! 하는 소리와 함께 그리스식 치킨구이를 서울시 성북구 다세대 주택에서 완성하는 경이로운 순간을 맞이했다. 치킨  조각과 감자  조각을 접시에 덜어 아내 앞에 대령했을 때의 뿌듯함은 이루 말할  없었다. 하루종일 토하고 누워있기만을 반복한 아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Thanks, sweetheart.” 오늘의 임무, 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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